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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블 코인의 여정

by 권용진


80년대 금융 시장에 '파생상품'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했을 때, 세상은 열광했다. 수학과 통계 모델을 기반으로 미래의 리스크를 예측하고 거래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금융 공학'의 탄생처럼 보였다. 수많은 천재들이 이 새로운 시장에 뛰어들었고, 복잡한 수식으로 무장한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 또한 숫자로 세상을 분석하는 퀀트로서, 그 지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역사는 증명한다. 인간이 만든 '완벽한 시스템'은 언제나 허점을 드러냈다.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의 파산부터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까지, 파생상품의 역사는 천재들의 오만과 예기치 못한 시장의 광기가 만나 어떻게 거대한 실패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했다. 실패는 언제나 가장 똑똑하다고 믿었던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경험한 크립토 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테라-루나'의 실험은 '알고리즘 기반의 완벽한 탈중앙 금융'이라는 거대한 신기루를 좇았다. 나 또한 그 혁신의 최전선에서 금융의 미래가 눈앞에 펼쳐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스템의 붕괴는 단순히 투자자들의 손실로 끝나지 않았다. 그 거대한 파편은 예상치 못한 개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혁신의 과정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는 자신의 전문성과 신념 전부를 내걸고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나에게도 지난 2년은 그런 시간이었다. 거대한 시장의 실패 속에서 파생된 여러 어려움과 마주해야 했다. 전문가로서의 길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고통과 자책의 시간도 있었지만, 이 모든 과정이 단지 실패로만 남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버텨왔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다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경험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실패는 종종 우리를 본질로 이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혼돈 속에서 우리가 발견한 본질은 무엇일까?

테라-루나 사태 이후,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모든 논의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그래서, 안전한가?" 모든 대화의 시작과 끝은 담보물의 종류, 회계 감사의 주기, 규제의 강도에 대한 것이었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의 글로벌 사용성에만 주목했다. 기존의 SWIFT 망을 대체할 수 있는지, 국제 송금 수수료를 얼마나 낮출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물론 두 가지 모두 중요한 지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 거대 담론이 스테이블코인이 가진 훨씬 더 근본적인 가치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테이블코인의 진정한 의의는 '안전한 코인'이나 '빠른 국제 송금'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이는 마치 아이폰의 가치를 '끊기지 않는 통화 품질'이나 '선명한 디스플레이'에서만 찾는 것과 같다. 아이폰의 진짜 혁신은 그 위에 수백만 개의 애플리케이션이 올라갈 수 있는 앱스토어라는 생태계를 연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이 바로 금융 세계의 운영체제이며,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금융 앱스토어의 시대다.

금융 앱스토어란 무엇인가? 은행이나 증권사 같은 거대 기관이 독점적으로 만들던 금융 상품을, 이제는 누구나 자신의 필요에 맞춰 앱을 만들 듯 자유롭게 창조하고 조합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앱들을 만드는 도구가 바로 스마트 컨트랙트다. 스테이블코인은 이 모든 앱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는 결제 모듈이자 가치 저장 수단, 즉 생태계의 기축통화가 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월 주차권의 재판매: 강남의 직장인이 30만 원짜리 월 주차권을 구매했다고 가정하자. 재택근무를 하는 날, 그는 비어있는 자신의 주차 공간을 시간 단위로 다른 사람에게 재판매할 수 있다. 스마트 컨트랙트는 판매 등록, 결제, 주차장 입차 허용, 정산까지 모든 과정을 자동화한다. 여기서 오고 가는 돈이 바로 스테이블코인이다.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유휴 자산의 실시간 금융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P2P 대출과 자동 정산: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갑자기 식자재 대금을 위해 3일간 500만 원이 필요해졌다. 그는 자신의 가게가 매일 벌어들이는 카드 매출의 30%를 상환 재원으로 약속하고, P2P 플랫폼에 대출을 요청한다. 수십 명의 소액 투자자들이 스테이블코인으로 돈을 빌려주고, 스마트 컨트랙트는 그날부터 매일 발생하는 카드 매출 데이터를 자동으로 가져와 투자자들의 지갑으로 원금과 이자를 쪼개어 상환한다. 사람 사이의 신뢰가 아닌, 코드와 데이터가 신용을 보증하는 시대다.


예약 앱의 노쇼 비용 관리: 인기 있는 미용실이 예약금 1만 원을 스테이블코인으로 받는다. 이 돈은 고객의 지갑에서 빠져나와 스마트 컨트랙트에 보관(에스크로)된다. 고객이 예약 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시술이 끝나는 순간 예약금은 자동으로 고객의 지갑으로 환불된다. 만약 고객이 나타나지 않으면, 예약금은 자동으로 미용실의 지갑으로 전송된다. 더 이상 '노쇼'로 인한 감정 소모나 행정 낭비가 사라진다.



이처럼 금융 앱스토어는 이전에는 금융의 영역이 아니었던 수많은 일상의 약속과 거래를 금융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시장 전체의 파이를 키운다. 최근 뜨거운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도 바로 이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진정한 가치는 해외에서 원화를 쓰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바로 한국의 개발자와 기업들이, 우리 일상의 문제(전세금, 노쇼, 주차권 등)를 해결하는 한국형 금융 앱을 만들 수 있는 우리말 운영체제를 제공하는 데 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테라-루나와 같은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의 실패는 분명 비극이었지만, 그로 인해 시장은 더 단단한 길을 찾게 되었다. 미국에서 논의되는 '지니어스 법(Genius Act)'이나 전 세계적인 규제 흐름은, 이제 스테이블코인이 반드시 100%의 안전한 담보물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냈다. 이는 다시 말해, 테라-루나와 같은 방식의 붕괴는 사실상 제도적으로 방지될 것이라는 의미다.

피해의 규모는 제한될 것이고,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언제까지 과거의 실패에 얽매여 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어야 하는가? 자동차 사고가 무섭다고 해서 영원히 마차만 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패가 쌓여 길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파생상품의 실패는 더 정교한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낳았고, 닷컴버블의 붕괴는 진짜 인터넷 기업을 가려내는 계기가 되었다. 크립토의 혹독했던 겨울 역시, 이제는 '금융 앱스토어'라는 새로운 챕터를 열기 위한 성장통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이제는 두려움의 시대를 지나, 가능성의 시대를 이야기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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