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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Sep 24. 2017

감정, 그들을 이해하는 방법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와 박사모


예쁜 포스터를 보면 살짝 헷갈릴 수도 있는데, <트루맛쇼>, <MB의 추억>, <쿼바디스>로 이어지는 김재환 감독님의 전작들을 보면 어떤 영화인 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혹시나 헷갈릴까봐 박아놓은 포스터 상단의 영제는 'Mis-'프레지던트다. 'Miss'가 아니라.


이 영화의 가장 난감한 점은 여기 있다. 'Mis-'라는 접두사가 '나쁜, 잘못된' 의 의미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그걸 알 수 있는 이라면 저 예쁜 포스터에 쓰여있는 카피, '죽을 만큼 사랑합니다'의 과장된 비장미 역시 캐치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헷갈릴 수 밖에 없다. 이 영화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그래서 심각한 오독들이 기다리고 있다.


지나치게 똑똑한 영화. 카메라는 세 명의 박사모 회원들을 따라간다. 오직 이들의 언어로 박정희와 육영수에 대한 평가를 듣고, 이들의 시선으로 박근혜의 당선과 탄핵을 비춘다. 이들에게 박정희와 육영수는 어떤 존재인지, 그래서 박근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에 대한 어떤 객관적 평가도 삽입하지 않는다.

박근혜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을 이들의 시선으로 함께 지켜보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 역시 <PD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이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적이 있다. (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57476, 이 글은 이후 밝혀진 뉴스들을 더해 수정을 거쳐 책에도 실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고민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들의 관점을 체험하게 해준다. 애초에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들이 '어떤 감정'을 '어떤 강도'로 느끼냐는 것이다.


섭외 또한 몹시 영리하다. 사실 그동안 미디어와 일상에서 마주치는 박사모 회원들의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어쩜 인상도 하나같이 그렇게 사나운지. 특정한 성향과 상관관계가 있는 외모나 스타일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그렇지 않다. 선한 눈매와 푸근한 인상. 박근혜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만나도 그저 속상해할 뿐이다. 박정희가 깔아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유생 노인은 그 모든 열기가 낯설었다. 시외버스에도 망건을 두르고 두루마기를 걸치고 오르는 이가 평생 무슨 집회에 참석할 일이 있었을까. 거친 구호와 결기가 가득한 곳에 어색하게 서있던 노인은 그래도 박근혜를 사랑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태극기를 흔든다.
이런 장면들이 쌓이다가, 마지막 이정미 재판관의 선고문 낭독 위로 이를 듣고있는 세 사람이 표정이 지나갈 때, 우리는 완벽하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지나치게 똑똑하다'는 건 이 지점이다. 적당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박씨 가족을 신격화하는 이들의 신앙은 건조하게 비추어도 충분히 이상하다. 박정희 추모식에서 '박근혜 탄핵' 피켓을 든 이에게 광분하는 박사모 회원들이나, 탄기국 집회의 비이성적인 모습들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 자체로 이미 평가가 된다. 이 모든 평가는 이미 우리가 알고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이들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묻기 위해 이들의 감정을 체험케 한다.


'영화적으로는' 평가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초라한 탄기국 집회와 거대한 촛불집회 현장의 교차편집,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근혜가 탄핵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구성, 심지어 박근혜의 당선을 보여주는 동안 깔리는 불길한 음악은 너무 선명한 감독의 평가다. '영화의 의도를 감안했을 때 이렇게까지 주관적인 음악이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런 '영화적 평가'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로부터는 심각한 오독이 나온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시사회가 끝난 자리에서 객석에 마이크를 건네자 당황스런 반응이 연달아 나왔다.

첫번째 오독은 영화를 완전히 반대로 이해한 것. 어느 중년의 관객이 화가 잔뜩 난 채 마이크를 쥐길래, 나는 '아 박사모 쪽도 초대했다더니 올게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웬 걸. 마이크를 쥔 관객은 매우 분노한 목소리로 '나는 이 영화가 최소한의 중립은 지켜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박정희가 우릴 먹여살렸다는 얘기만 들려줄 수 있느냐. 이런 영화는 절대 나와서는 안 된다'며 씩씩거렸다.

두번째 오독은 완전한 우월자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것. 시사회를 주최한 단체는 영화 속에 등장한 노인들을 언급하며 여러차례 '불쌍하다'는 단어를 사용했다.

물론 자신들의 세계를 구성하던 신앙체계가 붕괴되었고, 그로 인해 거대한 좌절을 경험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불쌍한' 감정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이들을 그저 '이상하고 비이성적인' 사람들로 치부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관계해나갈 것인가를 묻고자 했다.
애초에 이들이 나고 자란 시대를 이해한다면 그 신앙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감독님이 몇차례 시사회를 가지는 동안, 특별히 박정희-박근혜에 대한 지지성향이 없는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60대 관객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영화 속에 자신들의 삶이 투영되었다며.


영화가 대단히 불친절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와 함께 관람한 젊은 지인들을 비롯한 대부분은 감독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상영이 끝나고 몇 차례 주어진 관객들의 발언은 전부 저 두 가지 오독의 하나였고, 주로 두 번째가 더 많았다. 오죽했으면 감독의 발언은 예정에 없었음에도 참다못한 감독님이 마이크를 가져와 직접 자신의 영화를 설명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을까.


개봉 전 시사회부터 이랬으니, 개봉 이후에는 더욱 수많은 오독을 낳을 것이고, 어쩌면 양쪽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좀 더 선명했어야 했다, 좀 더 친절했어야 했다, 벌써부터 어떤 이야기들이 들릴지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영화다. 꼭 필요한 영화다. 이 총대를 멘 감독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박사모의 신앙은 존중 받을 필요도 없고, 동의해 줄 필요는 더더욱 없지만, 이들의 삶은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들 역시 이 사회의 구성원이고, 이들 세대를 관통하는 주류 정서가 이것이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은 이 신앙을 '감정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감정의 체험은 놀랍다. 그동안 도의적으로 해왔던 고민을 전혀 다른 지점에서 시작하도록 돕는다. 말했듯 이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할 지 고민하고 싶다면 이 감정을 알았어야 했다.


영화의 시작에는 수면에 비친 박정희 동상이 등장한다. 거꾸로 뒤집혀있던 이 반영은 영화가 끝날 때는 똑바로 선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결에 파문이 일어 한참을 어지럽게 일렁이다가, 수면이 잠잠해질수록 다시 온전한 상을 되찾는다.
촛불이 뜨겁게 타오르고, 정권이 바뀐 지금 이 신앙은 잠시 수그러든 것 같지만, 이 물결이 잠잠해지고 나면 반드시 다시 온전한 상을 찾을 것이다. 뜨겁게 달구어졌다가 식은 쇠처럼, 그때는 어쩌면 더욱 단단해질 지도 모른다.

나 역시 정권이 바뀌었기에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이 영화를 보았다. 아직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였다면 과연 이 영화를 직시할 수 있었을까. 아니 개봉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견디기 어려울 만큼 괴로운 날이 다시 오기 전에, 지금 직면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독이든 논란이든, 많이많이 낳고 많이많이 시끄러워지면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영화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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