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원석 Jun 07. 2018

5. 엄마도 여자면서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이 

그리 싫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은 주일이어서 푹 자려 했는데, 

다른 날 보다 더 일찍 눈이 떠졌다. 

나는 창문을 열고 기지개를 켜며 거실로 나왔다. 

안방 문도 삼촌, 오빠 방문도 닫혀 있었다. 

거실 문을 열었다. 상큼한 바람이 나를 밀쳐내었다.

‘아 벌써 봄이구나.’

내 마음이 부웅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희망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멀고 먼 나라로 노 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노랫말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빠가 

콧노래로 즐겨 부르는 동요가 생각되어 콧노래를 불렀다. 

누구나 아침은 희망과 노래로 맞이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아침에는 희망을 갖고 낮에는 비지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밤에는 하루의 일을 반성하라.” 

아침과 희망, 내도 어제 저녁 식탁에서의 

돼지 비계일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래. 난, 누가 뭐래도 아빠 딸 엄마 딸이야.’

수영이 마음은 깃털이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렇지.’

수영이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좋은 생각이란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일이다.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아버지를 드리면··· 

수영이는 생각만 해도 설레었다.


수영이는 냉장고 안을 살펴보고, 

또 다용도실에 가서 야채도 살펴보았다. 

냉장고에 두부도 한 모가 있고, 

달걀도 반판이나 남아 있고, 다용도실에 북어도, 대파도 있었다. 

이쯤 되고 보면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이다.

수영이는 북어를 가져다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홍두깨 방망이로 자근자근 두드렸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삼촌이 부스스한 얼굴로 제일 먼저 나왔다.

“삼촌 어제 늦었어?”

수영이가 잠자리에서 뒤척일 때까지 삼촌이 들어오지 않았다. 

늦게 들어온 모양이다.

“삼촌 어젯밤 술 먹었지?”

수영이는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삼촌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어국 끓이는 거야?”

“네가?”

삼촌 말에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어국이 아니라, 혹시 북어 목욕탕 만들려는 거 아냐?”

“목욕탕이 아니라, 사우나 시켜 줄려고 그래요. 왜?”

삼촌 말에 수영는 가볍게 눈을 흘겼다. 

삼촌은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한 컵을 벌컥벌컥 마셨다. 

물 마시는 소리만 들어도 수영이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콩- 콩- 콩”

수영이는 북어를 두드렸다. 

북어가 너무 말라서 그런지 잘 두드려 지지가 않고, 

두드리면 통통 튀었다.

“이리 줘 봐라. 그렇게 해서는 오늘 하루 종일 해도 안 되겠다.”

삼촌은 홍두깨를 빼앗았다.

“콩쾅- 쾅-”

삼촌은 세게 두들겼다.


“삼촌 엄마 깬단 말야. 

누군 뭐 세게 두들길 줄 몰라서 그러나?”

“이제 일어날 시간 됐어. 

여자하고 북어는 사흘에 한번씩 

이렇게 두들겨 패야 한데.”

삼촌은 북어를 마구 두들겼다.

“삼촌은 순 엉터리야. 거기에 여자가 왜 들어가? 

작은엄마 될 경애 언니한테 일러바칠 거야.”

“이르든지 말든지, 난 우리 속담 얘기를 한 거뿐이니까.”

\n“삼촌 뭐 하는 거예요?”

안방에서 엄마가 나왔다.

기어이 산통이 깨지고 말았다.

“술국 끓일려구요.”

삼촌은 곤란한 내 역할을 잘 대역하였다.

“이리 줘요.”

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고, 

엄마는 삼촌 손에서 홍두깨를 빼앗았다.

“삼촌 결혼해서나 잘 하세요. 

남이 보면 시동생 술국도 

안 끓여 주는 형수로 알겠어요.”


수영이는 그곳에 있기가 거북살스러워 자리를 피했다.

“아침부터 웬 술 얘기야?”

아버지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형님, 우리 해장국 먹으러 가요.”

“해장국은요? 내 얼른 북어국을 끓일 테니 집에서 드세요.”

엄마가 서둘러 아침 준비를 하려 손을 씻었다.

“아녜요. 형수님, 제가 대접하고 싶어요. 

늘 제 뒤치다꺼리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잖아요. 

오늘 아침만이라도 좀 쉬세요.”


“어허- 이거 결혼 날짜를 잡더니, 

철이 나는 모양이군. 좋지. 해장국 먹자.”

“수영이가 해장국을 안 먹잖아요?”

“가서 다른 거 먹지. 민우야, 어이 일어나라. 

해장국 먹으러 가자.”

아버지는 민우 방에다 대고 소리쳐 불렀다.

“해장국요?”

민우는 바지를 추켜 올리며 나왔다.


“수영아, 너도 가자. 

해장국 말고 설렁탕도 있어.”

다른 때 같으면 설렁탕도 싫다고 했으련만, 

오늘 아침 모든 일을 삼촌이 잘 넘겨 

그 고마움에 잠자코 있었다.

“그래. 수영아 가자.”

엄마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아버지는 삼촌이 엄마 칭찬을 하는 바람에 좋아서 

싱글벙글 할 뿐 수영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삼촌도 엄마도 수영가 싫어하는 해장국을 

먹으로 가자고 하는데, 

정작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수영이는 활짝 개였던 마음이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수영이는 아버지를 위해 북어국을 끓이려 하였는데, 

도대체 아버지는 수영이를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으니 말이다.


“엄마, 나 해장국 집에 안 갈래.”

수영이는 슬쩍 버텨 보았다. 아버지 눈치를 보기 위해서였다.

“여보, 수영이 먹을 밥 있나?”

아버지는 엄마에게 물었다.

“그건 왜요?”

엄마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수영이 먹을 밥이 있으면 경애씨에게 

전화해서 오라고 하지. 같이 가게 말야.”

“당신은?”

엄마는 아버지를 보며 눈을 흘겼다.


“수영이가 안 가면 자동차 자리가 되잖아.”

맙소사. 아버지는 수영이 자리 대신에 작은엄마가 될 

경애 언니를 데려 가자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 말대로 그렇게 하세요.”

수영이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태연한 척 했다.

“아냐, 아냐. 그건 아니 될 말이옵니다. 공주 마마.”

삼촌이 굳어져 있는 분위기를 애써 부드럽게 하려했다.


“형님, 오늘 경애씨 큰집에 간다고 했어요. 

수영아, 오늘 내가 안내하는 해장국집 말야. 

김치 맛 끝내 준다. 넌, 아마 김치만 가지고도 

밥 한 그릇 다 먹을 거야.”

삼촌은 내 편에서 말했다. 

수영이는 더 이상 버텨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오늘 오전에 뭐 특별한 일 없으시죠?”

삼촌이 엄마와 아버지를 보며 물었다.

“특별한 일 없지. 그런데?”

“가는 데가 좀 멀거든요. 안양 관약역 앞이에요.”

“안양까지요?”

엄마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그 의외의 표정에는 멋처럼 

어디 나간다는 기쁨이 숨어 있어 밝았다.


“삼촌, 난, 아무래도 집에 있어야 되겠는데요.”

수영는 아침 먹고 친구들과 무역센타에서 하는 문구 

전시회에 가기로 약속한 것이 생각났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요.”

“누가 시곗줄이 바쁘지 않다고 할까봐.”

여태껏 잠자코 있던 오빠가 불쑥 끼어 들었다.

“꼭 지켜야 할 약속이니?”

삼촌은 아쉬워하며 물었다.

“예.”


“약속은 약속이니까 지켜야지. 

좋아 내가 올 때에 김치 좀 얻어오지.”

“지금 연락해서 취소하면 안 되는 거야?”

엄마는 내가 안 가는 것이 안됐는지 물었다.

“무역센타 문구 전시회 가기로 했어요.”

“잘 논다. 지네들이 뭘 안다구, 문구 전시회에 간다는 거야?”

오빠가 또 끼어 들었다.

“알았어. 오빤 그만해.”


“그래. 그럼 집 보거라.”

아버지는 수영이를 집에 있게 했다.

“삼촌, 나 삼촌 방에서 음악 들을께.”

수영이는 삼촌 방에 있는 음악 듣는 것이 좋아 

음악을 듣고는 하였다. 

“그러렴. 그럼 나도 부탁 한가지 하지. 

자두 빛 가방 있지? 그 가방 손잡이가 좀 뜯어졌는데 꿰메다 줘. 

돈은 나중에 준다고 해.”

“알았어요.”


“너, 삼촌 방에 것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

엄마가 주의를 주었다.

“알았어요.”

모두들 해장국을 먹으러 가고 난 집안은 퍽 조용하다. 

지금 시각이 7시 10분. 그러니까 친구들과 약속한 

10시 30분이면 시간이 꾀 있었다. 

수영이는 삼촌 방에 들어가 오디오에 스윗치를 넣었다. 

그리고 삼촌이 분위기 잡을 때 하는 대로 

턴 테불에 판을 올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 판을 찾아 올려놓아야 할 지 망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삼촌이 가지고 있는 판은 모두 

내가 잘 알 수 없는 클래식이기 때문이었다.

삼촌이 하도 잘 틀어 쟈켓이 눈에 익은 게 있어 꺼냈다. 

삼촌이 잘 듣는 ‘사랑의 기쁨’이었다.

수영이는 얼른 방으로 가서 수첩을 가져 왔다. 

수첩에 삼촌이 번역 해준 사랑의 기쁨 노랫말을 적어 놨다.


수영이는 턴테이블에 판을 올려놓았다. 

직직- 긁히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은은한 멜로디가 방안을 맴돌기 시작하였다.


사랑의 슬픔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기쁨만 영원히 남았네

눈물로 보낸 사랑 나의 실비아여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랑 찾아 

사랑의 슬픔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기쁨만 영원히 남았네.


삼촌이 너무나 좋아해 식구들 귀에 박힌 노래. 

이 노래의 원래 가사는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인데 

삼촌은 슬픔과 기쁨은 바꿔서 불렀다.

나도 이 음악의 남자처럼 날 좋아하는 남자가 있을까? 


삼촌 말에 따르면 이 노래를 작곡한 사람은 독일 사람으로 

17살 때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여 ‘프란체스코’ 소속 수도원의 

올간이스트가 되었다가 19살 때에 프랑스로 가서 

이탈리아 풍의 이름 마티니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래는 한 남자가 실비아라는 여인을 몹시 사랑하였는데 

그만 실비아는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나이가 그 여인을 잊지 못하는 

애절한 내용이 담긴 글이라고 한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수영이를 아주 어른스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물론 학교에 다녀  왔을 때, 

집에 아무도 없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 같이 이렇게 예고되고 아무도 집에 없다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다.

수영이는 아침에 못다 끓인 북어국을 끓여 

호젓한 기분으로 아침을 먹었다. 

음식을 만드는 재미도 쏠쏠했다.


수영이는 삼촌 자두빛 가방을 들고 

친구들과 약속한 시간 보다 일찍 나갔다. 

가방, 구두, 열쇠 뭉치들이 앞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으로 보아 아저씨는 어디 안 가신 모양이다. 

아저씨는 열쇠 수선을 하느라 

곧잘 가게를 비우실 때도 있다.


아저씨 가게 안에서 국악이 흘러나오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그런 가락이었다. 

그러나 그 가락이 생각나지가 않았다. 

아저씨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고 있었다.

“수영이 왔구나. 기분이 괜찮아 보이는데.”

아저씨는 책을 덮으며 나를 반겼다.

“삼촌 가방 손잡이 좀 꿰메 주세요.”


“그러지. ‘꿈꾸는 에밀리’는 다 읽었니?”

“아직 다 못 읽었어요. 조금 봤는데 에밀리가 너무 불쌍해요.”

“요즘 아이들은 온실 속에 꽃처럼 자라고 있어. 

그러니 에밀리를 보고 배워야 해.”

“열심히 읽을께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 가는 길인 모양인데 어이 가렴. 

내 잘 꿰매 놓을 테니.”

신기료 아저씨, 가방 수선 아저씨, 아니 열쇠 수리 아저씨, 

삼촌 말에 따르면 아저씨는 못 고치는 게 없다고 한다. 

아저씨는 삼촌 보다 세 쌀쯤 위인데, 삼촌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저는 데도 

늘 해맑은 미소로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보다도 

더 밝게 살아가는 아저씨이다. 

수영는 아저씨 가게에 가끔 들려 

책이며 음악 얘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신기료 아저씨와 알게 된 것은 

지난해 늦봄이었다.

교실 창밖으로 비가 질금질금 내렸다.

복도에 우산을 가지고 서성이는 학부형들이 꾀 많았다.

“오늘 낮에 비 온다고 그랬어. 우산 가져가라.”

아침에 한 엄마 말이 귀에 쟁쟁했다. 

수업이 모두 끝나자 우산을 갖고 온 

학부형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엄마가 나한테 올 리가 없지. 오빠한테 갔겠지.’

엄마가 오빠한테 갔을 거라는 생각에 머물자, 

수영이는 쓸쓸해졌다. 수영이는 우산을 받쳐든 아이들에게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수영이는 우산을 가져온 아이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교실에서 힘없이 나왔다.

“수영아, 우산 안 가져 왔니?”

인애였다. 인애 엄마가 인애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응.”

우산을 안 가져 왔다고 대답을 하는 순간 인애가 아주 커 보였다.


“수영아, 인애랑 같이 쓰고 가렴. 엄마가 집에 안 계신 모양이지?”

“예.”

수영이는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하고 

인애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깔깔대며 너스레를 떠는 가까운 인애지만, 

오늘은 웬지 인애 옆에 그것도 옷이 스치는 게 불편했다.

“네 엄마, 오빠한테 가신 모양이지?”

인애가 입을 삐죽이며 귀엣말로 했다.

“아마 그렇겠지 뭐.”

수영이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우린 시집가면 절대로 그러지 말자. 

엄마들은 그저 남자, 남자 한단 말야.”

“넌 좋겠다. 남자고 여자고 통틀어서 너 혼자니···”

수영이는 인애가 부러웠다.

“말마라. 엄마는 우리 할머니한테 아들도 못 낳고 딸 

하나 낳았다고, 눈치 꾀나 보신 모양이더라.”

수영이는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도 딸만 있는 집 맏이로 태어나 시집을 가면 

아들 딸 구별 않고 잘 기르겠다고 한 얘기를 

둘째 이모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그런데 결혼을 해 아들 딸을 낳고는 아들만을 위하다니··· 


매거진의 이전글 4. 나, 아빠 엄마 딸 맞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