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옆 테이블에 여자와 남자가 앉아있다. 연배는 많아봐야 이십대 중반. 흐르는 텐션이 연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친구는 더욱 아니다. 소개팅이다. 소개팅의 그 묘한 텐션은 사소한 한마디마저 이상하게 귀를 파고들게 하는 힘이 있다. 남자는 시종일관 시덥잖은 농을 던지고 여자는 때마다 목젖을 보이며 까르르 웃는다. 아니다. 웃어준다. 웃어주고 있다. 왜 사냐건 웃지요. 본래 대답할 말이 변변찮을 때는 그냥 웃는 게 제일 쓸 만하다. 조금만 귀 기울이면 여자의 웃음이 비어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요령이 좋은 사람이다. 마주앉은 남자는 그걸 모른다. 세상 다 알아도 그만 모를 기세다. 남자는 지금 한껏 도취되어 있다. 이번엔 성공적이야.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애프터는 없을 것 같다.
장면 둘. 요즘 영 마음이 안 좋은 친구를 데리고 카페에 왔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눈에 띄는 가까운 카페에 서둘러 들어섰다. 진정하고 앉아서 차분히 얘기하자. 되는대로 음료를 두 잔 시키고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넋두리가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 아차. 카페는 캠퍼스 앞인데 지금은 기말고사 기간인 모양이다. 손바닥만 한 조그만 카페에 전부 책을 펴고 앉아 공부하는 사람들뿐이다. 들리는 소리라곤 사각사각 필기하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그리고 내 앞에 앉은 친구의 말소리가 전부다. 카페는 도서관이 아니니 아무도 우리를 나무라진 못하고 있지만, 원하든 아니든 책보다는 이쪽에 온신경이 다 모일 게 뻔한데. 이 구구절절한 넋두리를 다 같이 듣는 게 저들 입장에서도 우리 입장에서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터. 이 기묘한 전체공개에 친구의 목소리에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어 미안해하던 차에, 아이고 이런, 이 친구 울기 시작한다. 이 친구의 내밀한 속사정은 오늘 이 카페 손님들과 다 함께 비밀로 간직하기로 하자.
장면 셋. 남자 혼자 앉아있다. 꽤 오래 혼자인데, 음료만 한 잔 놓인 테이블에 책 한 권 없이 내내 정자세인 걸 보니 누굴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여자가 와서 앉는다. 음료도 주문하지 않고 코트도 벗지 않는다. 내용은 들리지 않는 조용한 대화. 몇 마디 오가지 않은 것 같은데 여자는 금세 일어나 나간다. 남자는 계속 일어나지 않는다. 뒷모습이 우두커니 굳어있다. 무거운 공기가 느껴진다. 두 사람은 방금 이별한 것 같다. 남자는 울고 있을까.
카페와 연속극, 그 통속성
카페라는 공간은 묘하다. 수 사람이 모여와 깔깔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할 때도 찾지만, 대개는 마주보는 두 사람, 혹은 이것저것 읽을거리 쓸거리를 안고 온 혼자가 많다. 혼자 보내는 시간, 둘이 마주보는 시간. 충분히 내밀한 시간이다. 사람들은 여기 앉아서 꽤 자주, 내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공간은 전혀 내밀하지 않다. 벽은커녕 공간을 분리해주는 칸막이도 만나기 쉽지 않다. 이곳에서 공간의 구획은 그저 놓여있는 테이블들로 이루어질 뿐이다. 상호간의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데 익숙한 도시생활자들은 카페의 테이블이 정한 공간 구분을 기가 막히게 잘 따른다. 개인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은 카페의 혼잡도에 반비례한다.자리가 넉넉하게 많으면 설령 마음에 드는 자리라 해도 무리해서 누군가의 옆 테이블에 끼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놀라운 공간의 질서도 소리는, 시선은 어찌하지 못한다. 카페의 적당한 소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숨을 자리를 마련해 편안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 말은 동시에, 내가 내는 소리들도 그 백색소음의 일부가 되어 떠돈다는 얘기다. 무시하면 소음이지만, 귀 기울이면 그대로 이야기인 소리들. 그렇게 들리는 소리들만큼 통속적인 것이 또 있으랴.
통속적. 일상적이고 흔하다는 뜻이다. 이게 콘텐츠의 영역에 오면 의미가 좀 달라진다. 이 말이 가장 흔히 붙는 곳은 보통 일일연속극, 좀 더 자극적이면 ‘막장’이란 별명이 붙는 드라마 장르다. 수사물이니, 사극이니, 메디컬 드라마처럼 비교적 일상적이지 않은 장르에는 또 안 붙는다. 갑남을녀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문제로 다투고, 일가친척들과 갈등하는 정말 ‘일상적인’ 소재의 드라마가 ‘통속극’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일상적이고 흔한 이야기. 여기까진 원래의 뜻과 같다.
그런데 일상을 정말 일상처럼 다뤄서는 재미가 없으니, 드라마 속의 일상은 이리저리 꼬일 때가 많다. 시대의 윤리규범을 공유하는 시청자에게는 ‘어머어머’ 소리가 나올 만큼 망측해지기도 한다. 이게 수사물이나 사극이면 충격이 덜하다. 그건 일상이 아니니까. 하지만 ‘통속극’에서는 막장이 된다. 여긴 당신들이 사는 세계와 같은 일상이라고 약속해놓은 마당이니까. 해서 통속극이란 말에는 어딘지 저속하다는 뉘앙스가 따라붙기 시작한다.
그 딱지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 점점 커진다. 보통 통속극의 예산은 적다. 제작기간도 넉넉하지 못하다. 당연히 막강한 예산을 들인 사전제작 미니시리즈의 퀄리티를 따라가긴 어렵다. 평이한 화면에 개연성 부족한 전개도 종종 등장한다. 소위 ‘게으른 연출’이라고 불리는 전개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통속극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엿듣기’다. 너무너무 중요한 대화를 하는 순간 마침 하필 그 얘기를 절대 들으면 안 되는 당사자나, 하필 너무너무 입이 싼 인물이 거길 지나간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일을 그렇게 친절하고 상세하게 말하지 않는데, 하필 이 순간만은 필요한 정보들을 꼬박꼬박 짚어가며 얘기한다. 엿듣기가 이루어지는 공간들도 그렇다. 그렇게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화장실까지 왔으면서 칸이 다 비었는지는 확인도 안한다든지, 대체 시공을 어떻게 한 건지 아무리 부잣집도 문짝마다 방음이 그리도 안 된다. 6평짜리 내 원룸도 문 너머에서 하는 얘기는 안 들리는데.
그리고 빼놓으면 서러운 곳이 역시나 카페다. 얼굴을 가리겠다고 선글라스까지 쓰고 올 정도로 조심스런 얘기를 왜 쇼윈도 훤한 카페에서 만나 한단 말인가. 차라리 칸막이 있는 이자카야라도 가지. 그 얘길 들어선 안 될 사람이 바로 뒷자리에 내내 앉아있는데도 모른다. 심지어 한 번씩 빼꼼 고개를 돌려 얼굴까지 확인하는데도.
그런데, 카페는 정말 그런 공간이다. 우리는 카페에서, 남이 들으면 곤란할만한 사적인 이야기들도 그냥 한다. 칸막이도 없이 테이블이 만드는 가상의 구분에 의지하며, 백색소음 속에 숨어들면서, 하나도 내밀하지 않은 공간에서 내밀한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나눈다. 그 얘길 절대 들으면 안 되는 사람이 한 테이블 건너에서 어설픈 선글라스를 쓰고 엿듣고 있다고 해도, 아마 대부분은 눈치 못 챌 거다. 통속극의 인물들처럼.
사실 개연성이야 훌륭한 내러티브 속에나 존재하는 거지, 우리 삶에는 그런 거 없다. 우연과 충동과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로 점철된 것이 일상이다. 흔한 일상이라는 원래 의미에 있어, 통속극이야말로 진정 통속적이다. 그래서 이토록 생명력이 길 수밖에. 우리에겐 그런 소소하고 때로 망측한 통속극의 즐거움도 필요하다. 그 어떤 웰메이드 드라마도, 통속적인 요소가 전혀 없이 공감을 얻기는 쉽지 않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더 테이블>이 비추는 장면은 더없이 통속적이다. 카페에서 나누는 네 번의 이야기. 어째 남이 들으면 안 될 말들 투성인데, 옆자리 앉은 손님도 카페 주인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오간다. 예쁘게 정제되어 있지만 잘 들어보면 내용도 통속극스럽다. 눈앞에 당사자를 두고 자꾸 찌라시 얘기를 꺼내는 속물근성은 물론이거니와, 결혼을 약속한 상대를 두고 거리낌 없이 불륜을 말하기도 한다. 애틋함과 진심으로 포장된 것 같지만, 사기결혼은 결국 사기결혼이다. 촉촉한 눈빛을 나누는 은희와 숙자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결혼 상대인 남자가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라고 생각해보자. 여전히 응원하고 싶을까. 먹먹한 진심과 파괴되는 삶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같은 이야기를 다룬 아침연속극이었어봐라. 막장소리 딱 나온다.
사실 이 영화의 매력은 거기 있다. 이토록 통속극스러운 장면, 이토록 통속극스러운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달라지는 숨소리의 결마저 느껴지는 섬세한 연기, 이를 미려하게 담아낸 연출 덕분일 거다. 물론 순간순간 CF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화사한 영상미도 빼놓을 수 없다. 유독 빛나는 여성 출연진들의 매력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재미있는 건, 이 빼어난 영상미가 또다시 통속극의 반전이라는 거다.
풀바바의 반전
풀바바. 드라마판에서 종종 쓰는 말이다. 풀샷-바스트샷-바스트샷의 줄임말로,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쇼트구성이자 가장 안일한 구성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어떤 장소에 있는지 보여주기 위한 풀샷, 그리고 서로 마주보는 방향의 안정적인 바스트샷 각각 하나씩. 바스트샷은 소위 어깨걸이라고, 말하는 사람 얼굴을 비출 때 반대편에서 듣고 있는 사람의 뒤통수와 어깨까지 살짝 걸어서 찍는 게 보통이다. 그야말로 ‘대화하는 두 사람’을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그림이자, 한편으로는 가장 지루한 그림이기도 하다.
안일해보이고 싶지 않은 연출자라면 어떻게든 풀바바는 피한다. 제일 좋은 방법은 대화하는 두 인물에게 또 다른 동선을 부여하는 것이다. 바쁘게 요리를 하거나 기계를 수리하며 대화를 한다든지, 여기서 얘기하다 저리로 이동하며 말을 이어나간다든지. 이러면 화면과 연기에 역동성이 살아나 심심하지 않아진다. 비단 영화 뿐 아니라 연극연기에서도 동선 연출은 기본적인 요소다. 멀뚱히 마주보고 서서 대화하는 장면은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어색하다. 연출자와 배우는 대사를 주고받는 동안 인물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움직일지를 고민한다.
이게 전혀 안 되는 장면이 바로 카페신이다. 좁은 의자에 앉아서, 마주보고 대화하는 두 인물. 할 수 있는 동작이라고는 잔을 들어 음료를 마시는 정도가 고작이다. 풀바바 말고는 달리 다른 앵글도 마땅치 않다. 관객은 오로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 말고는 달리 집중할 곳이 없다. 그저 대사들을 들려주기 위한 장면. 카페대화신도 ‘엿듣기’만큼이나 안일한 장치 취급을 받기 쉽다.
<더 테이블>은 70분 동안 풀바바다. 시작할 때 유진의 설레는 감정을 보여주는 줌인, 마지막에 혜경과 운철의 관계가 끝났음을 보여주는 무빙 정도가 카메라가 움직이는 거의 전부다. 중간 중간 인스타그램처럼 들어가는 예쁜 오브제의 인서트를 제외하면 영화의 쇼트는 전부 풀바바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안일함의 대명사인 이 풀바바로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비좁은 공간, 제한된 동선. 말했다시피 관객이 집중할 곳은 오로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뿐이다. 그래서 보인다. 미묘하게 움직이는 눈동자. 살짝 올라간 목소리. 뜻 없이 뱉는 것 같은 추임새의 무게.
그러고 보면 우리가 카페에서 나눈 대화들이 그랬다. 마주앉은 상대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움직일 때 마음도 따라 움직인다. 사소하게 바뀐 뉘앙스 하나에 온갖 단서를 붙여본다. 별 뜻 없이 뱉은 것 같은 추임새도 크게 들린다. 추임새에 뜻이 없었다면 없는 대로, 있었다면 있는 대로 생각할 게 많다. 전혀 내밀하지 않은 카페라는 공간이 테이블 하나로 좁혀졌을 때 그토록 내밀하게 여겨진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주앉은 상대의 바스트를 보느라 다른 앵글에 가질 관심이 없었으니까.
이토록 반짝반짝 통속적인
카페에서 엿듣게 되는 통속적인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통속극적인 풀바바의 앵글. <더 테이블>은 더없이 통속극 같은 영화다. 다만 그 통속성에 조용히 집중한다. 특별한 사건 하나 없이, 오로지 그 통속적인 대화에만 귀를 기울인다. 마주앉은 두 사람의 표정, 눈빛, 입술의 떨림까지 바스트샷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아낸다. 그리고 어떤 반짝거림을 마침내 건져낸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은 다시 우리의 일상이 된다. 마실 것 하나를 앞에 두고 눈앞의 사람이 세상 모든 순간인 것 같았던 그 모든 테이블이 된다. 내 옆자리에서 깔깔 웃던 소개팅의 두 사람, 우두커니 앉은 채 이별을 맞은 남자와 떠난 여자, 조용한 카페에서 끝내 눈물을 터뜨렸던 친구도 이 영화 속 카페 테이블에 잠시 앉았다 간 듯하다. 어딘가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그들은 그 순간을 떠올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