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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Mar 24. 2019

스스로 우상이 되겠다 선언한 영화

영화 <우상>

사람을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PD의 입장에서 연예인을 그룹 짓는 방법 중 하나는 다양한 미디어에 편하게 등장하는 스타일인가, 아니면 자기 분야 외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편인가 하는 거다. 방송사에서 일하는 사람의 기준에서야 당연히 섭외했을 때 어지간하면 응해주는 전자가 고맙다. 이런 저런 미디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사람일수록 어떤 매력이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기도 쉽다. 같은 의미에서 대중에게도 더 친근한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후자는 영화만 하는 배우, 음악만 하는 뮤지션 같은 경우다. 배우로서, 뮤지션으로서 인기가 많을수록 나와주십사 하는 매체도 많을 텐데 잘 응하지 않는다. 방송 프로그램의 경우 어쩌다가 이런 인물이 섭외가 되면 꽤 큰 화제가 된다. 드물게 응하는 경우의 이유야 뭐 여러가지가 있을 거다. 취향에 딱 맞는 기획이 마침 들어왔을 수도 있고, 담당 PD나 작가와 유독 친분이 있는 경우도 있을 거다. 이런 예상할 수 없는 이유들이 따라주지 않는 이상 이런 연예인들은 보통 미디어에서 만나기 힘들고, 사람들은 이런 이들을 일컬어 '신비주의'라고 부른다. 당사자가 그걸 의도했건 안했건.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연예인은 '우상'이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 숭배의 대상. 10대에게 인기가 많은 연예인일수록 우상이란 수식어가 자주 붙었다.

지금은 같은 말을 영어로 번역해놓은 '아이돌'을 쓴다. 같은 단어의 한자와 영어 표기일 뿐인데 느낌은 전혀 다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매체 때문에 아이돌은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 그 매체수 이상으로 아이돌의 숫자는 더 많아졌다. 많은 만큼 아이돌은 예전 같은 우상이 될 수 없다. 나이도 더 어려졌다. 90년대 우상들은 10대들에게 당연한 '오빠', '언니'였지만, 지금의 아이돌은 '귀염뽀짝 우래기'가 된다. 잘 갖춰진 무대 위 모습은 물론 사소하고 구질구질한 일상들까지 대중에게 공개한다. 관찰예능은 어느 때 보다 인기다. 직접 자기들 일상을 찍어 자기 채널에 공개하기도 한다. 우상들을 수식하던 신비주의란 말은 지금의 아이돌과 만날 일이 별로 없다. 친근하고 친절한 존재. 우상이 아이돌이 되면서 얻은 것이다.

우상이 되려면 친근하면 안 된다. '그도 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면 안 된다. 똥도 안 쌀 거 같아야 한다. 신비주의의 힘은 거기서 나온다.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 말고는 아무것도 알려주면 안 된다. 그가 알려주는 게 많을수록, 그에 대한 정보가 많아질수록 그는 신비하지 않다. 실제로 그도 사람이니까. 당연히 많이 알수록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 인식할 수밖에 없겠지.

연예인 우상 뿐 아니라 실제로 우상과 전설은 그렇게 만들어 진다. 아는 게 별로 없을 때, 단편적인 이야기들만 전해들었을 때. 업적은 있는데 그게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단서가 없을 때 사람들은 상상으로 살을 붙여 더욱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솔방울로 폭탄을 만들어 적을 물리치고 축지법도 쓰시는 수령님'이야기를 중앙에서 굳이 만들어내지 않아도, 수령님이 혈혈무의로 적을 물리쳤다고만 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위대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거다. 

그런 맥락에서 <우상>은 영화의 의지를 보여주는 제목이다. 영화는 한없이 불친절하다. 등장인물들이 여기저기서 얽히고설켜 복잡한 일이 벌어진 것 같긴 한데, 그래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안 알려준다. 문득문득 지나가는 인물들의 대사 속에 조각조각 단서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문제는 도무지 이 말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거다. 조선족 사투리를 쓰는 인물도 있고 뭐 다른 사투리들도 등장하고 그래서 알아듣기 어렵다고 하기엔 거의 모든 인물의 오디오가 불분명하다. 한석규나 설경구 둘 다 그간 다른 영화에서는 대사 전달력의 문제를 지적받은 적은 없는 배우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운 순간이 많다. 둘 뿐이 아니다. 종종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주변인물들의 대사들도 하나 같이 뭉개져 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서사의 퍼즐을 맞춰야 하는 영화에서, 그 퍼즐 조각을 주는 대사들이 죄다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영화가 진행될수록 답답해서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144분, 길기도 정말 긴데.

자, 그래서 이 영화의 감상은 오디오 감독의 주리를 틀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끝내면 되는 걸까. 감독은 오디오 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개봉 때까지 확인도 안 한 걸까. 그렇다기엔 영화는 스스로도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여러차례 확인 시켜준다. 짧은 프롤로그가 끝나고 제일 처음 나오는 장면은 공항에 도착한 구명회가 유리창 너머로 다른 정치인들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들은 방음이 훌륭한 유리 덕분에 서로의 목소리를 전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대화를 시도한다. 물론 전혀 안 통한다. 똑같은 장면은 구치소에 갇힌 련화가 유리 너머로 중식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완전히 똑같은 방식의 단절이라 감독의 의지 없이 이루어진 반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장면을 다른 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에서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유리벽 때문에 막혀서 뭐라고 하는 지 알 수 없는 입장에 관객까지 포함 시킨다는 거다. 보통 이런 '유리문 단절'은 둘 중 하나로 활용 된다. 실제 말의 내용과는 전혀 엉뚱하게 다른 말로 이해해버리는 코미디 연출이거나 너무나도 애절한 고백이 전달되지 않아 마음이 무너지는 드라마의 연출이거나. 그런데 이 두 연출 모두 유리문 너머에 있는 상대역은 못 알아듣더라도, 적어도 관객은 내용을 알아야 성립한다. 그래야 원래 의미가 어떻게 와전되는지를 보며 웃든지, 아니면 저렇게 애절한 고백이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 가슴 아파하든지 한다. 근데 <우상>의 장면들은 그냥 단절이다. 뭐라고 하는지 관객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유리벽이 만든 상황을 초월적인 입장에서 지켜보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이 답답해하면 되는 장면인 거다.

다른 상황, 비슷한 모티프는 또 있다. 중식이 련화의 언니를 찾아간 장면이다. 언니는 시골 농장에서 가축들을 키우며 산다. 언니는 련화의 이야기를 물으러 온 중식이 달갑지 않고, 그래서 중식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닭을 잡는다. 안 그래도 조선족 사투리가 섞인 억양이 분명치 않은데, 대답을 할 때마다 닭의 목을 내려치고 털을 뽑는 기계의 소음이 소란스럽다. 중식은 간절한 언니의 말이 도무지 들리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고, 관객들의 인상도 덩달아 일그러진다.

이쯤 되면 이 모든 대사전달의 문제를 오디오 감독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어려워진다. 감독은 사건들, 인물의 동기들 하나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서 그들의 대사까지 전달되지 않길 바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심지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가장 상징적으로 담은 것 같은 마지막 장면에서는, 화상으로 발음기관이 모조리 망가진 명회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열정적인 연설을 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 가장 대사가 또렷하고 분명하게 전달되는 장면은 중식이 명회의 선거운동에 참여하겠다고 좌중 앞에서 선언하는 장면이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진실과 거리가 먼 말 만이 깨끗하게 들려온다.

실은 도지사에 출마하는 도의원 명회의 성이 구 씨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도의원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극중에서 자꾸 '구의원, 구의원' 불리니 '도의원이 아니라 구의원이었나, 구의원 정도가 저렇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가'하는 생각까지 잠시 했다. 꼼꼼한 감독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헷갈리는 호칭은 활용하지 않았을 텐데. 이 모든 게 다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장치로 느껴진다.

관객과 함께 있어주지 않는 불친절한 영화. 영화가 끝나자 이 모호함을 견디지 못한 관객들은 저마다의 해석을 내어놓는다. 감독이 제대로 들려주지 않은 대사들을 서로 조각을 맞춰 복기한다. 중요한 것처럼 화면에 잡혔지만 딱히 해결해주지 않은 여러 컷들을 이어 붙인다. 각자 추측한 전체 사건을 내어놓으며 교집합을 찾아내고 거기에 의미까지 부여한다. 현대판 라쇼몽이 따로 없다. 사람들의 말과 생각이 더해질수록 영화는 실제 스크린에 영사되었던 것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 간다. 


영화는 스스로 우상이 됐다. 불친절함으로써, 많이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 보게 만들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소리만 외쳐도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 구명회가 그렇게 우상이 된 것처럼. 


세 장의 포스터에 쓰인 카피는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한 말이 아니라, 영화 스스로를 향한 말일 지도 모르겠다.

"믿음은 귀를 막는다" "바램은 눈을 가린다" "거짓은 입으로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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