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성민 Sep 09. 2019

좀 덜 유명한, 인상적인 영화 44선

'왓챠'라는 영화 평가 앱이 매력적인 건, 심심풀이 땅콩으로 하다 보면 어느새 통계에서 그렇게 찾기 힘들다는 '전수조사'가 된다는 거다. 영화에 별점을 매기며 평론가 놀이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지만, 내가 본 영화 전부(!)를 솔직하게 점수 매겨 놓으면 애플리케이션의 추천작이나 예상 별점이 놀라울 정도로 믿을만해진다. 굉장히 간단한 메커니즘이지만 전수조사인데 오죽 정확도가 높을까.

그런데 내가 본 영화들의 점수를 매기다 보니 꽤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점수를 매긴 사람의 숫자가 너무 낮은 것들이 종종 보였다. '왓챠'의 평가자 수가 적다는 것이 반드시 이 영화를 본 사람이 적다는 의미는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런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왓챠'를 열심히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영화를 좋아하는 나의 애정을 담아 숫자가 아쉬운 영화들을 꼽아봤다. 주로 평가 참여자가 1만 명 근처이거나 채 못 미치는 영화들이다.

덕분에 [플립]이나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가타카], [타인의 삶]처럼, 굉장히 인상 깊었고 본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평가 참여자가 많은 영화는 빠졌다. 역시 좋은 영화는 다들 어떻게든 보는구나 싶다가도, 이슈가 많이 됐었는데 본 사람은 별로 없는 영화들도 있었다.

애플리케이션 사용자의 성향 문제인가, 모를 일이다.


아주 어릴 때 본 영화들도 많이 섞여 있다. 때문에 각 영화에 대한 코멘트도 들쭉날쭉한데, 어떤 것은 리뷰도 아닌 단편적인 인상 서술에 가깝다. 20년도 더 전에 봤던 영화가 아직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는 뜻 정도로 읽어주시길.


*2015년에 다른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온 글이다. 그 사이에 '왓챠' 유저도 더 늘었고, 더 알려진 영화들도 있어서 숫자가 많이 늘어난 것은 뺐다. 대신 그 뒤로 만난 영화들을 몇 편 추가했다.


1. 제이콥의 거짓말 Jakob the Liar (1999)

故 로빈 윌리암스 옹의 영화를 참 많이 봤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꼽으라면 늘 첫 번째로 꼽는 배우이기도 했다. 그의 영화들 중에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던 영화.


아주 어릴 때 봤던지라 지금 다시 보면 그의 작품 특유의 작위적인 냄새를 더 짙게 맡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영화적 휴머니즘은 조금 비현실적으로 허용해 주어도 좋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용은 간단하다. 나치 치하 폴란드의 유태인 게토 지역, 희망을 잃은 사람들. 하나둘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생긴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던 주인공은 얼떨결에 뉴스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뉴스에 희망을 섞어 전하는 그의 거짓말에 사람들은 점점 활기를 되찾고, 그럴수록 그의 거짓말은 점점 커져간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어른 버전 같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의 여운으로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멍한 표정이 되는 것도 비슷하다. 주인공이 어느 소녀와 왈츠를 추는 장면은, 그의 영화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2. 천국보다 아름다운 What Dreams May Come (1998)

역시 로빈 옹의 영화 중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보지 않은 영화.

영화의 내용 자체는 단순하고 전개도 설득력이 뛰어나진 않아서 사실 내러티브적으로 그리 매력적인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감각적인 시각효과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인상을 남긴다.


벌써 20년이 넘은 영화이니 기술적인 면에서야 지금에 한참 못 미치겠지만, 한정된 기술을 뛰어나게 활용한 상상력과 예술성 덕에 영화적 상상이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을 한 계단 올라선 느낌이다. 영화가 개봉한 지 몇 년이 지나 한국의 어느 TV CF에서도 저 시각효과를 따라 했을 정도이니 감각적인 영상미만큼은 손에 꼽을만하다.


미국 영화인지라 당연하게도 기독교적 시선으로 '천국'과 '지옥'을 그리지만,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보면 굉장히 불경스러워할 법한 묘사들이 많다. 오히려 그런 부분들이 나에게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고 본질을 고민할 수 있도록 해줬다.


3. 퍼펙트 월드 A Perfect World (1993)

'스톡홀름 신드롬'을 설명할 때 보여주면 가장 적절할 것 같은 영화.

초등학교, 아니 그때는 국민학교 1학년 때 보고 숨을 못 쉴 만큼 울었던 기억밖에 없다. 그만큼 나에게는 '슬픈 영화'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세상 슬펐던 영화.
지금 생각해보면 감독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나는, 마초 냄새 팍팍 나는 영화다.
다시 봐도 그때만큼 울 수 있을까. (울 것 같다.)


4. 파우더 Powder (1995)
아마 내가 비디오 가게 아들이 아니었다면 평생 볼 일이 없는 영화가 아니었을까.
주인공은 엄마가 그를 임신한 채 번개에 맞아 희귀병에 걸려 태어난 소년이다. 털이 없는 온몸은 하얗고, 전기가 흐르며, 천재적인 초능력까지 가지고 있다. 어쩐지 마블형 히어로의 탄생 비화와 겹치는 느낌이긴 한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맞닥뜨리게 될 현실이 마블과는 얼마나 다를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간중간 감각적인 장면과 묘사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영화.


5. 뉴욕의 가을 Autumn in New York (2000)

리처드 기어의 캐스트가 너무 잘 어울리는, 초호화 레스토랑의 경영자이자 매력적인 중년의 바람둥이와 그의 나이의 반도 안 되는 불치병의 여인, 위노나 라이더의 사랑 이야기.

아주 어릴 때 봤던 이 영화가 왜 그 뒤로 굉장히 오랫동안 기억에 내내 남아있고, 가을만 되면 약속이나 한 듯 어렴풋이 떠오르는지는 잘 모르겠다. 리처드 기어와 위노나 라이더가 가을과 참 잘 어울려 보였나 보다.

6. 원더풀 라이프 After Life (1998)

죽은 사람이 1주일 간 머물렀다 가는 '림보'라는 공간. 동사무소 같이 생긴 이곳의 직원들은 망자들을 하나하나 면담해 생전 가장 행복했던 한 순간을 정하게 한다. 그 순간을 영화로 만들어 상영관에서 함께 보며, 망자는 진짜 내세로 떠난다는 내용.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출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두 번째로 만든 극영화이니 비교적 초기작. 그래서인지 영화 중간중간, 이게 정말 연기자들의 연기인지 다큐멘터리인지 헷갈리는 장면들이 나온다. 실제로 몇몇 주인공을 제외한 많은 망자들은 연기자가 아니다. 보통 시민들을 섭외해 대략적인 대본만 주고 자유연기로 촬영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는 꼬박꼬박 아이들이 등장하는데, 자연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는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한다. 원래 아이가 나오는 영화는 꽤 자주 그 '아역' 때문에 몰입이 끊긴다.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그건 '어른'의 연기를 흉내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애들은 대사처럼 얘기하지 않거든. 영화 속 아이들은 하나 같이 어른스럽다.

그런데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천생 아이다.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아이들'의 말하고 뛰는 모습 그대로 카메라 앞에 서있다. 실물 대본을 주지 않고 상황과 몇 가지 라인만으로 연기를 시키는 그의 독특한 연출 방식 덕분이다. 이러한 연출 기법이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아이들'의 연기에서 빛을 발한다면, 그러한 기법을 성인에게도 적용했던 초창기의 장면들을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원더풀 라이프]보다는 영어 제목인 [애프터 라이프]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어 원제를 보니 이쪽도 '완다후루 라이후'다. 영어 사용자들에게는 저 제목의 복잡 미묘한 어감이 전달이 안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나저나 포스터는 되게 재미없어 보이게 만들어놨다. 포스터 만들 돈이 없었던 거니.


7. 아이언 자이언트 The Iron Giant (1999)

이런 거 되게 좋아한다. 막 그런 거, 용과 소년의 우정, 말과 소녀의 우정, 고래와 소년의 우정 막 이런 거. 중요한 건 소년 혹은 소녀와 우정을 나누는 그 '비인간'이 가급적이면 커야 된다는 거다. 그래야 그 느낌이 배가 된다.

내 이런 취향의 원류를 쫓아가면 이 작품이 있다. 외계에서 불시착한 거대 로봇과 소년의 우정.

내용은 조금만 보면 결말까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지금에야 말할 것도 없고 그 당시로서도 그렇게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그만큼 작품 자체가 클리셰에 가깝긴 하다. 하지만 예측했던 결말의 연출이 너무 훌륭하다. 그래서 준비된 채 감동을 맞는다.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는, 꼭 새로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진부한 이야기일수록 오랜 세월을 거슬러 인류의 마음을 꾸준히 어루만진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해가 거듭 돼도 사랑받는 이야기는 대개 늘 옷만 갈아입은 오랜 고전들이다. 어린 나는 이 작품을 보고 울었다. 그리고 없는 중학생 용돈 탈탈 털어 비디오까지 샀다.


당연하게도 이 작품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그 당시 이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많은 이들이 지금은 미디어 업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듯 하다. 스필버그의 자전적 대중문화 찬사시인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로 활용이 되더니, 급기야는 올 가을에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비디오로만 봤던 나도 큰 스크린으로 그 감동을 다시 느끼러 가야겠다.


8. 마리포사 Butterfly Toungues (1999)

소년과 거대 비인간의 우정만큼이나 내가 죽고 못 사는 종류의 이야기가 이런 '노소물'이다. '노소물', 그러니까, '노인과 소년'물. 꼭 노인까지는 아니어도 되지만, 적어도 나이 차가 40년 이상 나는 두 인물의 케미가 돋보이는 영화들. 아마 [시네마 천국]이 대표적일 것이고, 앞서 언급했던 [퍼펙트 월드]도 비슷한 맥락일 게다.

서로가 살아온 세상과 세월이 까마득히 차이나는 와중에도 그 막역함 사이의 배려, 좁은 공통분모 위에서 이루어지는 이해 같은 요소들이 마음을 건드린다.

그런 노소물 중에서도 [마리포사]는 좀 특별하다. 그 어떤 영화보다 마지막의 여운이 강렬했던 영화였다.


수애와 이병헌이 나왔던 [그 해 여름]이 떠오르는 영화기도 하다. [그 해 여름]은 그냥 순수함을 그리워하는 복고 멜로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시대가 일상을 불쑥 찌르고 들어오는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어딘지 조금 아쉬웠던 [그 해 여름]에 비해, 1930년대 스페인 내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마리포사]는
그 시대가 더욱 폐부 깊숙이 찌르고 들어온다.


누군가가 내게 자신이 안 봤을 법한 영화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제일 먼저 꺼내는 영화.


9. 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 (2000)

역시 노소물. 단 한 권의 전설 같은 베스트셀러만을 남기고 잠적해버린 작가와, 글쓰기에 보석 같은 재능을 지닌 슬럼가 흑인 소년의 만남 이야기. 전형적인 성장 드라마이지만, 영화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는 '글쓰기'가 주 소재로 등장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모나지 않은 연출, 안정적인 연기, 잘 갖춰진 내러티브, 뭐 하나 특별할 것 없지만 군더더기 없이 꽉 찬 드라마.
주인공 자말은 글쓰기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는데, 농구도 천재다. 불공평해.


10. 에버 애프터 Ever After (1998)

모든 동화는 '옛날 옛적에 Once upon a time'로 시작해 '그 후로 오랫동안 Ever after'으로 끝난다. 동화의 클리셰를 차용한 제목의 [에버 애프터]는 신데렐라를 재해석한 영화다.


사실 저런 공주 스토리들은 대부분의 상식인들을 빡치게 만드는데, 인어공주에게는 "목소리를 잃었으면 종이에 써서라도 니가 구했다고 얘기 좀 해!"를 외치며 문해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되새기게 되고, 신데렐라에게는 "방에 숨어 있지 말고 나와서 무도회장의 그녀가 너라고 좀 얘기해, 왕자는 무슨 안면인식장애냐!"를 외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신데렐라로 등장하는 드류 베리모어는 고전 신데렐라를 보며 고구마 답답하던 이들에게 사이다가 되어줄 주체적인 여성이다. 지금에야 별로 새롭지 않은 재해석이지만 그때만 해도 꽤 신선한 소재였고, 소재의 신선함을 떠나 수려한 영상미와 알콩달콩 보고 있기 즐거운 연기와 연출만으로도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다.


11. 플레전트빌 Pleasantville (1998)

(세상 여느 남매처럼) 서로 다른 TV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싸우다가 TV 속으로 빨려 들어간 남매가 맞닥뜨리는 이야기. 그들이 빨려 들어간 TV 프로그램은 흑백 고전 시트콤 <플레전트빌>이다.


흑백 세상 속에서 세상이 하나씩 색깔을 찾아가는 시각효과는 그간 뮤직비디오나 CF에서도 즐겨 활용되고, 얼마 전 개봉했던 [더 기버: 기억전달자]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되었을 만큼 영상쟁이들이 즐겨 찾는 효과다. 이제는 좀 진부해 보일 정도인데, 그만큼 감각적인 영상미의 상징처럼 쓰여 왔다.

이 효과를 내러티브와 몹시 유기적으로 엮어낸 최초의 사례가 이 [플레전트빌]이었다. 개봉한 지 한참 되었는데도, 최근작인 [더 기버]보다 훨씬 더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꽤 정치적이고, 인문학적인 질문을 직설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던진다. 시각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완성도가 충만했던 영화.


토비 맥과이어와 리즈 위더스푼의 소싯적 모습을 감상하는 재미도 덤으로 누릴 수 있다.


12. 매치스틱 맨 Matchstick Men (2003)
작품 고르는 눈이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건지 지금은 거의 믿고 거르게 되는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와, '에? 이런 영화도 만들었었어?' 싶은 이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작품.


니콜라스 케이지는 강박증, 대인 기피증, 광장 공포증, 결벽증에 틱장애까지 앓고 있는데 능수능란한 사기꾼이라는 도저히 말이 안 될 것 같은 인물을 연기한다. ...근데 되게 잘해.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왜 자꾸 이상한 작품만 고르냐고.
아마 저렇게 다양한 증상은 사기꾼이라는 불안한 생활로부터 왔을 거라는 설정일 텐데, 그런 그에게 오래전 임신한 줄도 모르고 이혼했던 전처의 딸이 나타나면서 그런 불안함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하는 그런 얘기. 이러면 왠지 추석 특선 영화 같은 느낌이지만 또 절대 그렇게 평범한 휴먼 드라마는 아니다.

사기를 치는 장면들의 흥미진진한 스릴부터, 딸을 향한 진한 부성애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따뜻함까지, 다양한 감정들을 고루 잘 개어 전달해주는 거장의 연출력과 연기를 감상하기 좋다.

거기에, 영화를 잘 몰입해서 보다가 헐? 하는 육성을 터뜨렸던 몇 안 되는 영화. 그 뒤에 헐? 했던 감정의 잔여물까지 친절하게 잘 추스러주는, 정말 드문 영화.

무엇보다, 재밌다.


13. 버터플라이 Le Papillon (2002)

또 노소물. 노소물 진짜 좋아한다. 심지어 이 영화는 [마리포사]하고 제목도 소재도 겹친다. ('마리포사'는 스페인어로 나비, '빠삐욘'은 프랑스어로 나비다.)

[마리포사]가 시대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나비의 혀'를 말하는 노소물이었다면 이 쪽은 똑같이 나비가 나오는 노소물이지만 시트콤, 혹은 촌극에 가깝다. 시종일관 투덜거리는 츤데레 할아범과 맹랑하게 쨍알대는 꼬마 소녀의 케미에 프랑스 영화 특유의 유머까지 더해져 유쾌한 노소물의 전형을 보여준다. 가볍게, 기분 좋게 볼 수 있는 영화.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두 주인공이 불러주는 노래까지 충실하게 귀엽다.
노래는 그렇게 귀여우면서도 노소물 특유의 철학, 노인의 지혜와 아이의 순수함이 어우러지는 그 진리의 냄새도 놓치지 않는다.


14. 녹차의 맛 茶の味 (2003)

일본의 감성은 확실히 독특하다. 중국 영화만 해도 국경을 넘어 통용되는 보편적 정서가 자주 담겨 있는데, 일본 영화는 정말 '일본이 아니면 나올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정서들이 훨씬 많다.

일본영화는 꽤 자주, 둘 중 하나다. 굉장히 순수하거나, 굉장히 기괴하거나.
[녹차의 맛]은 그 두 가지를 같이 보여주는 느낌이다. 내러티브랄 건 딱히 없다. 도쿄 외곽 조용한 시골마을에 사는 한 가족의 일상을 특별한 갈등의 줄기도 없이, 두서없이 차례차례 보여준다. 보고 나면 굉장히 컬트적인 영화를 본 것 같기도 하고, 녹차처럼 잔잔한 영화를 본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히는데, 이게 도대체 뭘 얘기하려고 하는 건지 설명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태도 같다.

그...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하는데, <멋지다 마사루!>라는 만화를 보고 미친 듯이 웃는 사람과 어처구니없어하는 사람. 후자에 속한다면 이 영화는 안 보는 쪽이 좋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15.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 Bridge to Terabithia (2007)
한국판 포스터에는 이마에 대문짝만 하게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제작진"을 강조하고 있다. 거기에 배경에는 마법의 성이며, 거대한 독수리를 넣어놓고 판타지 대서사시인 양 마케팅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미국판 포스터가 영화의 진실에 가깝다.

한국판 포스터에 등장하는 저런 요소들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건 맞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청소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성장영화다.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보다는 [플립]에 훨씬 가까운 것 같다. 하긴 [나니아 연대기]는 물론 [반지의 제왕]도 일종의 성장영화인 것은 맞으니 결국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다.


'판타지'는 현실을 효과적으로 투사하는 도구로써 기능할 때 가장 잘 만들어진 서사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그 어떤 영화보다 '판타지의 본질'을 가장 잘 담아낸 영화다.


16. Babies (2010)

인터넷에서 트레일러를 보고, 너무 보고 싶어 져서 그때 살고 있던 고시원 총무에게 이 영화의 트레일러 얘기를 막 떠들었더니 능력자 총무님이 어디선가 영화를 구해다 주었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개봉을 안 한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한국 개봉을 하지 않아서인지 한글 제목은 사이트마다 제각각이다.


영화는 아주 단순한 다큐멘터리다. 나미비아, 몽골, 일본, 캘리포니아의 각각 아기 한 명씩을, 출생부터 첫걸음마의 순간까지 담아냈다. 인터뷰도, 내레이션도 없다. 주변 인물들이 영화 속에서 어쩌다 한 두 마디씩 하긴 하는데, 다 합쳐도 A4 한 장도 안 나올 것 같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아기들, 혹은 아기와 동물들을 찍은 소위 '심쿵짤'들을 보는 게 인생의 낙인 사람들이 많은데 이 영화는 사실 그냥 80분짜리 짤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그냥 귀여움 뚝뚝 듣는 '짤'로만 치부하기에는 다큐멘터리적인 면모도 가득하다. 문명으로 가득한 도쿄와 샌프란시스코의 아기들, 그리고 반대 극단의 나미비아와 몽골의 아기들이 출생부터 1년까지 똑같이 겪는 발달과정의 교차편집은 아무런 설명 없이 그 자체로 대단히 극적인 문화인류학 교재다.

가장 극적인 대비를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아기를 씻기는 장면이다. 물이 귀한 나미비아에서는 엄마가 아기의 얼굴을 직접 혀로 핥고 빨아서 세수를 시키고, 똥을 싼 엉덩이는 엄마 무릎에 문질러 닦은 다음 무릎은 다시 다 먹은 옥수숫대로 슥슥 문질러 닦는다.
나미비아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물이 귀한 몽골 어느 초원의 엄마는 모유를 아기의 얼굴에 짜낸 다음 이를 헝겊으로 닦아내는 것이 세수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아빠의 품에 안겨 샤워기로 씻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아기, 풀장에서 놀고 있는 도쿄의 아기. 솔직히 감독의 편집이 좀 짓궂다.
이렇게 초반에는 도시의 아기들이 누리는 문명의 이기에 비해 비문명의 아기들이 좀 안타까워 보이는 장면들이 이어지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반대의 느낌을 보여주기도 한다.

오직 집과 부모 품에서 벗어날 일이 없는 도시의 아기들에 비해 누가 엄마인지 갈피가 안 잡히는 나미비아 공동육아의 장면들이라든지, 몽골 전통 가옥인 게르 안에 갓난쟁이를 혼자 내버려 두고 엄마가 일하러 간 사이 초원을 마음껏 기어 다니며 염소며 개며 닭과 하염없이 부비고 노는 몽골 아기의 자유로운 모습 같은 것들이 그렇다.


다분히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장면들이 많다. 그걸 내레이션 하나 없이 날 것 그대로의 촬영과 편집만으로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다큐멘터리다.
그리고 이런 영화적이고 문화인류학적인 재미들을 다 떠나 진짜 미친 듯이 시종일관 귀엽고, 영상미도 너무 예쁘다. 일곱 번쯤 본 것 같다.


17. 삼사라 Samsara (2010)

[Babies]처럼 내레이션 하나, 인터뷰 하나 나오지 않고 오로지 영상으로만 말을 거는 다큐멘터리지만 그 어조는 [Babies]와 완전히 반대 극단에 서 있다.
'삼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윤회, 혹은 흐름이라는 뜻이다. 태초로부터 이어져오는 인류 문명의 탄생, 고통, 억압, 착취, 구원에의 의지, 파멸 등을 고요하게 울부짖는 영상들로 쉬지 않고 보여준다. 정말, 영상들이 울부짖는다.


[Babies]를 보고 있으면 인간이란 존재가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 없지만 [삼사라]를 보고 있으면 인류로부터 눈을 돌려 머리 깎고 산사에 들어가야만 할 것 같다. 연출되지 않은, 그저 현존하는 인류문명의 장면들을 그대로 담아낸 것만으로도 그 어떤 특수효과를 동원한 영상서사보다 강렬한 충격을 선사한다. 어떤 영상을 보며 오로지 눈으로 보이는 그 시각적 충격만으로 탄성을 질러본 건 [삼사라]가 유일했던 것 같다. 그만큼 기록으로서의 영상이 보여줄 수 있는 전율의 최고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론 프릭 감독은 이 작품을 찍기 20년 전에도 [바라카]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는데 20년 차이의 낡은 기술로도 꽤 많은 장면에서 [삼사라]와 비슷한 주제의식, 비슷한 시각 경험을 선사한다. 인류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이 20년 동안 꾸준히 숙성되어 온 것이다.


이토록 인간의 문명을 깊게 긁어낸 영상이 많지 않은 편인지 [루시]나 [더 기버: 기억전달자] 같은 꽤 여러 편의 헐리우드 영화에서 '인류'를 설명하는 장면에 꼭 이 [삼사라]의 클립들을 자주 동원한다. 어, 저거 [삼사라]에서 본 것 같은데 싶은 기시감에 크레딧을 확인하면 어김없이 자료를 사 왔다고 적혀 있다.


[삼사라]는 그 영상만큼이나 감독의 웅변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가 자기 문제의식을 말하기 위해 인류사를 취사선택한 그 의도성에 비하면, [Babies] 감독의 의도적인 편집은 애교도 못 된다. 그만큼 론 프릭 감독의 이 경악스런 영상의 향연은 다분히 설교적이고, 의도적이다. 인류의 다른 장면들을 또다시 취사선택하면 얼마든지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의도가 빤히 보이는데도,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자부하는 나도 잠시간 불교로 개종할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강렬함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가지는 영상들.


18. 비투스 Vitus (2006)

노소물 + 천재소년물, 두 장르의 클리셰를 고루 잘 갖춘 영화.

포스터의 카피처럼 열두 살에 바흐, 모차르트, 슈만, 리스트를 모두 마스터한 천재 피아니스트 소년 비투스와, 그를 이해하는 유일한 친구이자 '하늘을 나는 것'이 소원인 그의 할아버지 이야기.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들, 익숙한 이야기들이 이어지지만 헐리우드와는 결이 다른 스위스 영화의 감성과 함께 시종일관 들려오는 수준 높은 클래식 음악에 귀가 즐거운 매력이 있다.

사랑스럽게 잘 만들어진 영화인 건 확실한데 내가 노소물 마니아라서 유독 더 재미있게 본 것 같기도 하다.


19. 소중한 날의 꿈 (2011)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난 작화와, 이를 받쳐주는 잔잔한 감성, 억지스럽지 않은 한국적 정서까지. 이 정도면 한국의 지브리라고 불러도 아깝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 완성도에 비해 그리 많은 관객이 들지 않아서 안타깝기도 했던 애니메이션.


웹툰 <무한동력>도 떠오르고, <검정고무신>도 겹쳐 보인다.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소년스런 주인공과, 그를 짝사랑하는 전형적인 굳세고 순수한 평범녀 주인공의 청춘순애물이라 내용은 엄청나게 특별할 건 없다. 하지만 수채화 같은 화면들을 보고 있으면 그 분위기에 젖어 평범한 내용도 촉촉하게 느껴진다.


본편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청각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삼촌이 화면에 등장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 담담하게 수화로 말을 건다. 수화로 말을 건네긴 하는데 자막이 없다. 조금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에 있다.

이 작품을 만들며 한참 힘들어하고 있을 때 제작진 중 청각장애를 가진 스탭이 와서 수화로 위로를 건넸는데, 그때 그 수화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굉장히 위로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관객에게도 그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 일부러 자막을 넣지 않았다고.
인터넷 검색을 조금만 해보면 그 수화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영화가 다소 심심해 아쉬움을 느꼈더라도 이를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마음에 깊이 남는다.
생각해보면,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수화로 건네는 위로를 짠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감독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어딘지 좀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20.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The Motorcycle Diaries (2004)

장 코르미에의 빨간 책 <체 게바라 평전>과 이 영화는 공히 에르네스토, 즉 체 게바라를 다루었다는 점 말고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이 대부분 그 존재를 알고 있고, 한 번 봐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거다.

<체 게바라 평전>은 한 때 유행처럼 웬만한 책장에서 꼭 발견할 수 있는 책이었지만 주변인들에게 물어보면 '읽을 예정'인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보통 읽을 예정인 책을 읽게 되는 날은 쉽사리 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도 '젊은 체 게바라가 주인공인 로드무비'라는 사실은 평전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는데, 역시 실제로 본 사람을 만나기도 평전만큼이나 어려웠다.


평전이라고 쓰여있지만 사실상 위인전이나 다름없는 <체 게바라 평전>에서 가장 몰입력 있었던 부분은 의대생 에르네스토가 여행을 떠나 '몰랐던 세상'을 만나던 장면이다. 위인전들이 대개 그렇듯 젊은 시절 이야기가 그 삶의 주된 업적 이야기보다 재미있다. 어쩌면 '위인'이 되기 전이라 그나마 공감할 여지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평전에서 가장 즐겁게 읽었던 부분만 따로 떼어 놓은 영화라니 이 얼마나 반갑단 말인가. 어쩐지 고생의 냄새가 풀풀 나는 '로드 무비'는 장르 자체로는 썩 반갑지 않은데, 정작 영화를 보면 기억에 오래 남는 경우가 많다. 고생하며 찍어서 그런가.
영화적인 완성도가 대단히 훌륭하다고 느껴지진 않지만, 끝나고 나면 천천히 여러 가지를 반추하게 되는 영화. '잘' 살고 싶어 지는 영화.


21. 디파이언스 Defiance (2008)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2차 대전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모습들을 담아냈던 사건이었다. 그만큼 이를 소재로 한 좋은 영화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블러드 다이아몬드]와 [라스트 사무라이]의 감독 에드워드 즈윅과, 가장 혁신적인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가 고른 2차 대전의 장면은, 독일군을 피해 숲 속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던 유태인들의 엑소더스적 실화였다. 마치 [쉰들러 리스트]와 <출애굽기>를 연상시키는 장면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 중에서, 다소 생소한 소재,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작품이라 큰 입소문 없이 조용히 지나간 것 같다. 하지만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결의 아름다운 영상미,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통찰이 드러나는 장면들, 하나의 사회가 어떻게 원시적인 발생의 단계를 거쳐 하나의 생물로 성장해 가는지를 그려내어 내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됐다.
물론 내 입에 맞았던 사이드 디쉬 말고도, 휴머니즘 전쟁 드라마라는 메인 코스도 다른 영화와 견주어 뒤지지 않는다.


22. 우리도 사랑일까 Take This Waltz (2011)

키이라 나이틀리와 클로이 모레츠가 나온 [래기스]나,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나온 [왓 이프]처럼 '바람'을 미화하는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결혼한 사이가 아닌 이상 서로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가 강제적인 건 아니긴 하다. 더 마음이 잘 맞는 상대를 만나 지금의 파트너를 떠나는 걸 무조건 나무랄 수야 없지만, 보통 그런 '바람' 영화에서 버려지는 파트너는 별 잘못이 없는 경우가 많다. 나름 성실하게, 충실하게 연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런 상대에게 상처 주는 일을 합리화하는 이야기는 인간사가 다 그렇다지만 별로 예뻐 보이진 않는다.
하긴 영화가 꼭 예뻐야 영화는 아니니.


하물며 이 영화는 연인 사이도 아니고 불륜이다. 그것도 지극히 성실하고 자상한 남편을 떠나는 불륜 영화. 중간중간 주인공의 마음이 툭툭 떨어지게 만드는 장면들이 한 번씩 나오긴 하지만 불륜을 합리화하기엔 한참이나 부족하다.
내 마음에는 썩 들게도, 사라 폴리 감독은 꾸준히 예쁜 영상미를 보여주면서도 결코 불륜의 손을 들어주진 않는다. 굉장히 세련된 영상과 연출과는 안 어울리게, 다소 촌스러울 정도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극 중 인물의 입을 빌려 직접 하기까지 한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섬세한 연출들이 인상적인 영화. 옷을 다 입고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기만 하는 롱테이크 컷이 어지간한 베드신 보다 농염하게 다가오는 장면이라든지, 남편과 불륜남이 한 장소에 함께 머무르는 동안 느껴지는 혼란스러운 설렘을 정말 세심하게 그려낸다. 얼마나 인상 깊게 봤는지 보고 와서 블로그에 긴 리뷰까지 남겼다. (https://brunch.co.kr/@kwsungmin/4)


[주먹왕 랄프]의 귀여운 여주인공 '페넬로피'의 성우였던 사라 실버맨의 걸걸한 모습을 보는 재미는 덤.
다만 한글 제목을 꼭 저렇게 촌스럽게 지어야 했을까. 'Take this waltz'라는 원제는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과 그 순간의 OST도 잘 담아내면서, 역설적으로 영화의 주제까지 아우르는데. 하긴 번역하기 정말 애매한 제목이긴 하다.


23. 대학살의 신 Carnage (2011)

[피아니스트]와 [올리버 트위스트]의 감독 로만 폴란스키, 그리고 [대학살의 신]이라는 제목. 이것만 보면 인류사의 가장 처참한 장면들을 고발하는 거대한 스케일의 휴머니즘 드라마를 기대하게 된다.
정작 영화를 보면 의아한 감정을 감추기 어려운데,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중산층 부부의 거실만 나오고 학살은커녕 피 한 방울 안 튄다. 아마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 그리고 화려한 캐스트인 조디 포스터나 케이트 윈슬렛에게도 스케일로는 가장 작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다만 인류사의 처참한 장면을 고발하는 영화는 맞다. 저 흥미로운 포스터의 12개 얼굴이 이 영화의 내용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데, 이 영화의 줄거리를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되는" 이야기다. 케이트 윈슬렛과 크리스토프 왈츠 부부의 아이가, 조디 포스터와 존 C. 라일리네 아이와 놀다가 다툼이 붙어 살짝 다치게 만드는데, 그래서 가해자 아이네 교양 있는 부모가 피해자 아이네 교양 있는 부모에게 사과를 하러 찾아온다는 내용.
처음에는 교양 있는 중산층 부부들 답게, 불미스러운 일로 만났지만 서로 품위를 잃지 않고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다 조금씩 서로의 민감한 부분을 웃는 얼굴로 비꼬기 시작하다가, 급기야는 피아식별마저 무너진 채 너나 할 것 없이 고함을 질러대며 멱살 잡기 직전까지 가는, 뭐 그런 얘기.

포스터에도 쓰여 있듯, '대학살의 신'의 지배가 시작되는 인간 본성까지의 과정을 담아낸 블랙 코미디다. 흡사 연극을 보는 듯, 이렇다 할 앵글의 구성도 액션도 없이, 담담한 화면 아래 날이 선 대사들이 휙휙 날아다닌다.
그만큼 오로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그 즐거움으로 꽉 차있다.

보고 나면 유쾌한 듯 찝찝한 그 기분을 내버리기 어려운 영화.


24. 맨보그 Manborg (2011)

2011년 작이다. 포스터만 봐서는 믿을 수 없겠지만, 2011년 작이다. <무서운 집> 같은 영화도 극장에 걸리는 세상에, 이 영화라고 걸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내 기억으로는 못 걸렸다. 몹시 어울리게도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볼 수 있었던 저주받은 걸작.


인터넷 상에서 [쿵 퓨리]가 B급 감성의 정수라며 화제였던 적이 있다. 하지만 [쿵 퓨리]는 제작자가 메이저 출신이어서 그런지 너무 고급이었다. 메이저가 B급을 흉내 내면, [쿵 퓨리]처럼 마치 B급인 척 하지만 한 꺼풀 아래에서 주류의 냄새가 풀풀 묻어나는 영화가 나온다.
[맨보그] 정도는 되어줘야 진짜 B급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두 작품에서 모두 충실히 지키고 있는 B급 컬트물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아무리 영화가 거지 같아도 영화 속 주인공 본인들은 세상 진지해야 한다는 거다. 그나마 [쿵 퓨리]의 인물들은 제법 말이 되게 진지한데, [맨보그] 영웅들의 진지함은 '끄으으으으으, 으으으으' 소리를 내며 보게 된다, 너무 오그라들어서.


75분짜리 총체적 오그라듦의 영화다. 작품의 괴랄함은 [맨보그]가 [쿵 퓨리]를 한참 뛰어넘는다.
B급 영화는 바로 이런 재미로 보는 거다. 저런 포스터지만, 포스터의 완성도가 영화보다 훨씬 높은 것 같다.


25. 루비 스팍스 Ruby Sparks (2012)

포스터가 정말 몹시 안 예쁘지만, 영화의 내용은 굉장히 잘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은 소설가. 그가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상상하며 써 내려간 여인이 어느 날 눈 앞에 정말로 나타난다. 나타나기만 했을 뿐 아니라 그녀를 만난 이후로도 그가 쓰는 내용 그대로 변하는 그녀. 그러니 그는 자신의 연인을 손 끝에서 얼마든지 가장 이상적인 여인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어딘지 비슷한 소재의 영화 [스트레인져 댄 픽션]도 생각이 나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보면서 즐겁기로는 그보다 한 수 위다. [스트레인져 댄 픽션]의 주인공은 자신이 어떤 작가의 소설 속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러니 자기 운명을 어찌할 도리 없이 수동적으로 불안하게 끌려가는 입장이다. 반면 [루비 스팍스]의 주인공은 스스로가 작가, 절대자, 피그말리온이다. 한 여성을 마음먹은 대로 창조할 수 있는데, 심지어 그녀가 내 연인이다. 초능력과 섹슈얼리티, 남성들의 두 가지 판타지를 동시에 충족시켜 버린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굉장히 하드코어 한 내용이 될 법도 한데 영화의 대부분은 귀엽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내 연인의 생각을, 성격을,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꿔 버릴 수 있다. 이런 설정에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진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찬찬히 잘 그려낸 영화.
가벼운 로맨틱 판타지로 시작해 즐겁게 보다 보면 후반부에 이르러 숨을 죽이고 볼 수밖에 없는 묵직한 장면들도 이어진다.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 조 카잔이 피그말리온의 그녀 '루비'로 등장하는데, 주이 디샤넬을 닮은 어딘지 독특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앞서 언급했던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바람미화 영화 [왓 이프]에서도 묘한 매력을 뽐내서 인상적이었는데, 이 [루비 스팍스]의 시나리오까지 그가 썼다고 하니 지켜볼 만한 배우인 것 같다.


26. 아무르 Amour (2012)

이 역시 여기에 쓰기엔 사실 많이 알려진 영화.
나이 듦에 대해, 오래된 사랑에 대해, 그 어떤 작품보다 깊게 어깨를 두드리는 영화였다.
담담하고 짙게 흘러가는 고요한 영상은 영화를 보는 내내 숨을 죽이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다 올라가 상영관에 불이 켜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빈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게 했다.
두 번을 관람했지만, 두 번째 객석에 앉는 것이 참 힘들었던 영화.
오래도록 생각나겠지만, 다시 보라면 어려울 것 같은 영화.


27. 와일드 Wild (2014)

영화 내내 리즈 위더스푼 혼자 개고생 하는 로드무비이자 여성영화.
애증을 나누던 엄마의 죽음 이후,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신의 삶을 다시 추스르기 위해 트레킹을 떠나는 여성의 이야기다.

개고생 하는 트레킹의 낭만도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여자 혼자 여행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또한 실감 나게 담아내기도 한다.
여행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대개 보는 이의 역마살을 부추기는데, 이 여행은 보는 나로 하여금 떠나기보단 머문 자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삶은 늘 여행에 비유되고 그렇기에 여행을 그리는 영화들은 늘 삶을 말한다. 하지만 이 영화처럼 그 둘을 한 덩어리로 잘 매만진 영화는 드물었던 것 같다.
길 위에서 그가 마침내 눈물을 터뜨렸을 때, 나도 함께 울었다.


28. 엑스 마키나 Ex Machina (2015)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말은 유명하다. 영어로 'God from the machine', 기계를 타고 온 신이라는 이 말은 그리스 연극으로부터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이리 얽히고 저리 엉킨 갈등 관계를 도저히 작가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사용한 방법이다. 그리스는 신의 나라 아니겠는가. 워낙 문화적으로 익숙한 만큼 연극 무대에도 뿅 나타나 전능한 힘으로 모든 갈등을 다 해결해준다. 이때 무대 위에 등장하는 신은, 신이니까, 나름 특수효과로 기중기 같은 기계를 타고 내려오며 등장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 뒤로 문학작품에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뜬금없는 인물이나 사건이 나타나는 게으른 장치를 나무라는 말이 됐다. 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


물론 [엑스 마키나]는 그런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아니다. 다만 저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서 '데우스'만 뺀 말이니, 'from the machine', '기계로부터'가 제목이 된다.

영화는 대단히 단순한데,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등장인물은 딱 세 명, 이 셋이서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현실로 따지면 구글 정도 되는 IT 기업의 대표, 그로부터 행운의 초대에 당첨된 그 회사의 프로그래머 직원,
그리고 그 대표가 만든, 인간에 가까운 인공지능의 여성형 로봇.
대표는 주인공에게 일종의 튜링 테스트를 제안한다. 튜링 테스트는 앨런 튜링이 생전에 제안한 테스트로, 인간이 인공지능 프로그램 또는 진짜 사람과 채팅을 하면서 상대방이 사람인지 프로그램인지를 판단해 내는 테스트다. 인공지능이 대화만으로 얼마나 사람과 유사해질 수 있는지를 가리기 위함이다.

주인공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로봇이지만, 그는 그녀가 로봇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대화를 할수록 점점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인가 대표와 그녀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한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인지 혼란스러운 속에서 진실을 캐내려는 것이 영화 내용의 골자.


자유를 구가하는 인공지능 로봇의 이야기.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로봇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 익숙하게 만나온 소재와 질문이다. 극도로 단순한 구조의 [엑스 마키나]는 그 익숙한 플롯을 세밀한 연출로 펼쳐 보이며 그동안과는 다른 색깔로 눈 앞에 가져온다.
이런 류의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는 그 로봇의 매력이다. 인조인간 '에이바' 역의 알리샤 비칸데르는 주인공이 그랬듯 로봇임을 알고 있음에도 빨려 들어갈 만큼 매력적인 분위기를 잘 연출해낸다.


29.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Finding Vivian Maier (2013)

감독이자 주인공인 존 말루프는 우연히 동네 경매장에서 인화되지 않은 수만 장의 필름을 산다. 인화된 적이 없고, 당연히 어딘가 발표된 적도 없는 그 사진들은 하나 같이 예사롭지 않다. 처음 들어보는 원래 주인의 이름, '비비안 마이어'라는 여성의 흔적을 따라 그녀의 정체를 좇는 다큐멘터리.
이 흥미로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괴짜의 괴팍한 성격 덕분에 완성된 거나 다름없다. 캐면 캘수록 도무지 알 수 없는 괴팍한 성격의 비비안 마이어가 첫 번째 괴짜이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도 있는 필름의 정체를 정말 집요하게 따라가는 존 말루프도 도무지 평범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 그녀의 사진들을 보노라면 그렇게 집요했던 말루프의 추적이 내심 이해 가기도 한다. 사진이란 예술형식은 우연이 겹치면 아마추어도 얼마든지 거장의 작품을 흉내 낼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인 것은 맞다. 하지만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대가들의 사진과 견줄만한 비비안의 작품들은 여전히 놀랍다.

그런 사진을 단 한 장도 인화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다니. 그리고 그런 사진을 찍은 그는 평생을 유모로 살았다니. 누구라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고, 그 자체로 영화적인 미스터리까지 완성된다.


다만 사진과 영상 같은 비비안의 작품, 기록물, 수집품들은 무서울 정도로 자료가 넘쳐나는 반면, 비비안 스스로의 신상과 관련된 정보는 거의 남기지 않고 떠난 그 알 수 없는 성격 덕분에 영화적 미스터리는 그 자체로 내러티브의 한계가 되기도 한다.


30. 알리타: 배틀엔젤 Alita: Battle Angel (2019)

의외다. 정말 의외다. 이 초대형 블록버스터를 본 사람이 이렇게 적을 줄이야.

<총몽>이란 제목의 원작 일본 만화는 한국 내에서도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여기에 마음을 빼앗겼던 사람 중에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도 있었고, 꽤 오랫동안 이 만화의 실사화를 꿈꾸며 판권을 사두었다. 하지만 <아바타>에 집중하기로 하고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에게 연출권을 넘겼다.


만화 원작의 마니악한 느낌 때문인 걸까. 저예산 영화도 아닌데 등록된 평가가 이렇게 적다는 게 신기하다. 내러티브 자체는 특별할 게 없지만, 액션의 쾌감과 그래픽의 활용력만큼은 근래 본 블록버스터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특히 IMAX 개봉 당시 나에겐 IMAX의 시각적 경험을 극대화한 것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영화였다.

개봉은 끝났으니 가정용 TV로 감상할 때는 그 스케일보다, 디테일한 그래픽에 집중하는 쪽이 좋겠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CG로 만들어진 주인공 '알리타'의 시각적 매력이다. 일본 만화 그림체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크게 만든 눈이 생각보다 금방 익숙해진다. 그래픽의 정밀도는 말할 것도 없으며, '불쾌한 골짜기'를 뛰어넘은 자연스러운 표정 연출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래픽이 아무리 발전해도 배우를 대체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처음으로 그 생각에 반문을 갖게 만든 영화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앵글 속에서도 포효하고 오열하는 표정의 미세한 과정 하나하나까지 모두 예쁘게 짓는 것은 인간 배우는 불가능하지만, '알리타'는 가능했다. 어떤 감독에겐 후자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지도.


여담이지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필두로 잔인하고 냉혈한 악당 연기의 대가인 '크리스토프 왈츠'의 선한 얼굴을 볼 수 있는 영화.


31. 트럼보 Trumbo (2015)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영화.

<로마의 휴일>의 각본을 쓴 작가 트럼보의 투쟁을 다룬 전기 영화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1940년 대 미국, 헐리우드의 잘 나가던 각본가 트럼보는 스탭들의 노동권을 대변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모든 일거리를 잃는다. 결국 이름을 숨긴 채 가명으로 닥치는 대로 온갖 대본 작업을 맡는데, 그중 하나였던 <로마의 휴일>은 그 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고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상을 받지 못한다.


엄청나게 눈에 띄는 개성은 없지만, 군더더기 없이 안정적인 연출, 연기, 영상미, 음악 등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이 고전적으로 탄탄한 영화다.

영화가 개봉했던 2015년의 한국 사회와, 영화 속 냉전시대의 미국이 겹치는 모습이 많아 더욱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들었던 영화.


32. 바이스 VICE (2018)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를 다룬 <빅쇼트>의 감독 애덤 맥케이 그 사단인 크리스찬 베일, 스티브 카렐 등이 다시 힘을 합친 차기작. 조지 부시 당시 부통령을 지낸 '딕 체니'의 생애를 블랙코미디로 다룬 영화다. 이번엔 제목부터 대놓고 말장난이다.


<빅쇼트>가 미국의 금융경제를 풍자했다면 <바이스>는 같은 문법으로 정치를 풍자한다. 여전히 화려한 편집과 몽타주의 활용, 제4의 벽을 넘나드는 연출, 어려운 이슈를 과감하게 풀어내는 위트, 그리고 실제 인물들을 모사한 배우들의 호연이 화려하다. 그중에서도 '딕 체니'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크리스찬 베일이 분장과 연기로 그를 완벽하게 모사하는 걸 구경하는 재미가 가장 크다. <빅쇼트>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역시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봤을 지도.)

다만 경제 이슈와는 달리 정치는 더욱 민감한 나머지 미국 내에서는 전작에 비해 훨씬 호불호가 갈렸다. 상위 0.1프로 금융재벌들은 아무리 까도 대다수 관객들은 따라오겠지만, 미국의 정치적 보수 진영을 까면 미국민의 절반(어쩌면 그 이상)은 당연히 기분이 상할 수밖에.

더구나 어렵고 복잡한 이슈를 쉽게 풀어내는 감독의 스타일이 보기에 따라서는 다분히 엘리트주의로 보일 수 있는데, 이게 정치풍자 블랙코미디랑 엮이면서 풍자의 대상이 되는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전부 멍청이로 느껴지게 만든 감도 있다.

전작에 비해 한국 관객이 압도적으로 적은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빅쇼트>의 소재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그래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부통령 '딕 체니'는 그가 움직인 미국 정치가 실제로 한국에 끼친 영향에 비해 다수 한국인들이 관심을 가지긴 어려울 거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의 농도나 특유의 편집 스타일이 만들어내는 리듬감 등은 오히려 전작보다 낫다고 느껴지는 바, 딕 체니와 조지 부시를 열렬히 지지하던 이가 아니라면 가볍게 봐도 재미있을 듯.


33. 행복한 라짜로 Lazzaro felice (2018)

포스터에 보이는 선한 얼굴의 청년이 주인공 '라짜로'다. 저 신비롭고 선한 얼굴이 포스터에서부터 마술처럼 시선을 끌어당기는데, 영화에서도 사실상 그 매력이 영화의 메시지와 인상을 모두 채운다.


영화가 시작하면 1970년대의 고전영화를 재개봉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화면 속 사람들, 풍경, 그리고 필름의 질감까지 시간감이 느껴지지만 놀랍게도 2018년작이 맞다. 후반부로 가면 현대 이탈리아 도시가 나오고 스마트폰을 쓰는 장면들도 나오는데 오히려 그런 모습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고전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동시대 영화 같지 않은 시간감은 시각적 요소들 뿐 아니라, 연출 스타일, 편집과 앵글, 오디오에서까지 느껴진다. 덕분에 기술적으로 뒤떨어진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사건과 인물의 행동들에 큰 개연성이 없고, 극적인 서사도 없다. 상징과 비유로 가득한 우화이지만, 또 일일이 해석을 달 수 있을 만큼 그 상징들이 치밀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 보고 나서 저 '라짜로'의 얼굴과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면서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낸다. 자꾸 떠오르고 생각난다. 영화를 보고 있을 때보다 끝나고 난 뒤에 더 오랫동안 그 힘이 느껴지는 영화다.

우화는 우화로서 보고 마음에 담으면 된다. 애써 하나하나 해석하고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좋겠다.


'라짜로'는 성경의 인물로,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시킨 대표적인 이름이다. 한국 성경에서는 '나사로', 혹은 '라자로' 등으로 번역된다. 현대의학에서 사망선고를 받은 환자가 드물게 다시 생명활동을 보이는 사례가 존재하는데, 이 이름을 따서 '라자루스 신드롬(Lazarus syndrom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4. 가버나움 Capernaum (2018)

<행복한 라짜로>와 함께 성경 속 이름을 딴 또 다른 영화. 성경의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기적을 행한 지역 중 하나의 지명이다. 기적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자 예수께서 그곳의 몰락을 예언한다.

영화 속 '가버나움'은 신이 버린 곳.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 레바논 빈곤층의 삶을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신이 가장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주인공 '자인' 역의 배우는 본인의 이름도 '자인'이다. 그의 첫 영화기도 하다. 감독은 배우들을 실제 레바논의 난민들로 캐스팅했다. 때문에 배우들이 추방에 대한 염려와 가난을 연기하는 동안, 실제로 체포되어 추방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삶은 재구성이 조금 들어가 있을 뿐 실제 삶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 그래서인지 연기를 배운 적이 없는 배우들의 연기는 전혀 위화감이 없이 강력하고 생생하다.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할 때, 빈곤을 묘사한 장면들에 관객들이 가슴 아파하던 중, 그 열악한 주택에 등장한 커다란 바퀴벌레가 화면에 잡히자 비로소 객석 곳곳에서 '진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리 찢어지는 가난을 보며 공감한다고 생각한들,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는 공포는 바퀴벌레 정도라는 뜻 같았다.


35. 트루스 Truth (2015)

2004년 부시의 대통령 재선 캠페인 당시, 그의 군 복무 비리 의혹을 보도한 CBS의 뉴스 프로듀서와 메인 앵커의 저널리즘 투쟁기.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실제 사건 자체가 한국에서는 생소한 편이고, 사건의 전개도 엄청나게 드라마틱하진 않아서 그랬는지 영화 자체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지난할 수 있는 소재의 디테일 속에서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을 꼼꼼하게 다루어 장면마다 성찰을 제공한다. 언론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후회하지 않을 영화.

케이트 블란쳇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묵직한 열연을 감상하는 재미는 덤이다.


36. 뱅뱅클럽 The Bang Bang Club (2010)

<트루스>가 TV 뉴스의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을 다룬 영화라면, <뱅뱅클럽>은 드물게 사진 저널리즘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다. 역시 실화 기반.


사진 저널리즘의 윤리에 대해 지나가다 귓등으로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독수리와 아이'라고 불리는 사진은 반드시 봤을 것이다. 기아를 견디지 못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을 힘 없이 바닥에 늘어뜨린 흑인 소녀와, 마치 소녀의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를 지켜보는 독수리의 사진.

퓰리처 상을 수상한 이 사진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찍은 기자의 이름은 '케빈 카터'다. 강렬한 사진이 낳은 논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케빈 카터'의 개인사까지 엮여, 단일 사진으로서는 아마 가장 많은 오해와 루머를 낳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 사진을 찍은 케빈 카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실태를 취재하고 고발하는 사진가 모임 '뱅뱅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사진 기자로서 이들의 고민과 삶을 그린 영화다. 물론 문제의 그 '수단의 굶주린 소녀' 이야기도 영화 속에 재현되어 있다.


뉴스를 다루는 매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시각 미디어의 비중까지 덩달아 커지면서 사진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은 영화가 그리는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아니, 깊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쏟아지는 기사 사진의 홍수 속에서 점점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디어를 다룬 수전 손택의 저서 '사진에 대하여', '타인의 고통'과 함께 사진 저널리즘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보면 좋을 영화. 혹은, 그 고민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입문용으로 활용하면 딱 좋을 영화.


37. 브루클린 Brooklyn (2015)

작품의 내용과 상관없이 이 사람이 출연한다고 하면 무조건 챙겨보게 만드는 배우가 적지만 몇 있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 '시얼샤 로넌'이 그중 단연 첫 번째다. 르네상스 회화 속 여인들의 얼굴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그의 고전적이면서도 신비한 외모는, 일견 다부져 보이지만 아주 섬세한 감정들이 새겨져 있다. 게다가 배우의 매력만으로 영화를 고르는 것이 성급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잠재우듯, 작품을 고르는 안목도 놀랍다. 그가 출연한 영화라면 그냥 믿고 봐도 대체로 좋다.


<브루클린>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는 이들이 브루클린에 정착하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김영하의 최근 저서 '여행의 이유'에는 영국이 케냐를 식민 지배하던 시절, 어느 마사이 족장의 총명한 아들을 발견한 케냐 총독이 그를 케임브리지에서 유학하도록 한 이야기가 나온다. 족장의 입장에서도 아들이 신문물을 배우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 기꺼이 보내지만, 몇 년이 지나 돌아온 아들은 유목생활을 하는 부족의 거주지를 찾아오는 방법조차 잊어버릴 만큼 달라져 버린다. 그는 다시는 마사이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브루클린>은 '안주'와 '떠남', 그 사이의 방황과 변화에 대해 세심하게 다룬 영화다. 이렇게 말하면 꽤나 철학적인 냄새가 나지만 실제 내용은 막장 드라마에 더 가깝다. 치정으로 치환된 '정착'에 대한 고민은 시얼샤 로넌의 세심한 감정연기를 따라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배우 본인이 아일랜드 출신이기 때문에 그 정서를 더욱 잘 담아낸 듯하다.

1950년대 뉴욕을 재현한 우수한 미술과 음악은 또 다른 즐거움.


38. 레이디 버드 Lady Bird (2017)

솔직히 이 리스트에 들어오기엔 꽤 잘 알려진 영화이긴 하다. 앞서의 <브루클린> 뒤에 그냥 시얼샤 로넌에 대한 사심으로 붙여봤다. 그의 주연작 중에서도 너무 사랑하는 영화. 언뜻 포스터만 봤을 땐 배우의 외관부터 제목 폰트까지 근대 유럽을 다룬 시대극 같지만 2002년 캘리포니아 소녀의 성장드라마다.

10대 여성이 관계와 성찰 속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종류의 성장영화는 한국의 비주류 영화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영화들이 대체로 무겁고 습기를 많이 머금은 반면 <레이디 버드>는 비슷한 주제를 훨씬 귀엽고 발랄한 톤으로 풀어낸다. 그럼에도 성장에 대한 이야기가 결코 얕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


감독인 그레타 거윅은 자신이 주연으로 출연한 <프란시스 하>에서 역시 여성의 성장을 연기하며 큰 울림을 만들어 냈는데, <레이디 버드>에서는 같은 주제를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시얼샤 로넌을 페르소나로 세웠다. 그레타 거윅의 첫 연출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둘의 감각이 만나는 화학작용은 두고두고 기억할만하다.


39.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 (2016)

<레이디 버드>의 감독 그레타 거윅의 배우로서의 매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얼샤 로넌과 더불어 챙겨보는 배우 엘르 패닝의 매력이 잘 보이는 작품이기도.

<우리의 20세기> 역시 성장 드라마인데, 이번엔 1979년 사춘기 소년의 시선이다. 그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여성들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들. 영어 원제가 <20세기 여인들>인 만큼 이 여성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인생, 성, 사랑, 자유, 사회, 예술에 대한 고민들이 1970년대 말이라는 시대의 독특한 분위기와 함께 어우러져 인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의 20세기>로 번역된 제목이 원제의 '여성'을 지워버린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 속에서 성장하는 주체로서의 화자는 10대 소년이니 번역 제목도 영화를 오독하진 않았다. <20세기 여인들>이라고 읽으면 마치 주인공 제이미의 시선에서 바라본 그의 여인들 같은 느낌이 드는데, 한국 관객들은 상대적으로 제이미를 동일시하기 어려울 테니 오히려 제3자의 느낌이 더 나는 <우리의 20세기>가 나을지도. 심지어 저항과 히피의 시대였던 미국의 1970년대를 대표하는 저 세 여인은 동시대 한국의 다수 관객들의 기준에서도 오히려 더 급진적으로 느껴진다. 40년 전 얘긴데.


병렬적인 성장드라마인 만큼 극적인 서사는 없다. 하지만 개성 강한 배우들 각각의 색깔과 함께, 70년대 미국을 재현한 감각적인 미술, 영화의 색감, 독특한 시각 연출 등이 어우러져 무엇보다 눈이 즐거운 영화. 40년 전 미국의 여인들이 던지는 화두가 오늘의 한국을 사는 나에게 질문이 되는 메시지는 덤이다.


영화의 비주얼은 훌륭한데, 정작 미국판 포스터는 좀 심심해 보인다. 드물게 한국판 포스터가 더 예뻐 보이는 영화. 포스터도 20세기 스타일을 살리느라 그렇게 만들었나.


40.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The Favourite (2018)

시대 속 여성들의 이야기라면 이 쪽도 재미있다. 시대도 20세기에서 18세기 여인들로 올라간다. 훨씬 더 자극적이기도 하다.

왕이 아닌 여왕이 통치하는 근대 영국. 절대권력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신경증에 시달리는 여왕과, 그의 총애를 얻기 위한 두 여인의 정말이지 치열한 암투를 그린 영화.


역시나 미술이 훌륭하고, 카메라를 활용하는 방식도 독특해 촬영에 관심이 있다면 눈 여겨볼만하다. 왕실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차분하고 묵직한 톤의 연기와 연출이 이어지는 가운데 곳곳에 유머가 쉼 없이 배치되어 있다. 그 유머란 것도 왕실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인간 군상들의 노력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 많다. 유머와 함께 인물들의 감정의 낙폭도 엄청나게 큰 영화인데, 역시 차분한 왕실의 분위기와 연출 톤 덕분에 꾹꾹 눌러 담은 감정들이 더욱 격렬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되게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영화인데, 전체적으로 점잖을 빼는 듯한 연출 덕분에 더 기묘한 재미가 느껴진다.


눈에 띄는 독특한 구성 방식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서 극 중 인물들의 대사로 챕터를 나누는 방식이 몹시 매력적으로 느껴져 내가 연출했던 방송 <가시나들>에 차용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가시나들>에 출연했던 배우 문소리 씨와 방송을 준비하며 이야기를 자주 나눌 때, 이 영화의 올리비아 콜맨의 연기를 보고 자신의 배우 인생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고민했다는 얘길 할 정도였다. 과연 콜맨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레이첼 와이즈, 그리고 매번 똑같은 연기를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엠마 스톤의 연기도 훌륭하다. 꼭 보시길.


41. 미스 프레지던트 Mis President (2017)

<더 페이버릿>이 영국의 절대권력인 여왕을 다뤘다면 <미스 프레지던트>는 한국의 권력인 공주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정확히는 그 공주 박근혜와 그의 아버지 박정희를 추앙하는 '박사모'를 따라다니며 관찰한 다큐멘터리.

박사모의 신앙은 이미 한국의 대다수 상식인들에게는 아예 상식 밖 논외의 영역으로 쫓겨난 지 오래지만, 이 영화는 그런 태도가 위험하다는 듯 정성스레 그들을 쫓는다.


김재환 감독님의 다큐멘터리들을 대부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작품. 자세한 리뷰는 이 블로그의 다른 글(https://brunch.co.kr/@kwsungmin/7)에서 다루었다. 내 블로그에서 가장 많이 읽힌 글이기도 하니 여기서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듯.


42. 초콜렛 도넛 Any day now (2012)

게이 커플이 한 아이의 양육권을 얻기 위해 법정 투쟁을 벌이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여기까진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한 서사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양육권을 얻으려는 아이는 생모가 마약중독자라 방치되어 온 다운증후군 환자이며, 그 양육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 싸우는 주인공은 스트립 바에서 여장을 한 채 여가수들의 노래를 립싱크하며 춤을 추는 드랙퀸이라는 요소가 더해진다.

영화적으로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영화다. 양육권을 가지려는 부부의 법정 싸움을 정공법대로 무리 없이 잘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비교적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도 그 주체가 소수자라면, 그것도 그 소수자성이 겹겹이 쌓인 이들이라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감독은 결국 이 이야기는 성소수자라서, 장애인이라서, 흑인 또는 백인이라서, 빈곤층이라서만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관계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이 소수자이고 장애인기 때문에 모두가 공감할 그 관계를 누리지 못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극 중 여장을 하고 립싱크 공연을 하는 주인공 루니는, 퀴어 영화가 낯선 사람들도 금방 거부감을 거둘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를 연기한 배우 알란 커밍 역시 실제로 커밍아웃한 게이이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의 팬이라면 시리즈 내 가장 인상적인 뮤턴트 중 하나로 꼽을 <엑스맨 2>의 '나이트 크롤러'를 연기한 배우이기도 하다. <엑스맨>에서도 그는 다르게 태어난, 뮤턴트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가장 배척당하는 인물을 연기한 것이다.


43. 나의 산티아고 Ich bin dann mal weg (2015)

독일의 잘 나가던 코미디언이 과로로 쓰러지고 난 뒤, 다시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난다는 이야기다.

설정을 듣고 할 수 있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적당한 코미디를 동반한 로드무비이자 성장영화다. 앞서 언급했던 <와일드>와는 비슷한 소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영화.

명작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떤 영화들은 때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체험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함께 산티아고 순례자 길을 걸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큰 욕심 없이 담담하게 이어지는 화면은 산티아고를 걷는 이들의 모습과 마음을 조심스럽게 잘 전달한다.


로드무비의 욕심을 내느라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연출을 더한다든지 과한 의미부여를 하는 느낌은 없다. 속물인 주인공은 순례길을 걷다가 지쳐 택시를 잡아 타기도 하고, 지저분한 알베르게가 싫어 순례길을 벗어나 호텔에 머무르기도 한다. 이렇게 환상 밖 진짜 산티아고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을 영화.


44.로마 Roma (2018)

이 영화 역시 그 명성에 비해 '왓챠'에 등록된 평가자가 적어 의외라고 생각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드라마는 대체로 수작이 많은 반면 영화는 거의 실망스러워서 점점 기대감이 사라지고 있었는데, 그나마 유일하게 놀라웠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처럼 아무 정보 없이 이 영화를 보면 당황스러울 지점이 있는데, 영화의 배경은 이탈리아 로마가 아니라 1970년대 멕시코시티의 '로마'라는 지역이다. 영어권 화자들은 제목이 Rome이 아니라 헷갈릴 일이 없겠지만, 한국의 관객들은 저 영어 제목을 봐도 그냥 대충 봤다가는 오해하기 십상이다.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들이 전반적으로 정돈된 앵글과 긴 컷을 활용하지만, <로마>에서는 유독 그런 경향이 강해 극영화라기보다는 사진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 많을 정도다. 그 정도로 '동화상(動畫像)'으로서의 영화의 매력보다는, 한 컷 한 컷의 회화적 예술성이 극대화 되어 있다. 아무 장면이나 캡처해서 액자에 넣어도 충분히 독립된 사진작품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절제된 시각적 예술성이 감탄을 자아낸다.


반면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시대와 개인의 인생이 맞물리며 느껴지는 고통을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로서는 충분히 깊이 있다. 다만 이 작품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란 말을 들으면 좀 기분이 묘하다. 영화는 멕시코의 중산층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클레오'를 중심으로, 나아가서는 '클레오'를 데리고 있는 그 집의 사모님 '소피아'와의 여성으로서의 연대를 감동적인 서사로 그린다. 여기서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감독의 위치는 그 중산층 집안의 아들인 것이다.

가정부를 둘씩 데리고 살던 중산층 집안 아이의 눈으로 본 보모이자 가정부의 고통은 어떤 것일까 나로서는 상상이 잘 안 간다. 시대적, 문화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신분제의 구조는 묘한 불편함을 낳는데, 그 서사를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감독 자신이 그 구조의 지배층이었다는 사실은 뭔가 영화의 맛에 소금을 살짝 섞어 넣는 느낌이다.

오늘 날의 베이비 시터도 아닌, 신분의 차이가 명확하게 규정된 구조에서 중산층 아이가 보모에게 느끼는 감정이란 절대적일 것 같다는 상상도 든다. 부모로부터 느끼는 두려움이 완벽히 제거된 보호자. 할머니나 할아버지 손에 자란 이들도 자신을 양육해준 조부모에게 비슷한 종류의 감정을 느끼지만, 이 신분제 보모의 경우는 조부모에게 존재하는 권위조차 없다. 절대적인 내 편이자 무해한 존재로서의 양육자에게 느끼는 감정이란, 나로서는 공감할 수 없지만 어쩌면 상상 이상으로 아득하고 그리운 호의의 원형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이 감독은 <칠드런 오브 맨>에서도, <그래비티>에서도, <로마>에 이르기까지 출산이라는 상징에 끊임없는 애정을 보인다. 자기가 애를 낳을 수 있었으면 안 그랬을까. 안 그래도 <로마>에서는 애 안 낳는 놈들이 온갖 망나니짓은 다하고 다니는데.

작가의 이전글 용감한 애, 똑똑한 애, 힘센 애, 여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