<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과 <눈물의 여왕> 비교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고!”, “애기야 가자” 등, 수많은 명대사를 탄생시킨 <파리의 연인>은 2004년작 드라마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저한테는 이 사람이 김태희고 전도연입니다”라는 명대사를 만든 <시크릿 가든>은 2011년에 방영된 드라마다. 재벌가 남성이 가난한 여성과 사회적 배경의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을 하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서사다. 상기 명대사들은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극적인 사랑이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힐 때 남자 주인공이 발화한 대사다. 상류층 지인들이 강태영(김정은)을 무시할 때, 감독이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에게 윽박지를 때,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의 손을 이끌어 구출한다. 신데렐라 서사에서 공주를 구원할 유일한 해결책은 왕자의 사랑이다.
그런데 만약 왕자가 공주를 구출하길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왕자가 백설공주를 구하지 않고 그저 지나쳤다면 백설공주는 사과가 목에 걸린 채로 계속 기절해 있을 것이고, 왕자가 신데렐라의 집을 방문해 유리 구두를 신겨주지 않았다면 신데렐라는 계속 식모살이를 하며 계모의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즉, 신데렐라 서사는 전적으로 남자 주인공의 능동성에 의해 전개되는 서사 구조다.
■장면의 오마주, 설정의 차이
최근 시청률 16%를 돌파하고,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시리즈 1위를 달성한 <눈물의 여왕>은 겉보기에 <파리의 연인>과 <시크릿 가든>에 성별 반전을 가한 작품으로 보인다. <눈물의 여왕> 5회에서 백현우(김수현)의 누나 백미선(장윤주)이 홍해인(김지원)에게 돈봉투를 건네는 신은 <파리의 연인>에서 한 회장이 강태영의 친인척에게 돈을 건네는 장면, <시크릿 가든>에서 김주원(현빈)의 모친이 길라임에게 돈봉투를 들이미는 장면과 흡사하다. 또한, <시크릿 가든>에서 김주원이 백화점 직원을 성추행하는 손님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장면과 <눈물의 여왕>에서 홍해인이 백화점 직원을 폭행하려는 손님의 손목을 낚아채는 장면은 유사하다. 물론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이 갑질 손님에게 맞섰을 당시 길라임의 영혼이 김주원의 몸에 들어가 있는 설정이었지만,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까칠한 백화점 사장 김주원이 곤경에 처한 백화점 직원을 구한다는 소위 설렘 포인트를 자극한다.
이처럼 단편적으로 보면 <눈물의 여왕>을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과 같은 신데렐라 서사에 성별이 반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의 여왕>의 설정에는 성별 반전전으로 설명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극중 백현우는 서울대 법대 출신의 엘리트다. 그는 퀸즈 그룹의 법무 이사이며, 퀸즈 백화점의 법무팀장이다. <눈물의 여왕> 5화에서 홍해인의 동생 홍수철이 복합리조트 건설을 빠르게 추진할 것을 제안했을 때, 퀸즈 그룹의 회장은 리조트 건설 전 충분히 리스크를 재고해봐야 한다는 백현우의 주장을 신빙한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능력 있는 엘리트라는 설정 덕분에 백현우를 약자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이에 더해 백현우는 용두리 이장의 아들로 퀸즈 그룹의 부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지만 생계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파리의 연인>의 강태영,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과 달리, 그는 비련의 남주인공은 아닌 셈이다.
■‘공감’과 ‘풍자’의 간극
<눈물의 여왕>에서 홍해인- 백현우의 관계를 조명할 때, 빈부격차에서 느껴지는 설움보다는 퀸즈 그룹 내의 직급, 권한의 차이가 강조된다. 특히 백현우가 퀸즈가에서 숨막히는 처가살이를 할 때 이러한 상하관계는 더욱 부각된다. 잘난 엘리트 타이틀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퀸즈 그룹의 사위들은 주방에 모여 제사음식을 준비한다. 심지어 제삿날은 백현우의 아버지의 생일인 탓에 백현우는 매년 본가에 방문하지도 못한다. 집안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회사 내 업무도 홍해인의 통제하에 놓이자, 백현우는 친구, 가족, 정신과 의사에게 우울을 토로하며 이혼을 결심한다.
백현우의 처가살이는 한국 며느리들의 애환을 풍자한다. ‘홍씨 제사인데 준비하는 사람은 김씨, 유씨, 조씨, 백씨’, ‘서로 각자 집에서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는지는 얘기하지 말자’는 대사는 명절 때마다 제사를 준비하는 며느리들의 고통을 미러링한다. 한편으로 백현우의 퀸즈 그룹 생존 일대기는 짠하지만, 백현우에게 공감하여 눈물을 흘리는 시청자들은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여성은 보편적이지만, 처가살이로 고통받는 사위는 웃음을 목적으로 설정된 가상 현실이다. 따라서 백현우 처가살이는 현실을 풍자하는 드라마의 웃음 포인트로 소비될 뿐이지, 시청자들이 백현우의 슬픔에 공감하기를 종용하는 소재는 아니다. 반면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의 강태영, 길라임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재벌가에 무시당하고 소외되는 설정은 시청자들이 주인공에게 정서적으로 깊이 공감하는 지점이다. 20년 전 ‘공감’의 포인트로 활용되던 클리셰를 ‘풍자’로 비튼 <눈물의 여왕>이 회차를 거듭하며 어떤 반전을 만들어낼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