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운전사>와 <공범자들>
*영화 <택시운전사>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택시운전사>를 보러갔다. 송강호, 장훈, 광주. 그 오월에 직접 맞서 피 흘렸던 사람들의 이야기 대신, 푸른 눈의 목격자를 태웠던 택시 기사의 시선. 기대가 안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는 아쉬운 데가 많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다소 과장되어 연극적인 느낌이 답답했다. 딱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는 간결한 편집은 화면 속 감정을 오래 곱씹기 보다는, ‘이런 일이 있었으니 이런 감정을 느낀 것으로 치고’ 넘어가자 말하는 것 같았다. 시종일관 피사체와 거리를 두며 감정을 절제하던 카메라가 돌연 광주를 빠져나오는 택시의 뜨거운 추격전을 비출 때는 조금 뜨악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 영화의 만듦새는 답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쉬워도 오월 광주를 다룬 영화에 볼멘소리를 하기란 쉽지 않다. 카메라가 비추지 않아도 우리는 그 카메라 너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때문이다. 감정을 절제한 스크린은 피 한 방울 보여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선혈이 낭자한 금남로가 선연하다. 영화가 건너뛴 조각들은 스크린 밖에서 저절로 맞춰진다. 오월 광주는 그저 소재일 수 없다. 영화가 밝게 시작할수록 객석은 더 큰 슬픔을 준비하게 된다. 그것이 소설이든 영화든, 만드는 이도 보는 이도 늘 조심스러워지는 이유다.
그 조심스러움을 어루만지듯, 다행스럽게도 빛나는 장면을 만났다. 주인공 만섭은 힌츠페터를 광주에 남겨둔 채 10만 원을 목숨처럼 품고 도망치듯 광주를 떠난다. 차를 정비할 겸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그는 자신이 본 지옥도를 왜곡하는 신문기사를 만나고, 주문한 국수와 함께 나온 주먹밥을 보며 지옥도 속에서도 살아있던 온정을 떠올린다. 그 기억들을 씹어 삼키려는 듯 꾸역꾸역 국수를 밀어 넣는 표정이 커다란 화면에 비춰지는 순간, 영화의 모든 아쉬움은 한 번에 씻겨나간다.
그것은 부채감의 표정이었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니다. 내가 맞은 총칼이 아니요, 내 가족이 흘린 피가 아니다. 그러나 눈을 감아버릴 수 없는 사람, 돌아서 떠날 수 없는 사람의 표정이다. 어제까지도 만난 적 없는 그저 타인의 싸움을 마음에 떠안은 사람의 표정이다. 결국 포장도로 위로 흐르는 피를 향해 차를 돌리는 표정이다. 내게 이 영화는 이 표정 하나로 남았다. 광주시민이 아닌 주인공이 오월 광주를 목격하는 영화라면, 이 표정을 한 번 보여준 것으로 넘치게 충분하다. 송강호라는 배우의 힘을 질리도록 실감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 표정 왠지 익숙하다. 영화 말고 어디서 봤던 것 같다. 그게 어디였을까 며칠을 더듬다가 최승호 선배의 <공범자들> 시사회를 찾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여기였구나. 그 수많은 부채감의 표정들. MBC에서 내가 봤던 싸움의 표정들.
마이크를 뺏긴 채 유배지에서 세월호 오보를 만난 기자 선배의 표정. 파업을 이끌다 해직된 위원장을 바라보던 조합원들의 표정. 내가 해고 처분을 받았을 때 술잔을 앞에 두고 아이처럼 울던 또 다른 선배의 표정. 그 빚진 표정, 부채감의 표정들. 피가 흐르거나 총칼이 난무하지는 않았지만, 표정만큼은 국수를 삼키던 만섭의 것과 같았다.
이것은 부채감의 이야기다. 눈 감고 등 돌리면 없는 일 삼을 수 있는, 10만원으로 가려질 남의 일 앞에서 택시를 돌렸던 마음의 빚 이야기. 공정한 방송한다고 얻는 게 뭐라고, 조용히 월급 받으며 살 수 있는 평탄한 인생을 두고 목소리를 높였던 마음의 빚 이야기. 그 빚을 갚으려 고군분투하고, 그 빚을 다 갚지 못해 눈물 흘린 이야기.
<공범자들>의 감독 최승호 선배는 권위의식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 늘 소탈한 웃음에 상대를 존중하는 느긋한 목소리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격의 없이 대화하며 웃을 때는 까마득한 연차까지 잊고 ‘귀여우시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그런 선배도 부당한 권력을 이야기할 때면 그 큰 눈이 순간 싸늘할 정도로 번뜩인다. 좋은 어른. 내가 만나본 중 손에 꼽는 좋은 어른이다.
MBC의 공범자들은 하나 같이 그런 사람들만 괴롭혔다. 해고 되고, 쫓겨나고, 정직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푸근한 웃음을 가진 좋은 어른이었다. 마음이 약해서 거절을 못하는 사람일수록 앞장을 섰다. 남들 다 부담스러워하는데 나라도 나서야지 하는 이들이 십자가를 졌다. 그렇게 나선 이들일수록 포화를 맞았고, 충분히 잔잔해도 되었을 일상이 이리저리 구겨졌다. 싸움이 지난해질수록 삶은 궤도를 벗어났다. 마침내 공정방송을 되찾는다 해도 그렇게 흘러간 인생은 돌아오지 않는데. 5년 동안 참 많은 삶이 망가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던 내 표정도 꼭 같았을 것이다. 부채감의 표정. 빚진 마음. 어째서 저렇게 선한 이들의 삶만 골라서 망가뜨린 걸까. 어째서 저 수더분한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뛰어들었을까. 망가지는 방송 앞에서 눈감고 돌아서지 못해 부대낀 이들의 모습은, 이를 지켜보던 동료들 마음에 또 다시 빚을 더한다. 그리하여, 각자의 순간마다 택시를 돌린다.
<택시운전사>의 마지막에서 힌츠패터는 끝내 찾지 못한 ‘김사복’을 향해 신문기사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돈 없는 젊은 손님을 그냥 보내주던 만섭은 그 기사를 보며 ‘내가 고맙다’며 혼잣말로 응수한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그 오월의 광주에 갚지 못할 빚을 지고 살아온 것이다.
이것은 부채감의 이야기다. 내 것이 아닌 싸움, 내가 겪지 않아도 될 고통 앞에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 설령 당장은 서울을 향해 엑셀을 밟더라도, 언젠가 자신의 순간에 핸들을 다시 돌리는 것. 하다못해 돈이 부족한 젊은 손님이라도 도닥여 보내고, 광화문에 가는 손님을 즐겁게 태워가기라도 하는 것. 꾸역꾸역 씹어 삼키던 국수의 무게를 잊지 않는 것. 그렇게 광주는 기억될 것이고, 그렇게 공영방송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부채감의 표정을 차마 씻어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