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꽂이와의 교집합은 무슨 의미일까
대학 다니는 동안 과외를 70명 정도 했는데, 거의 학생의 집으로 가서 한다. 집을 스윽 보면 대강 그 집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기다.
아, 학생의 성적과는 관계 없다. 하지만 성격이나 분위기 같은 건 분명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 중 대표적인 건 물론 집의 정돈 상태이고, 두번째로 눈에 들어오는 건 책장이다. 책장의 유무, 있다면 책의 양,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꽂혀있는 책까지. 서재가 전시의 기능을 한다는 건 오래된 얘기인 만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서울의 좁은 하숙방이나 원룸에서 지내는 십여년 간 제일 곤란한 게 책의 수납이어온 만큼 나도 책이 많은 편이다. 마음에 든 건 갖고있고 싶어하다보니 당연히 그 시간만큼 쌓인 관심사가 고스란히 눈에 보인다.
책을 사놓고 안 읽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원래 책은 '사놓은 것 중에 읽는 거'다. 설령 사놓고 아직 못 읽었더라도, 책장에 꽂혀있고 목차만 훑어봐도 내가 무엇에 관심을 가졌고 생각의 방향을 어떻게 전개해 나가야할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책은 읽으면 됐지 왜 자꾸 사냐, 비용도 공간도 낭비라며 한 소리 하거나, 나아가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여러 권 사는 것을 허영이라며 조롱하기도 왕왕하지만, 사실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각과 기억에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심지어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일수록 눈앞에 실물이 없으면 내가 뭘 읽었는지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나도 생각이 막힐 때면 책장을 찬찬히 눈으로 더듬으며 내가 '뭘 알고 있는지' 되짚어본다.
해서 나는 내 책장도 자주 보고, 남의 집에 갈 일이 있으면 그 집 책장 보는 재미도 좋아한다. 그렇게 남의 집 책장들을 보다보니, 내 방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남의 집에서도 만나면 반갑다. 게다가 나에게 좀 편하다고 느껴지는 사람 집에 가면 유독 꼭 꽂혀있는 책들이 있다. 이 집 가도 있고 저 집 가도 있고.
당대 베스트셀러라거나, 현대의 고전이 된 것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꼭 그게 꽂혀있으란 법은 없다. 그만큼 특정 이슈에 관심이 겹친단 얘기기도 할 거고 어쩌면 베스트셀러를 넘어 하나의 현상으로 크게 유행한 것도 있을 거다. 반면 굉장히 대중적이었던 베스트셀러가 없는 것도 비슷한 걸 말해주겠지.
책의 평가와는 별개로, 내 방 책장에 있는 것들 중에서 남의 집 책장에서도 세 번 이상 만난 책들의 리스트는 이렇다. 순서는 그냥 방에서 눈에 띈 대로고, 공동의 지인이 낸 책들은 제외했다.
당선, 합격, 계급/한국이 싫어서_장강명
당신이 옳다_정혜신
지식e 시리즈
쇼코의 미소_최은영
생각의 탄생_미셸/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서양미술사_에른스트 곰브리치
시나리오 어떻게 쓸것인가_로버트 맥기
정의란 무엇인가_마이클 샌델
총균쇠_제레드 다이아몬드
사피엔스_유발 하라리
이기적 유전자_리처드 도킨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_스티븐 핑커
나의 한국현대사/후불제 민주주의_유시민
말이 칼이 될때_홍성수
라틴어 수업_한동일
내려놓음_이용규
의자놀이_공지영
닥치고 정치_김어준
냉정한 이타주의자_윌리엄 맥어스킬
노동의 배신_바버라 애런라이크
넛지_리처드 탈러, 캐스 선스타인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_장 지글러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_토머스 프리드먼
그리스인 조르바_카잔차키스
굿모닝 예루살렘_기 들릴
미움받을 용기_고가 후미타케, 기시미 이치로
1984_조지 오웰
82년생 김지영_조남주
밤은 노래한다_김연수
살인자의 기억법_김영하
걷는듯 천천히/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_고레에다 히로카즈
개인주의자 선언_문유석
스틱!_댄/칩 히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_로렌 슬레이터
설득의 심리학_로버트 치알디니
타인의 고통_수전 손택
월든_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그들의 말하지 않는 23가지_장하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_김민섭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_안토니오 알타리바
기형도 전집_기형도
엄마를 부탁해/풍금이 있던 자리_신경숙
데미안_헤르만 헤세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_최규석
희망을 여행하라_임영신, 이혜영
반면, 내 방 책장에서 이 정도면 남의 집에도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나, 충분히 고전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집에서는 의외로 보이지 않았던 책들, 혹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 책장에서는 못볼 법 하지만 나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책들을 꼽자면 이렇다. 이 책들을 다른 곳에서 만나면 그렇게 반갑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_장일순
빈 서판/언어본능_스티븐 핑커
쓸만한 인간_박정민
가장 인간적인 인간_브라이언 크리스찬
왓치맨_앨런 무어
쥐_아트 슈피겔만
담요_크레이그 톰슨
모든 사람을 위한 빅뱅우주론 강의_이석영
여덟 마리 새끼 돼지_스티븐 제이 굴드
루시퍼 이펙트_필립 짐바르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_한나 아렌트
혁명을 팝니다_조지프 히스, 앤드류 포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_헤르만 헤세
관촌수필_이문구
해가 지는 곳으로_최진영
피프티 피플/보건교사 안은영_정세랑
내게 무해한 사람_최은영
밤이 선생이다/사소한 부탁_황현산
순전한 기독교/스크루테이프의 편지/네가지 사랑_C.S.루이스
예수전_김규항
박사가 사랑한 수식_오가와 요코
눈먼 자들의 도시_주제 사라마구
드래곤라자_이영도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_어빙 스톤
대화_리영희
디케의 눈_금태섭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_오찬호
어른이 되면_장혜영
음식의 언어_댄 주래프스키
차별받은 식탁_우에하라 요시히로
사유 속의 영화_이윤영 역
진중권의 서양미술사_진중권
헌법의 풍경_김두식
모아놓으니 재미있는게 보인다. 우리 집에 있고 다른 집에 없는 책들은 문학을 빼면 과학, 종교 분야들이 좀 더 많이 보인다. 그건 내가 요즘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지내지 못한단 얘기일 거다. 문학의 경우는 성 연령의 이유도 있을 것 같다.
반면 우리 집에서 본 걸 다른 집에서도 본 책들은 유독 정치, 노동, 사회 분야의 책들이 많다. 결국 정치적인 관심사가 겹친다는 말일 텐데, 이 말은 곧 나는 다른 영역은 관심사가 다르더라도 정치사회에 대한 결이 비슷한 사람이어야 편하게 만나고 집에도 찾아가는 사이가 된다는 말일 거다. 인문, 예술 같은 비교적 교양적인 분야보다 정치사회에 대한 생각이 비슷해야 서로 편하게 만나는 건 비단 나뿐은 아니겠지. 물론 좀더 깊이 파는 사람들은 장르문학이나 종교서적들의 교집합이 훨씬 클 수도 있겠다.
아, 근데 확실히 난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친한 모양이다. 업계 사람들도 얘기하면 모르는 경우가 많아 생각보다 대중적인 감독이 아니구나 깨닫는 요즘인데, 이상하게 두 권 밖에 안 나온 이 사람 에세이들은 되게 자주 눈에 띈다.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처럼 다른 사람들 책장엔 거의 다 있지만 내 방엔 없는 책들을 꼽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다. 일단 눈앞에 없으니까. 봐, 이게 중요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