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왕 랄프> 1편과 2편의 이야기
* <주먹왕 랄프> 1편과 2편에 대한 스포일러가 가득한 글입니다.
낭비가 없는 꽉 찬 내러티브의 1편
디즈니라면 사족을 못쓰는 와중에도 세 번 이상 본 작품들을 꼽자면 <몬스터주식회사/대학교>, <라푼젤>, <주토피아>, <월-E>, <인사이드 아웃>, <모아나> 그리고 <주먹왕 랄프>다. 저 옛날 OST가 아름다웠던 디즈니 르네상스 시기를 뺀다면 단연 이 작품들이야말로 디즈니/픽사의 새로운 명성을 단단히 다져줬다고 생각한다. 돈은 <겨울왕국>이 제일 많이 벌어다 줬겠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애정이 가는 작품이 <주먹왕 랄프>다. 열거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된 면이 있어 더 마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걸 차치하더라도 정말 꽉 찬 수작이다. 언젠가 <인사이드 아웃>에 대해 쓸 때도 했던 얘기지만, 디즈니/픽사가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수많은 매력 중에서도 '내러티브의 조밀한 구성'과 '디테일' 두 가지가 가장 큰 기둥이다. 시청각적인 아름다움은 거들 뿐. <랄프>는 이 두 가지 기준에 있어서 단연 압도적이다. 영화적으로 낭비가 전혀 없다.
영화는 고전게임에서 30년 째 건물을 부수는 악당역의 랄프와, 똑같이 다른 게임들에서 악당을 맡고 있는 캐릭터들의 심리 치유 모임으로 시작한다. 악당 캐릭터는 없으면 게임 세계가 유지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이지만, 필연적으로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에 괴로워하는 랄프와, 옆동네 레이싱 게임에서 '오류'로 분류돼 게임에 참여할 수 없는 바넬로피의 설정은 마지막까지 극을 이끌어가는 강력한 동원이 된다. 이 강력한 동원을 축으로 꾸준히 활용되는 '터보'의 복선, '사이버그'를 끌어들이는 신호등(홈키파...)과 무심한 척 등장했다가 최후에 극적으로 활용되는 멘토스 콜라 화산, 그리고 내내 바넬로피를 가장 위협하는 결점이었던 '글리치'가 종국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장점으로 승화하는 등 시나리오 작법상의 정수는 다 모아놓은 느낌이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사회적 역할과 소수자, 기능론적 세계관에 대한 고찰까지 던져준다.
사실 이런 유기적인 플롯의 구조는 그간 '디즈니' 쪽 스튜디오보다는 '디즈니-픽사' 쪽 작품들에서 더 익숙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디즈니'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여러 요소들을 떡밥처럼 던져놓고 이리저리 섞어서 묘기를 부리기 보다는 단선적인 주인공의 감정을 우직하게 따라가는 경향이 강한 편이었으니까. 심지어 캐릭터조차 디즈니에서는 굿즈가 잘 팔릴 미형의 주인공들이, 픽사 쪽에서는 훨씬 개성 강한 디자인이 주로 등장했다. 덕분에 '못생긴' 주인공이 포스터를 장식하며(바넬로피의 귀여움이 하드캐리하는 영화) 촘촘하게 엮인 플롯을 자랑하는 <랄프>는 '픽사의 색깔이 느껴진다'는 감상을 많이 들었다. 후일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또 다른 작품 <주토피아>에서는 다시 한 번 잘 짜여진 플롯을 자랑하면서도 사랑스런 캐릭터들까지 선보여 흥행에 성공했으니 <랄프>를 디즈니 스튜디오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봐도 좋지 않을까.
고전게임에 대한 애정과 디테일
이렇게 내러티브가 촘촘히 전개되는 동안 생명력을 불어넣는 디테일도 쉬지 않는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80~90년대 고전게임들에 대한 제작진의 애정이다. 팩맨, 쿠퍼, 소닉과 닥터 에그맨, 장기에프와 류, 춘리, 미스터 빈슨처럼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캐릭터들은 물론이거니와 큐버트, 태퍼, 디그더그, <모탈 컴뱃>의 케이노, <수왕기>의 네프처럼 저 세대 비디오게임 좀 즐겨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을 캐릭터들까지 빼곡하게 채워 놨다. 랄프가 '태퍼'의 술집 창고에서 꺼내는 온갖 잡동사니들도 하나하나 그냥 들어있는게 없다. 전부 고전 게임 속 상징적인 아이템들.
고전 게임에 대한 애정은 단순히 온갖 캐릭터들을 출연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동키콩>을 모티프로 했다는 랄프의 게임 <Fix-it Felix!>는 80년대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어떤 게임인지 한 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한 재현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 게임의 캐릭터들은 8비트 게임의 등장인물답게 움직일 때도 8비트 느낌으로 움직인다. 랄프가 뭉갠 케이크의 파편도 8비트 픽셀, 맨션의 가로수도 정육면체 8비트 픽셀이다. 랄프의 실수로 한 번 사망하는 펠릭스의 죽는 모션 역시 8비트 게임 느낌 그대로. 덧붙이자면 주점 화장실 복도에서 마주친 <히어로즈 듀티>의 병사가 술에 취한 채 벽으로 계속 걸어가자,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한채 옆으로 스르륵 밀리는 움직임도 초창기 3D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피식 웃을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오락실의 영업이 끝나면 캐릭터들이 모이는 센트럴 광장이 멀티탭이라는 설정 또한 귀엽기 그지 없고, <히어로즈 듀티>에서 '플레이어'가 묘사되는 방식이라든지, 마지막 스테이지를 클리어 했을 때 메달이 주어지는 장면과 이니셜을 기록하는 연출도 2000년대 초반 건슈팅 게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바넬로피와 함께 자동차를 만드는 <슈가러쉬> 속 미니 게임도 빼놓을 수 없다. 심지어 다음 차례를 예약하는 오락실의 '동전 놓기' 문화까지.
고전게임 전반에 대한 충실한 이해는 그대로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장치로 연결된다. 자기 게임이 아닌 다른 게임에서 사망하면 부활할 수 없다든지, 게임이 고장나서 플러그가 뽑히면 그대로 세상이 사라진다든지, 오류를 포함한 캐릭터는 소속 게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든지 하는 설정들은 '게임'이라는 장치를 설득력 있게 활용하면서도 고스란히 이야기의 긴장감을 높이는 요소가 된다.
그 밖의 디테일에 잔뜩 녹아든 미국문화
한국의 관객에게는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겠지만 미국의 관객들이나 영어권 화자의 눈에는 들어올 세세한 재미 요소들이 있다. 그중 그나마 한국 관객들에게도 익숙할 장면들도 있는데, 영화의 시작에 악당들이 둥그렇게 앉아 자신들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도 그 중 하나다. 미국에 일상화 되어 있는 심리치료 모임의 재현으로 헐리우드 영화에서 트라우마 치료 모임이나 알콜중독 치료 모임 등으로 자주 만날 수 있다. 대개 주인공이 '쓸데없고 구질구질한 모임'으로 생각하며 희화화 된다.
또 <슈가러쉬> 속 캐릭터들은 다양한 종류의 디저트로 묘사되는데, 그 중 킹캔디의 성을 지키는 오레오 병사들은 '오-레-오! 오레ㅡ오!'하는 구령을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웃음이 나지만 사실 이 병사들은 저 유명한 1939년판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패러디다. 사악한 서쪽 마녀의 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행진 구령소리를 그대로 가져왔다. 물론 <오즈>에서는 '오레오'라고 하진 않고, 영어인지 뭔지 모를 다른 소리를 외치고 있는데 '오레오'와 굉장히 비슷하게 들린다. 아마 이 고전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저 구령소리가 '오레오'처럼 들린다고 농담하다가 나오게 된 장면이 아닐까. 심지어 장면의 앵글과 병사들의 행진 모습까지 똑같다.
이런 <슈가러쉬>의 디저트 요소 활용은 여러곳에 깨알 같이 들어있는데, 시종일관 주인공들을 쫓아다니는 두 명의 경찰이 도넛인 것도 그렇다. 미국문화에서 도넛과 경찰은 거의 바나나와 원숭이, 당근과 토끼처럼 묶이는 짝인데, 요즘 같이 다양한 24시간 군것질 문화가 정착되기 전에는 야간까지 장시간 근무를 하는 경찰들의 주된 칼로리 보충 수단이 싸고 냄새도 나지 않는 도넛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해야하는 도넛 가게들 역시 경찰이 자주 찾아주는 것이 반가웠는데, 덕분에 치안 걱정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찰들을 상대로 프로모션도 자주 진행했다고. 지금이야 다양한 먹거리들이 많아져 경찰들도 더 이상 도넛만 찾진 않지만, 하나의 클리셰가 된 이 코드는 지금도 수많은 대중문화에서 계속해서 재생산 된다. 심지어 <랄프>에 등장하는 두 경찰의 이름은 윈첼과 던킨인데, 이는 미국의 가장 전통적인 두 도넛 브랜드의 이름이다.
레이싱 장면에서도 깨알 같은 장난들이 등장한다. 파이와 과자로 만든 카트를 타며 흡사 '마리오 카트'를 연상시키는<슈가러쉬>의 레이스는 각종 장애물과 함께 상대 레이서를 방해하는 다양한 아이템이 등장하는데, 아이스크림을 발사해 다른 레이서를 덮어 씌우자 전광판에서 'A LA MODE!'라는 글씨가 튀어 나온다. 파이나 케이크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어서 먹는 디저트의 이름이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케이크 트랙을 따라 심겨 있는 체리 꼭지에 불을 붙이자 체리가 폭발하며 뒤따라 오는 레이서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이때 중계석에서 'Cherry bomb!'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실제로 우리가 '폭탄'하면 흔히 떠올리는 둥근 폭약에 심지가 삐져나온 모양의 폭탄을 'Cherry Bomb'이라고 부른다. 미국 어린이들이 가지고 놀던 폭약 장난감의 이름이기도 했는데, 한국 아이들이 '콩알탄'을 가지고 놀았다면 미국 아이들은 'Cherry Bomb'을 가지고 놀았던 셈이다.
랄프와 바넬로피가 카트를 만들기 위해 자동차 공장에 몰래 들어가는 장면에서, 공장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 할아버지는 일본의 슈크림 체인점 '비어드파파'의 마스코트다. 일본이 본점이긴 하지만 미국에서도 꽤 인기가 많고 근래에는 한국에도 매장이 제법 생겼다. 아마 이 경우엔 홍보 차원에서 들어간 캐릭터가 아닐까 싶은데, 경비실에서 꿀잠 자느라 공장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모습은 딱히 상관 없는 모양이다.
사실 <랄프>는 주인공도 못생겼고 80년대 고전게임을 알아야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는데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도 자못 어른스럽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동이 주 타깃일 수밖에 없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서 너무 과감한 시도를 한게 아닐까 싶었는데, 또 미국의 아이들은 <슈가러쉬>에 등장하는 아기자기한 패러디를 보며 까르르 웃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랄프>가 어른들이 더 좋아하는 작품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2편, 팽팽한 탄력을 잃은 이야기
이 정도면 거의 '랄프예찬가'다. 정말이지 내게 <주먹왕 랄프> 1편은 흠잡을 곳 없이 속속들이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그에 반해 디즈니의 대접은 서럽기 그지 없는 수준이다. 디즈니의 온갖 인형과 피규어들을 사모으는 와중에도 랄프와 바넬로피는 좀처럼 살 수 있는게 변변찮다. 그나마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디즈니 인피니티>의 캐릭터를 구매하면 주는 스태츄가 괜찮은 편이었고, 정작 디즈니 스토어에서 파는 정식 굿즈들은 더 처참하게 생겼다. 유럽의 어느 장난감 매장에서 찾은 랄프가 그래도 만듦새가 나쁘지 않았는데, 이 쪽도 얼굴은 안타까운 수준. 주인공 4인방이라 할 수 있는 펠릭스와 칼훈은 그마저도 찾기 힘들다.
그런 와중에 후속편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내 마음이 어땠을까. 랄프와 바넬로피가 다시 살아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다니! 게다가 무대를 인터넷으로 옮긴다니 과연 후속편다운 스케일 확장이다. 곧이어 등장한 예고편에는 역대 디즈니 공주들이 모두 등장해 그간 디즈니가 받아온 '공주문화' 비판을 고스란히 자아성찰 유머로 승화시키는 장면이 담겼다. 전작 못지 않은 탁월한 센스에 3D로 재탄생한 공주들도 세련된 모습이라 기대감은 한층 더 커졌다. 미국에서는 11월 개봉이라는데 왜 한국은 1월 개봉이냐며 슬퍼하기도 했고.
그렇게 고대하며 만난 랄프와 바넬로피의 두번째 이야기는 퍽 실망스러웠다. 사실 그냥 한 편의 영화로서는 나쁘지 않다. 바넬로피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곳곳에 녹아든 깨알 같은 유머들 역시 그 역할을 곧잘 해낸다. 6년 새 더 나아진 그래픽은 두 캐릭터의 외모에 미묘한 생명력을 더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예고편에서 기대감을 한껏 올려준 디즈니 공주들의 짧지만 굵은 활약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였으며, 실제로 영화가 개봉한 뒤 쏟아지는 팬아트는 대부분 이 공주들의 모임이 주인공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영화의 양념 역할일 뿐인 이 '공주 시퀀스'가 2편의 가장 매력적인 장면이라는 얘기다. 주요 스토리인 랄프와 바넬로피의 이야기는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2편을 기대한 이유는 오로지 1편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빈틈 없는 플롯 구성과 함께 주 소재인 오락실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곳곳에서 느껴졌고, 그로부터 두 주인공 또한 매력을 더해 깊이 공감하며 따라갈 수 있었다. 1편에서는 하나의 갈등이 또 다른 갈등으로 이어지고, 앞서 깔려 있던 복선이 새롭게 개입하며 갈등의 층위를 더해간다. 메달을 얻고 싶은 랄프가 다른 게임을 침입하고, 덕분에 <다고쳐 펠릭스>는 사라질 위기에 처하며, 랄프가 얻은 메달은 다시 바넬로피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만난 랄프와 바넬로피가 연대감을 구축하는 동안, 바넬로피의 좌절을 원하는 킹캔디는 랄프에게 새로운 갈등을 제시하고, 이 갈등이 불거졌다 회복되는 동안 내내 깔려있던 복선들이 회수되며 총체적 갈등이 등장하는 것이다. 모든 요소가 서로 물리고 물려 지루할 틈 없는 플롯이 전개 된다.
하지만 2편의 이야기는 다소 느슨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슈가러쉬>의 핸들을 다시 찾기 위한 여정이 중심이고, 이를 위해 돈을 버는 과정들이 반복된다. 특별히 새롭게 엮이며 구성에 층위를 더하는 요소가 없다. 이 한 가지 목표 아래 랄프와 바넬로피의 엇갈리는 감정이 2편의 중요한 갈등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도 1편에 비해 공감을 끌어내는 힘이 약하다. 바넬로피에게 집착하는 랄프는 1편 보다도 훨씬 유아적이고 평면적인 캐릭터가 되었으며, 바넬로피는 너무 쉽게 <슈가러쉬>와 랄프를 버리고 <슬로터 레이스>에 마음을 빼앗긴다. 이러한 심리변화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꽤 공을 들인 게 보이지만, 그 덕분에 이야기는 속도감을 잃고 늘어졌으며 1편에서 보여준 감동적인 이야기와의 연속성도 빛이 바래 버렸다.
애정과 냉소의 온도차
사실 구성이 다소 느슨하다 한들 1편에서 보여준 재기발랄한 디테일이라면 구성의 간격을 충분히 메우고 밀도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1편이 198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는 비디오 게임 문화에 대한 헌사로 이 밀도를 채웠다면, 2편은 이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인터넷 문화에 대한 묘사가 그 역할을 맡는다.
문제는 이러한 묘사들이 1편의 그것보다 훨씬 평면적이라는 거다. 메트로폴리스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인터넷 도시, 그 속을 누비는 '마인크래프트' 스타일의 유저 아바타들은 인터넷 세상을 의인화하려는 이가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1차원적인 묘사다. 하이퍼링크를 이동하는 비행 자동차나 무엇을 묻든 대답해주는 포털 사이트 역시 그리 새롭지 않다. 물론 웃음을 자아내는 기발한 재현들도 분명 있다. 포털 사이트의 자동완성이나, 무서운 속도로 리트윗을 지저귀는 파랑새들, 팝업 차단 서비스를 묘사한 장면들은 보자마자 웃음이 나온다. 특히 <슬로터 레이스>를 플레이하는 유저 캐릭터들의 산만한 움직임에서 역시 '게임'에 있어서만큼은 녹슬지 않은 위트를 느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요소들이 1편처럼 이야기와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인 웃음거리에 머무른다는 점이다.
2편에서 묘사되는 인터넷 세상의 면면들을 볼수록 1편과의 차이가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는 의문이 깊어졌는데, 내게는 그 답이 '애정의 유무'라고 느껴졌다. 1편의 무대인 오락실에서는 제작진의 깊은 애정이 보인다. 자신들의 유년기를 가득 채운 고전 게임들에 대한 헌사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작년 개봉한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플레이어 원>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80~9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대중문화 창작자들에게는 8비트 시절에 대한 공통된 향수가 짙게 새겨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작품 곳곳에서 고전게임들이 유머 요소로 등장할 때 마다 진한 애정이 함께 느껴진다.
2편의 인터넷 세상에서는 그게 없다. 랄프와 바넬로피가 만난 인터넷 세상은 번잡하고 불친절하며, 믿을 수 없고 위험하다. '버즈튜브'의 유저들은 그저 고양이 영상이면 큰 고민 없이 하트를 남발하고, 아무 의미 없는 이상한 영상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가 또 몇 분 뒤면 잊혀진다. 댓글창은 읽으면 안 되는게 첫 번째 원칙이며, 이베이에서는 하등 쓸데없어 보이는 물건을 사려고 애면글면 돈을 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랄프가 "이런 게 인터넷이야?"라고 투덜거리자 "그래도 덕분에 <슈가러쉬>의 핸들도 살 수 있잖아."라는 바넬로피의 대답은 아무리 봐도 제작진의 마음 같다. 그다지 사랑스럽지는 않지만 이제는 없으면 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세상.
박사 모습을 하고 있는 포털 사이트, 실제 노출 알고리즘을 어떻게 재현할 지 그닥 고민한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알고리즘 캐릭터, 그저 기괴하고 징그럽기만 한 바이러스 캐릭터들 역시 1차원적 의인화다. 1편의 기발함과 재치를 보여준 제작진이 맞나 싶을 만큼 2편의 의인화는 단순한 이미지의 재현 이상의 무언가가 없다. 어쩌면 고전게임 문화와 인터넷 문화에 대한 이해 수준의 차이가 드러난 것은 아닐까. 고전게임의 세례를 흠뻑 받고 자란 제작진에게 오락실은 '우리 세대'의 문화지만, 어쩌면 인터넷 문화는 더 이상 그들의 세대가 아닐지도. 그래서 어느 정도는 '꼰대의 시선'으로 인터넷 세상을 묘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랄프와 바넬로피가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과,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랄프의 모습만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앞서의 이야기들이 지루하다고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 장면에 힘을 주는 디즈니의 연출력은 정말이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참 잔인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편도 아이들이 보기에는 좀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2편의 엔딩은 정말 아이들에게는 오래도록 슬픈 기억을 남길 것 같다.
...아니 엔딩보다 실은 후반부의 바이러스 랄프가 아이들에겐 더 큰일이다.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부터 디지털 바이러스의 의인화는 계속 저런 식으로 그려지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내 눈에도 징그러웠는데 애들한텐 이건 슬픈 기억이 아니라 트라우마 수준일 거다! 극장에서 보다가 분명히 울면서 나갈 거야! 개무섭다고!
아쉬움을 남기며 1편을 보고 감동해서 그렸던 랄프 그림을 남긴다. 내 랄프 돌려줘.
(다른 의미로 동심 파괴인 그림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