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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마 Jul 03. 2020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에서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법

이제야 뭔가 제대로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3월 초, 개학 첫날이면 빼놓지 않고  왔 입학식을 2020학년도 1학년 아이들은 하지 못한 채, 초등학교 재학생으로 등록되었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세계 온 나라가 들썩였다. 교육부에서는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학교가 감염 전파의 주원인 지대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코로나 19 휴업’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학교가 휴업을 하였다.


학습공백이 커지게 되어 더 이상 휴업을 할 수 없게 되어 원격수업 체제로 들어갔다. 이런 상황은 이제껏 처음이었다. 교육부에서 인프라를 구축하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맞는 원격수업 방법을 찾느라 시간이  지나갔다.


원활한 온라인 수업을 하기 위해  학교에서 학생 가정의 인터넷 환경을 조사했다. 조처가 필요한 가정을 방문하여 수업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화상영어수업 등 방과 후 시간 외에 정규수업시간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컴퓨터실의 캠과 헤드셋, 태블릿 pc 등을 확인했다. 장비를 점검하고 수리하여 수요가 필요한 가정에 대여해 주었다. 선생님들 원격수업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익히고 수업을 준비하였다. 긴급 돌봄으로 학교에 아이들이 일부 나왔다. 각 반 담임은  학생 원격수업 따라갈 수 있게 가르쳤다. 가정에 있는 학생을 위해서는 따로 원격수업을 하였다.

매일의 일상은 새로운 공문 내용으로 교무회의는 거다. 이 조금씩 다르지만 e배움터, 구글 클래스룸과 줌, 오캠, ms 팀즈, 밴드 라이브, 카톡 등 이용한 원격수업 방법, 생활 거리 유지하기 등 로나 예방 이야기다. 거듭된 개학 연기로 라진 상황에 따새로운 대책을 세다. 회의가 누적될수록 피로높아갔다.


  "이놈의 코로나 빨리 끝나야 할 텐데."  


지인과 있을 때 입에서는 코로나가 '놈'이 된 지 오래였다. 원격수업을 위한 기반조성으로 매일 새로운 업무지시가 떨어졌다. 마음이 바빴다. 지루함과 바쁨,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아이러니한 두 상황을 경험했다. 기분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나날이었고 모든 것이 불확실성 속에서 냄새를 풍기며 떠 있었다. 하루하루 '치러낸다'는 표현이 맞았다.


코로나 19가 주춤했다. 하루에 확진자로 판명된 사람의 수가 한 자리 숫자로 나올 때였다. 다음 주면 개학을 하고 아이들을 대면하여 공부를 제대로 시작할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뜻하지 않게 '서울 이태원 클럽 발 코로나 19 집단감염' 사건이 터졌다. 조금은 예상했던 것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종료되기 직전, 어린이날을 포함한 긴 연휴가 있었다. 단계적 개학의 첫 주자인 전교생 60명 미만 학교와 고3 학생들의 등교 개학이 1주일 더 미뤄졌다.


우여곡절 끝에 등교 개학일이 다가왔다.


아무리 코로나 19라지만, 몇 명 되지 않은 1학년 학생들의 입학식을 조촐하게라도 해 주고 싶었다. 환경판에 있던 그림을 떼어 칠판에 붙였다. 그림 속 곰돌이는 입학생 이름이 적힌 풍선을 들고 웃고 있었다. 내 마음과 같은 표정이었다. ‘입학을 축하합니다’라는 글자를 크게 출력하여 붙였다. 하트 풍선으로 칠판 양쪽에 꽃 모양을 꾸몄다. 풍선을 붙여놓으니 좀 더 입체적인 느낌이 났다.  베이커리에 전화를 하여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맞추었다. 아이들을 만날 생각을 하여 흥분이 되었는지 준비하면서 연신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 대충 한다고 하더니 많이 신경 쓰시네요. ”

풍선을 붙여 놓았는데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쪽이 언발란스로 느껴졌다. 풍선을 다시 불어서 붙인다는 내 말에 돌봄 전담사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학교 교실 공간이 모자라서 우리 반 교실을 돌봄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1학년 교실이 돌봄 교실이 되었다. 돌봄 선생님과 친분이 생겨 아이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입학행사 내용에 이름표 달아주기, 교장선생님의 동화책 읽어주기, 케이크에 불을 켜고 끄기, 케이크 자르기, 기념사진 찍기를 넣었다. 후배인사 등은 다.


코로나 상황이 입학식이 늦었지만 그 의미를 학생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러려면 나부터 확실히 알고 있어야 했다. ‘이름’이라는 말에 담긴 뜻과 유래를 알고자 인터넷 검색창에 단어를 쳤다.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이나 사물, 단체, 현상 등에 붙여서 부르는 기호


‘하늘은 녹(錄)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는다.’는 비유와 함께 사람의 존재가치를 설명해 주다. 이름은 본질적인 존재의 문제여서 출생과 더불어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

‘케이크에 촛불 켜기와 끄기’를 검색하였다. ‘생일날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너무 기뻤다.’ ‘크리스마스와 팔순 잔칫날 케이크에 촛불을 켰다.’ 등 내용이 나왔다. 래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달의 여신을 위해 둥근 케이크를 바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생일 케이크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중세 독일로 추측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아이의 생일 아침에 촛불이 켜진 케이크를 선물로 주었다. 하루 종일 불을 켜놓고 저녁식사 후에 가족이 나눠먹었다. 전염병으로 자녀를 많이 잃어서인지 자녀의 나이보다 생일 초 한 개를 더 꽂아놓아 건강을 기원했다. 촛불 하나하나가 아이의 생명을 뜻했다. 소원 비밀에 부쳤고 한 번에 촛불을 야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었다. 케이크를 자르는 의미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다.’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어떤 행사가 있을 때 시루떡을 엎어서 잘랐고 이웃과 나눠 먹었다. 간의 기원하는 마음은 동서양에 관계없이 이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릴 적 내 생일, 어머니는 생일 시루떡과 미역국을 항상 끓여주셨다. 앉혀놓은 쌀가루 사이에 내가 좋아하는 형형색색의 사탕을 넣어 떡을 만들어주셨다.  하얀 쌀가루 사이에서  반짝였던 알록달록 사탕은 예뻤다. 떡을 먹기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지금까지 나를 위한 떡 중에서 이토록 달고 정성 들인 떡을 먹어본 적은 없었다. 이제는 런 떡을 들 일도, 먹을 일도 없어졌다. 제과점 가면 입맛에 맞는 케이크를 손쉽게 입할 수 다. 고구마, 치즈, 생크림, 초코, 생과일 등 재료에 따라 종류도 다. 집에 가더라도 모양과 맛, 건강까지 잡는 예쁘고 몸에 좋은 떡들이 다양하게 있다. 


“선생님, 저 혜미 아빠입니다. 등교가 너무 빠르지 않을까요. 2주 정도 연기면 좋겠는데요.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혜미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국적으로 확진자가 늘어났고 인근 지역에자가 나와서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부모님 심정이 이해가 되어서 코로나 19 상황, 학교 방역 상태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혜미 엄마와 상의하여 저녁에 결정하기로 매듭을 지었다.


식의 구체적인 내용을 생각했다.  첫 시작을 밋밋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어느 곳 어떤 상태에  있을 때 첫 단추를 시작할까 생각했다. 이 교실의 주인공임을 만천하에 알리듯 당당하게 들어오도록 고싶었다.


등교 첫날, 혜미는 결국 오지 못했다. 당연히 왔던 학부모와 재학생 언니들도 오지 않고 교장, 교감만 입학식에 참석을 하였다. 담임인 내가 사회를 진행하였다.


시작 멘트에 이어 1학년 교실 뒤 출입구 부근에 서 있던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줄을 섰다. 선생님들이 축하인사를 하며 박수를 쳤다. 떨리지도 않고 무렇지 않다던 이들 얼굴 발그레 상기어 있. 교감선생님은 학생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며 줄이 있는 이름를 목에 걸어주고 격려하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나 학교 선생님들이 여러분 이름을 알고 러주게 될 것이며 곧 친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당분간학교에 오면 이름표를 목에 걸고 다니자고 하였다.

작년 같았으면 학생들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목에 걸고 3월 한 달을 팔랑거리, 학교 안을 누비고 다닐 터였다. 이즈음, 교직원과 재학생 선배들은 신입생들의 이름을 벌써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학생자치활동에서 ‘ㅇㅇ 야’ 다정하게 부르 선후배 간의 사랑을 차곡차곡 쌓고 있을 시기였다.

교장선생님의 아이들에 대한 훈훈한 축하 격려와 그림책 읽어주기 시간이 었다. 백희나 작가의 ‘알사탕’이다.
겉표지에는 남자아이가 분홍 알사탕을 들고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노는 '동동이'다. 동동이는 알사탕을 먹자 소파의 소리가 들리고 아빠의 끝없는 잔소리가 '사랑해'로 들렸다. 심지어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까지 들려 언제나 할머니 소리를 듣기 위해 풍선껌을 식탁 밑에 붙여두었다. 마지막 남은 알사탕을 먹자 자신에게 말을 걸던 소리가 더 이상 나지 않다. ‘그럼 내가 말하지 뭐. 나랑 놀지 않을래?’라고 용기를 내어 동동이가 다.


동동이는 이제 친구들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것이다. 친구들에게 함께 놀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용기를 낸 아이, 동동이처럼 우리 반 아이들이 서로 '같이 놀자'라고 말 면 좋겠다. 더불어 함께 노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길 바랐다. 하고 싶은 말을 속에 쌓아두지 않고 마음껏 말하는 아이들, 서로헤아릴 줄 아는 공감 능력이 있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하였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이야기 들었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표정을 자세히 보지는 못하였다  눈을 보 진지한 분위기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 I love you' 모양의 초에 불을 붙였다. 불을 하나하나 켤 때 다같이 큰소리로 숫자를 세었다.  거운 학교생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촛불에 담았다. 잠시 동안 아이들과 함께 불이 붙은 초를 바라보았다.


촛불을 끄는 타임이 왔다. 코로나 19비상상태였다. 평상시처럼 입김을 불어서 촛불을 끄면 안 되었다. 코로나19 불을 끄는 방법 알아보았다. 선생님들과 얘기를 하여 다 같이  박수를 쳐서 끄는 방법, 젓가락으로 눌러서 끄는 방법 을 알게되었다.  아이들이 숫자를 셀 때 내가 나무 젓가락으로 촛불을 눌러 한 개씩 다. 이크의 초에 불을 붙이고 끌 때 분위기는  따스하면서 조금 엄숙했다. 식을 왜 하는 지 의미가 아이들에게 전달된 것 같았다. 마지막 순서로  기념사진을 찍고 축하한다는 멘트와 박수로 끝맺음을 하였다.


이렇게 간단하게나마 입학식을 하니 뭔가 제대로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아직도 유치원 상태의 생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비로소 초등학교 학생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났을 것이다. 심리적으로 유치원생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케이크의 불은 꺼졌고 잘라서 조금씩 나눔을 했다. 우여곡절이었지만 등교 개학이 이루어졌 불안 속에서나마 작년의 평범한 일상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스크를 쓰고 등교다.  매일 아침 아이들이 학교 가기 전, 가정에서는 자가진단내용을 앱으로 제출했다. 학교에서 입실 전,  수업 중, 식사 전, 방과 후 수업 등 하루에만 4-5차례  발열체크를 했다.


"계속 열 재고 친구들하고 얘기도 못했어. 그래도 좋았어! 할머니!"


지인 이안나 선생님의 1학년 손녀가 등교 개학 후 첫날 했던 말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 손녀처럼 '그래도' 좋았다. 이들을 만날 수 있다면 등교에 필요한 사소한 불편함 들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마스크로 가려졌지만 얼굴을 대하고 눈빛을 나누며 공부를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기본생활습관과 예절, 수학과 국어 등을 가르쳤다. 많이 웃었고 가끔 화도 냈다. 아이들도 서로 협동하고 배려하며 생활하다가도 가끔 다투기도 했다. 이렇게 귀엽게 살아 움직이는 고귀한 생명체가 마냥 귀하고 예쁘기만 했다. 코로나 19가 물러나 마스크를 벗고 생활하면 더 좋겠지만 아이들과 함께여서 '그냥 ' 다. 평범하기만 했던 일상이 특별한 것이 되어버린 지금, 코로나 19의 방해 없이 우리 반의 순항을 기도할 뿐이다.

새로 시작하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아, 늦었지만 입학을 축하! 앞으로 행복한 학교 생활을 하기 바란다. 사랑한다!  2020학년도 내 둥지에 들어온 아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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