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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Jul 02. 2019

용감한 애, 똑똑한 애, 힘센 애, 여자.

<토이스토리4> 멋진 보핍의 음과 양

/ 이제는 말하기도 새삼스러운 디즈니의 방향 전환

어느 시대나 관통하는 가치관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 시대에 사는 사람 모두가 동의하는 일은 언제고 없을지언정,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시대정신이라고 부른다. 어떤 가치관이 문학, 언론, 그밖의 여러 예술에서 등장하는 단계를 지나 상업자본에서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면 충분히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원하는 가치라 불러도 무리는 아닐 거다.

그런 면에서 몇 년 전부터 디즈니가 보여주는 여성상의 선명한 선회는 언급하기조차 새삼스럽다. 꾸준히 대중화 된 여성주의가 일구어낸 성과임과 동시에, '수동적 여성상'과 '보수적 가족주의' 미디어의 상징이 되어버린 디즈니의 원죄 청산작업이기도 하다.

디즈니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다. 그저 오랜 세월 사랑 받은 고전 텍스트를 그대로 재생산했을 뿐이고, 그 고전들은 세월만큼이나 '지나치게 전통적인' 여성상을 담고 있었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런 가치를 담아내던 디즈니는 제국을 이룰 정도로 거대해졌고, 그 성장의 양분은 전부 거대한 대중이 주어온 것이다. 앞에서 했던 얘기를 다시 써먹자면, 상업자본을 이토록 키워준 가치관은 그 시점의 대중이 공감하며 원했던 것이었을 뿐이다. 좋아하는 거 해줬더니 이제 와서 손가락질, 억울할 수도 있지.


어쨌든 꽤 오랫동안, 그리고 점점 커져 온 그 손가락질은 디즈니를 바꾸는데 성공했다. 고전 텍스트를 취하더라도 좀더 능동적인 캐릭터로 바꾸거나(라푼젤), 새로운 텍스트를 발굴해 아예 모험심 강한 여성 주인공을 내놓거나(모아나, 주토피아), 손가락질 받은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희화화하는 단계를 지나(겨울왕국, 주먹왕랄프), "자! 이것이 새 시대의 여성상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단계에 이른다.

마지막 단계의 대표적인 캐릭터가 <캡틴 마블>이지만, 이 쪽은 애초에 원작부터 '강력한 여성 히어로'인데다 마블 원작 시리즈에서도 중요 인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 눈에 띄는 것은 영화판 <알라딘>의 '자스민'과 <토이스토리4>의 '보핍'이다. 자신들이 과거에 직접 만들었던, 한없이 보조적이었던 여성인물들의 드라마틱한 위치 조정.

사람들은 콘텐츠를 유희를 위해 소비한다. 거기서까지 설교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유희를 위해 선택한 콘텐츠에서 노골적인 가치관 제시를 만난다면 어느 정도의 거부 반응은 자연히 따라 나온다. 다분히 선언적이었던 <캡틴마블>이나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여성히어로 총집합!' 장면을 보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게 어떤 콘텐츠가 됐든 모든 종류의 가치로부터 결백한 콘텐츠는 존재할 수 없다. 애초에 이야기, 서사라는 것 자체가 사람들 머릿속의 가치관으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디즈니는 그 시절 팽배했던 가족주의, 전통적 로맨스라는 가치관을 열심히 주워담았을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가치라서 그게 가치관의 제시라는 걸 느낄 새조차 없었던 것 뿐이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꼭 나오는 장면 중에는, '무사히 지구를 구하고 돌아오는 영웅들 뒤로 펄럭이는 성조기'가 있었다. 한국 관객들 중에는 거기서 묘한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고, 당연히 미국 본토보다는 더 많았을 거다. '우리나라 짱' 국수주의는 본토에서는 좀 더 당연하지만, 국경을 건너면 가치관의 제시가 된다.

휴머니즘 드라마들은 어떤가. 장애와 역경을 극복하는 감동 스토리도 가치관의 제시다. 바닥에서 시작해 기적적인 노력으로 자수성가하는 성공 스토리도 가치관의 제시다. 대부분이 그 가치관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감동 스토리처럼 느껴지지만, 그렇게까지 죽을똥살똥 안 하고 적당히 살고픈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한국처럼 고도성장기가 끝난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이 더 늘어만 간다. 옛날의 감동적인 성공 스토리는 더 이상 감동스럽지 않을지도 모른다.

<위플래시> 같은 영화가 재미있는 사례다. 성취를 강요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교사에게 시달리다가 점점 스스로를 파괴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미국 본토에서 섬뜩하고 서늘한 드라마로 많은 논란을 낳았지만, 노력의 나라 한국에 오자 '난 왜 저렇게 (스스로를 파괴할 정도로) 열심히 살지 못했는가' 반성을 낳는 영화가 되었다. 아, 그럼 아까 잘못 말했다. 죽도록 노력하는 성공스토리는 앞으로도 당분간 감동적일 예정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도 그거 좋아한다.

그래도 이 정도까진 보편적인 이야기에 속하고, 사회/정치가 얽히면 좀 더 예민해진다. 자기 색깔이랑 비슷한 작품은 더 편하고, 아닌 작품은 싫겠지. 그럼 사회/정치 얘기를 하지마? 사람 사는 세상 얘기를 하는데 그걸 빼고 어떻게 얘길 하나. 그럼 가치중립적으로 만들어? 감독도 작가도 사람인데 그게 되나. 그 사람들도 자기 색깔이 있는데. 심지어 작품을 만들 정도면 어지간한 사람보다 더 짙은 색깔일 거고. 사실 이야기란 가치관이 얽혀야 감동이 있는 법이기도 하다. 그게 싫으면 BBC 다큐를 보는게 낫다. 심지어 거기도 관점 있다.

아예 가치로부터 결백한 콘텐츠가 있을까? 정말 강박적일 정도로 유희만을 추구한 콘텐츠 같은 거? <잭애스> 같은 영화를 그렇게 분류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정도 강박이면 이미 그건 또 다른 가치관이다. 그것도 꽤 강력한.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을 빌려 비슷한 가치관들이 숱하게 나왔다. 많은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이 좀 억울한 케이스였고.


쓸데없는 말이 길었는데, 그러니까 다소 노골적인 여성주의가 드러난 콘텐츠라고 유난 떨 거 없다는 거다. 그 역시 콘텐츠가 보여주는 수많은 가치관의 하나일 뿐이다. 그동안 여성 서사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고, 뒤늦게 그걸 보정하려다보면 가끔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장면들이 나올 수도 있다. 자기 정치색이랑 다른 영화를 보면 불편한 거처럼, 자기가 여자가 아니면 그런 장면이 불편할 수도 있지. 그런 거다. 뭐 어쩌겠나. 디즈니가 이럴 정도면 그게 대세라는 건데. 디즈니는 돈 안 되는 건 안 한다. 그게 돈이 된다는 거고, 많이 팔린단 얘기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가치라는 거다. 거슬려도 좀 참자. 참기 힘들 만큼 거슬리면 다른 거 봐야지 뭐. 여전히 그런 거 안 나오는 콘텐츠가 더 많으니 볼 게 부족하진 않을 거다.


/ 마침내 이루어진 가치의 천의무봉, <토이스토리4>

그렇긴 하지만 물론, 가치관을 담은 장면도 천의무봉처럼 물 흐르듯 서사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재미까지 있으면 그거야말로 금상첨화다. 다분히 선언적이어서 주목을 받았던 <캡틴마블>의 경우, 히어로 영화로서의 매력은 그 선명한 선언에 못 미쳤다. 더구나 늘 마블보다 뒤쳐지는 걸로 평가 받는 디시 히어로의 최대 단점, '수퍼맨'을 연상케 만드는 심심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디시 영화는 수퍼맨이 나오는 순간 재미가 없어진다. 아슬아슬 위기에 처한 주인공에게 몰입할 수 있어야 영화에 긴장감이 생기는데, 수퍼맨은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아서 쫄깃한 맛이 없다. 그런 히어로가 메인이라는 건 디시에게 슬픈 일이다. 그런 절대자가 없어 매편 긴장감이 넘치던 마블 히어로 영화에, 캡틴마블이란 수퍼맨은 몹시 조심스러울 일이다. <엔드게임>에서도 이미 캡틴마블은 개연성을 마비시키는 데우스엑스마키나 역할을 충분히 했다.


똑같이 선언적인 캐릭터이지만 영화판 <알라딘>의 '진 주인공' 자스민은 캡틴마블에 비하면 훨씬 더 매력 있는 인물이다. 원작 애니메이션과 모든 요소가 다 똑같은 가운데 오로지 자스민만 능동적으로 바뀌면서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되었다. 이 영화의 진짜 제목은 <자스민>이다.

다만 '원작 애니메이션과 모든 요소가 다 똑같은 가운데 오로지 자스민만' 바뀌면서 역시나 조금 튄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있다. 자스민의 능동성, 문제해결능력, 캐릭터, 이 모든 걸 보여주는 건 오로지 'Speechless' 한 곡이다. 초반부의 고민을 보여주는 것도, 클라이막스의 문제해결도 이 한 곡이 다 해버린다. 다른 넘버들은 전부 기존 애니메이션의 곡들인데, 유일하게 새로 추가된 이 한 곡만 21세기 감성이 듬뿍 담겨있어 갑자기 장르가 달라지는 느낌까지 든다. 아라비안 나이트 뮤지컬 배우들 사이로 홀연히 나타난 브리트니 스피어스 무대 같은 느낌. 노래도 이질적인데다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이 노래 한 곡을 멋있게 보여주는 걸로 해결해버리니 이 연출에 대한 불만스런 목소리들도 보인다.

근데 사실, 그게 뮤지컬이다. 그 어떤 갈등이든 힘 있는 노래 한 방이면 해결되는 장르. 사실상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사이여도 마법 양탄자 같이 타고 'A whole new world' 한 번 같이 부르면 서로 목숨 걸 만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니, 지니의 마법에 걸린 상태에서 'Speechless' 한 방에 정신차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게 뮤지컬의 문법이다.


앞서의 두 캐릭터에 비하면 <토이스토리4>의 보핍은 모든 면에서 자연스럽다. 전작에서도 성격은 꽤 능동적이었을지언정 비주얼은 "전통적 여성미의 정수" 같았던 캐릭터가, 치마를 벗어 두른 채 도발적인 눈빛을 하고 있는 포스터만 봐도 이 캐릭터의 짙은 선언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가 어째서 그런 캐릭터가 되었는지 충분히 설득이 되고, 그렇게 능동적인 캐릭터가 되어 극을 이끌어가는 과정도 자연스럽고 매력적이다. 보핍에 이르러 마침내, 디즈니가 제시하는 여성상은 작품 안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오직 주인 하나 밖에 모르는 우디가 경주마처럼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는 눈을 가린 채 온갖 경솔한 말과 행동을 늘어놓는 동안, 보핍은 냉철한 판단과 상식적인 시선으로 척척 상황을 헤쳐나간다. 보핍의 맞수인 개비개비 역시 여성 캐릭터인데, 골동품점을 지배하는 장악력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침착함으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힘을 가졌으니, <토이스토리4>는 가히 여인천하라 할 수 있겠다.


맹목적인 우디, 멍청한 버즈, 더 멍청한 포키, 멍청함이 두 배인 더키&버니, 다루기 쉬운 모지리 듀크 카붐 같은 남성 캐릭터들(성우기준)과는 참으로 대비되는 이지적이고 상식적인 판단력의 보핍, 개비개비, 기글 맥딤플즈의 여성 캐릭터들... 응? 근데 이 캐릭터 구성 뭔가 익숙하지 않나?

/ 용감한 애, 똑똑한 애, 힘센 애, "여자애"

전대물, 애니메이션, 케이퍼무비, 히어로물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팀을 이뤄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종류의 서사에서는 이 인물들의 매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다소 과장되었다고 느껴질 만큼 강한 개성은 물론이거니와, 캐릭터가 겹치면 안 된다. 히어로물이라면 각 인물의 초능력이 개성 있어야 하고, 케이퍼무비라면 초능력은 아니지만 사실상 초능력에 가까운 인물들의 장기가 제일 중요하다. 리더십이라든지, 해킹이라든지, 손기술이라든지, 화술이라든지 왜 알잖아 그런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기술들.

소프트웨어만 다양하면 안 된다. 하드웨어도 한 눈에 달라야 한다. 일단 주인공은 대개 좀 터프하게 생긴 미남에 의리 있어야하고, 능력은 좋은데 언제 배신 때릴 지 모르는 눈치 빠른 애는 좀 매끈하게 생겨야 되고, 좀 무식하고 힘세고 거친 느낌 하나, 경험 많고 연륜 있는 고연령층 하나, '유머 담당' 흑인, 혹은 '말수 적은' 아시아인, 그리고 여자.


그래 여자. 여자는 여자가 캐릭터다. 그말인즉 앞에 줄줄 늘어놓은 저 다양한 캐릭터는 전부 남자라는 기본값 아래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 구조에서 여자는 남자와 같지 않다. 여자는 남자를 기본값으로 두고 이루어지는 여러가지 변주의 하나다. 제 2의 성.

여기서 여자의 캐릭터란, 때론 미인계도 쓸 수 있을만큼 충분히 예뻐야하고, '여성의 덕목'인 상식적인 판단력으로 무식한 남자놈들이 가끔 도를 넘을 때 진정시킬 수 있어야하며, 주인공놈이 실의에 빠져있을 때 또 다른 '여성의 덕목'인 공감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토닥토닥을 제공한 후 클라이막스를 향해 일어설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저 개성 넘치는 남자들 속 '여자'가 개성인 이 캐릭터는 대부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남자들 속에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터프하고 털털한 스타일인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공감능력을 버리진 않았다. 상냥하지 않고 시크하게 던지더라도, 어쨌든 위로를 하긴 해준다. 그리고 그보다 더 필수적으로 항상 갖추고 있는 지점은 '유일한 상식인'이라는 거다.

개성 넘치는 남자 캐릭터 속 '유일한 상식인 여자'의 전통은 오래 됐다. 먼 옛날 공부 대용으로 읽었던 학습만화에서도 그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어린이 학습만화는 장르적으로 아주 확고한 캐릭터 구성을 고수하고 있는데, 남아1, 여아1, 전문가(박사), 비인간1의 형태다. 남아1과 여아1이 해당 학습분야의 전문가인 박사님에게 여러가지 설명을 듣는 내용이 반복되고, 비인간1은 귀여운 강아지로 마스코트 노릇을 하거나, 귀여운 강아지인데 로봇이기까지 하면 주인공들을 순간이동 시켜주거나 자료를 출력해주는 등의 역할까지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박사 캐릭터와 비인간 캐릭터가 병합되는 현상도 보인다. 귀여운 요정이나 외계인이 나타나 마스코트 역할도 하면서 박사 역할까지 하고 순간이동도 시켜주는 식이다. 얘네는 귀엽고 똑똑한데다 초능력까지 있다.


박사와 비인간은 학습만화의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어느 정도 역할이 정해져 있다. 여기에 남아1, 여아1은 작중에서 학습을 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결국 학습만화를 읽는 어린이 독자의 관점을 대변하는 존재가 된다. 이 둘의 캐릭터도 거의 예외 없이 고정되어 있는데, 남아1은 '아는 건 없고 의욕은 넘쳐서 자꾸 사고만 치고 쓸데 없는 질문을 던져 박사에게 설명을 하게 만드는 꾸러기'를 맡고, 여아1은 그런 남아1이 박사에게 쳐맞을 때 옆에서 꺄르르 웃거나, 남아1이 헛소리를 할 때 아이쿠, 하고 골치아파 하거나, 박사의 설명을 기똥차게 알아듣고 적절한 보충질문을 하는, 그러니까 '리액션 담당'이다.


이 '꾸러기 남아'와 '상식적이고 어른스러운 여아'의 구조는 학습만화를 벗어나도 여러 아동만화에서 끝없이 재생산 된다. <도라에몽>, <짱구는 못말려>처럼 미성년자 집단이 나오는 대부분의 만화를 떠올려 보자. 아마 거기도 다수의 남자아이와 한두명의 여자아이가 나올 것이고, 남자아이들이 좌충우돌 사고를 치는 동안 여자아이들은 거기에 화를 내거나 그걸 진정시키며 상식적인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화가 그렇듯, 그런 상식적인 행동으로는 보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건 꾸러기 남자아이들이다. 아동만화 뿐이랴, <원피스>며 <나루토> 초반부도 그렇고, 남자애들이 주로 보는 만화 말고 여자애들이 보는 만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으며, 심지어 <어벤저스>도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꼰대, 망나니 백만장자, 천둥 무식한 놈이랑 녹색 무식한 놈 사이에서 정신차리고 있는 건 블랙위도우 뿐이다. 응? 활 쏘는 애? 어벤저스에 그런 애도 있었어?


현실의 반영이라고는 하지 말자. 실제로 여자는 어릴 때부터도 그렇게 어른스럽더라, 남자는 커도 애야 애 같은 소리를 듣자고 쓴 글은 아니다. 통계적으로 성별에 따른 성격과 행동양식의 차가 없는 건 아니지만, 성별과 무관한 개인들의 차이와 비교하면 성차는 무의미한 수준이다. 신체의 차이는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밖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오른쪽 그래프와 같은 수준이다. 평균값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지 몰라도 개인 각각의 문제가 되면 그 평균의 차이는 의미가 없어진다. 개인은 개인일 뿐이다. 성별은 그 개인을 잘 모를 때의 참고사항 정도다. 개인을 잘 알게 되었는데 그 개인이 기존의 성관념과 다르다면 성관념을 폐기하면 될 일이다. 개인이 특이하다고 생각할 일이 아니라.

하지만 체감적으로, 아동만화만큼이나 주변에서 또라이 같은 남자애 많이 보고 상식적인 여자애들 많이 봤는데, 그 반대는 못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선천적인 차이라기 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의 차이다. 여자아이들에게는 침착하길 요구하고 남자아이들에게는 활발하길 요구한다. 그러니 장난기가 많은 여자아이는 자주 혼나고 내성적인 남자아이는 자주 난처해진다. '남자는 커도 애야'는 성인이 되어서도 생활의 세부적인 것들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로 작용한다. 여자도 장난기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여성은 성인이 되면 살림을 신경써야하는 생활인의 자리를 맡았다. 상대적으로 애가 되기 힘든 입장이 된다.


직장생활과 살림을 둘 다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는 살림의 스트레스와는 성격이 다르다.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는 직장 밖이 해방의 공간이다. 거기엔 술 한잔도 있고 취미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살림은 생활 전반을 지배한다. 술 한잔을 하는 것도 취미를 가지는 것도 살림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어느 쪽을 더 힘들게 느끼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애가 될 자유'는 살림을 하는 사람에게 덜 허락된다. 그랬던 '퇴행의 유예'는 중장년을 지나 노년에 가까워서야 다른 문장이 되어 나타난다. '엄마도 여자였어, 할머니 소녀 같으세요.'


그런 사회적 요구와 고정관념은 보편화 되어 아동이 등장하는 만화 등에도 비슷한 구조를 재현하고, 이 만화는 그걸 보는 아이들에게 또다시 사회적 요구가 된다. 적지 않은 아동은 그 영향을 받고 그 요구를 수용한다. 그러니 현실에서도 그런 사례가 더 많아진다. 이쯤되면 그 전형적인 만화 캐릭터 구성도 현실의 반영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이 미디어에 영향을 끼치고, 미디어가 다시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되먹임 구조가 반복 된다.

그래도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요즘에는 아동 만화에서도 그런 구성이 훨씬 덜 보이는 편이다. 주변에서 침착한 남자, 마음껏 똘끼를 부리는 여자도 좀 더 볼 수 있고.

여자는 주로 멀쩡하게 나오고, 멍청한 역할은 남자들이 도맡아 하는 이 구조는 양쪽에서 동시에 못마땅해 할 수 있다. 남자 입장에서 기분이 나쁘려면 왜 항상 남자만 저렇게 멍청하게 나오느냐가 불만일 거고, 여자 입장에서는 개성없이 천편일률적인 여성 캐릭터가 못마땅할 수도 있다.


<인사이드 아웃>의 캐릭터 디자인을 볼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여성 셋, 남성 둘로 이루어진 감정 캐릭터들의 디자인은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여성 캐릭터 셋은 머릿결부터 눈매, 입술 색깔까지 굉장히 세심하고 예쁘게 디자인이 되어있지만 남자 캐릭터 둘은 사실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성의 없는 모양새다. 언뜻 생각하기엔 참 너무하네, 남자는 대충 그려주네 싶긴한데, 실은 저런 감정 캐릭터들조차 '여성'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머리카락도 안 그려주고, 눈코입만 대충 달려 있으면 사람들은 기본값을 남성으로 판단한다. 여성으로 판단하기 위해선 적어도 긴 머리, 그리고 속눈썹과 예쁜 입술색까지는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도 남성은 기본값, 여성은 예외값이라는 구조가 작동한다.


또 디즈니에게 손가락질하진 말자. 디즈니는 기업이고 캐릭터 상품도 팔아야한다. 저런 반짝반짝한 '여성적 장식요소'를 추가하지 않아도 여자 성우를 쓰면 여성캐릭터로 인식하는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겠지만, 저렇게 반짝반짝 예뻐야 상품이 좀 더 잘팔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디즈니 작품인 <주먹왕 랄프>가 '주인공이 못생겨서' 인기가 없었다는 것만큼 슬픈 사실이다.


미디어 산업은 영향력이 크지만, 기본적으로는 산업이다. 운동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대중의 인식을 주도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그보다는 대중의 욕망을 따라가야 하는 경향이 더 크다. 그 사이에서 적절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것이 미디어 산업의 숙명이다. 너무 대중의 욕망에만 몸을 담그면 사회적 선을 헤치며 지식인들에게 욕을 먹을 거고, 또 너무 정치적 올바름의 첨단만 걷다 보면 아직은 그 가치관이 충분히 보편적이지 않은 시장으로부터 외면 받을 수도 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더라도 조금씩조금씩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 그렇게 멋진 여성 술탄 자스민은 동시에 눈부신 미모도 갖추고 있는 것이다.

/ 멋진, 너무 멋진, 멋진 게 캐릭터인 보핍 언니

외양 뿐이랴. 앞서 얘기한 캐릭터의 개성도 실은 비슷한 맥락일 가능성이 높다. 보조적이고 수동적인 역할에 머무르던 여성캐릭터들이 점점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상식인'이라는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도 결국 시장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인사이드 아웃>이 개봉했을 때 관객들의 반응에서 흥미로웠던 것 중 하나는, 극을 이끌고 가는 '조이'와 '새드니스'에 대해서 "짜증난다"는 반응이 많았다는 거였다. 시종일관 우울하고 무기력해서 계속 민폐만 끼치는 새드니스도 짜증나고, 남들한테 공감 못하고 자기만 신나있는 조이도 짜증난다는 거였다. '조이가 더 짜증난다'는 파와 '새드니스가 더 짜증난다'는 파로 갈렸다. 오죽하면 조이는 '조이코패스'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옆에서 계속 성질만 부리는 '앵거'나, 무기력하기로는 새드니스를 뛰어넘는 '피어'가 짜증난다는 사람을 보긴 힘들었다. 물론 극을 이끌어가는 조이와 새드니스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은 분량이니 짜증날 가능성도 적었겠지만, 많은 경우 대중은 남성 캐릭터보다 여성 캐릭터에 더 엄격하다.


이건 예능프로그램에 유독 여성출연자의 숫자가 적고, 역할이 한정적인 것과도 비슷하다. 이 사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예능 제작현장이 남성 위주이고 남성 출연자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할 때가 많지만, 실제로 예능 제작현장에는 여자가 훨씬 더 많다. 여성 예능PD의 숫자도 지속적으로 증가해 이제 남성과 비슷한 수준이고, 무엇보다 함께 섭외를 고민하는 작가의 경우 99%가 여성이다. 그러니 각 프로그램의 회의실은 대부분 여자로 가득한 가운데 어쩌다 남자 PD가 한두명 있는 그림이 보통이다. 그마저도 여자PD가 있는 팀이면 회의실에 아예 남자를 찾아볼 수가 없다.

섭외할 때 딱히 남자를 더 선호할 이유는 없다. 방송판은 여느 업계 이상으로 '핫하면 쫓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상품성이 있다면 성별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문제는 남자 연예인이 섭외가 훨씬 쉽다는 거다. 애초에 예능판이 남성 출연자들 위주로 굳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같은 포지션을 맡더라도 여자 출연자는 더 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예능은 웃기는 장르고, 웃음의 고전에는 '모자라 보이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 보다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볼 때 더 관대해진다. 그래서 예능에는 멍청하고, 모자란 캐릭터들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똑같이 멍청하게 나온 남자 연예인들을 보면서는 웃다가도, 멍청하게 나온 여자 연예인들은 쓴소리를 잔뜩 들어야했던 사례를 우리는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러니 여성 연예인 입장에서도 예능 출연은 조심스럽다. 기존의 익숙한 포지션, 그래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할 지 예측가능한 자리에는 나갈 수 있지만 좀 더 새롭고 예측하기 어려운 자리는 부담스럽다. <두니아>를 제작할 때 주인공 역할을 여성으로 하고 싶어서, 70여 명 가까운 여성 출연자들에게 섭외요청을 했지만 모두 거절 당하며 느꼈다. 아, 이렇게 예측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은 이렇게나 부담스럽구나. 결국 그 자리를 남자 출연자로 바꾸기로 정하자 섭외는 훨씬 수월해졌다.

업계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있고, 여성출연자에 대한 대중의 요구도 점점 커져가고 있기 때문에 요즘에는 주도적인 여성출연자들을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이 자리를 잡고, 다양한 여성캐릭터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부드러워지면 좀 더 다양한 여성캐릭터를 부담 없이 만나게 될 거다. 그 때까지 제작자들도 더 많은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보핍은 멋지다. 흠잡을 데 없이 멋진 캐릭터다. 하지만 흠잡을 데 없이 멋지다는 건 큰 개성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대량으로 합성해 평균값의 외모를 산출하면 점점 더 개성 없는 밋밋한 얼굴이 되어가는데, 보통 그 얼굴은 그럭저럭 예쁘고 잘생긴 편이다. 아마 더 많은 사진을 모아 더 이상적인 평균에 가까운 얼굴을 만든다면 더 예쁘고 잘생겨 보일 거다. 개성이라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표준에서 벗어날 때 생긴다. 그러니 표준에 가까운, 개성이 없는 얼굴일수록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쁘고 잘생긴 얼굴이 된다. 


나는 어릴 적 오락실에서 <스트리트 파이터>를 할 때면 항상 '브랑카'나 '달심' 같은 캐릭터를 골랐다. <철권>을 해도 '모쿠진'이나 '쿠마'에 끌렸다. 그 개성있는 디자인이 좋았다. 밋밋하게 생긴 '류'나 '켄'은 왠지 재미가 없는데 브랑카나 달심은 기술도 독특했다. 하지만 게임을 하기엔 개성 없는 류가 더 좋다. 브랑카처럼 독특한 캐릭터는 그 개성을 잘 활용할 수 있을만큼 게임을 잘해야 써먹을 수 있다. 고수용 캐릭터다. 개성 없는 류는 예측이 가능하고, 전반적인 능력치가 고르게 잡혀있어 다루기 쉽다. '개성 없음'은 곧 편안함을 뜻한다.


흠 잡을 데 없는 보핍의 캐릭터도 결국 개성이 없다는 뜻이다. 자나깨나 '보니'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물불 안 가리는 우디는 보고 있다보면 좀 짜증날 정도로 '이상한' 인물이지만, 결국 감동은 그 '모자란 신념'에서 오기 마련이다. 극을 주도하는 캐릭터는 뭐가 하나 과하거나 부족해야 한다. 매끈하게 상식적이고 멋진 인물이 이끌어가는 서사에 몰입하며 보기는 쉽지 않다. 상식적인 인물은 미친 짓을 하지 않는데, 서사의 감동은 미친 짓에서 나온다. 결국 클라이막스를 향하는 순간에 보핍도 내뱉지 않는가.

"하지만 그게 우디의 매력이지."


많은 서사의 '상식인' 여성 캐릭터들은 '상식적이어서 수동적이고 보조적인 리액션 캐릭터'에서, 이제 '상식적이어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렇게 저변을 확장해 가는 거다. 썩 개성은 없지만 멋있는 게 개성인 여성 주연들이 충분히 자리를 잡고나면, 이제 어디 하나 모자라지만 매력적이고 감동적인 여성 캐릭터들도 점점 나타나겠지. 보고싶다. 용감한 애, 똑똑한 애, 힘센 애, 비열한 애까지 다 여자들이 하고 있어도 억지스럽지 않고 재미있는 서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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