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ake This Waltz> : 우리도 사랑일까
천국의 악몽 /
이른바 '모태신앙'인 나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나갔고, 늘 그랬듯이 교회에서도 뭐가 됐든 열심히 하는 꼬마였다.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매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모세의 기적 이야기, 다니엘과 세 친구 이야기만 듣다가 본격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만난 것은 일곱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여름성경학교에서 처음 만난, 그나마 교리라고 할 수 있었던 그 내용은 기독교 신앙의 아주 핵심이면서도 단순한 것이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고 영원히 산다."
그 말을 들었던 날 나는 집에 와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급기야는 그 날 이후로 한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영원히 산다는 그 말에 가슴이 짓눌려 견딜 수가 없었다. 고작 일곱 살 꼬마였지만 그래도 삶에 대한 개념이 어렴풋이나마 있었을 거다. 태어나고 자라 학교에 가고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어 결국엔 끝나는 생.
그런데 '영원히 산다'는 천국을 상상하니 그 끝이 그려지지가 않는다. 더구나 일곱살 소년이 그리는 천국의 이미지는 구름 위 올림푸스 신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옷 같지도 않은 후즐그레한 천을 걸치고, 허연 구름만 가득한 것 같은 그런 곳에서 끝도 보이지 않는 시간을 살아야 한다니. 망연하고 아득하고 까마득한 그 감각에 숨 쉴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밤에 자려고 누웠다가 숨이 막히는 기분에 눈물을 줄줄 흘리던 기억도 난다. 어떻게 그 답답함을 해결하고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은 천국을 그리는 이미지도, 영생에 대한 감각도 전혀 결을 달리해 신앙을 유지하는데는 그리 문제가 되진 않는다. 다만 여전히 '까마득함'이 주는 공포는, 그 어떤 것보다 깊숙이 내 폐부를 찌르곤 한다.
일곱 살 소년이 느꼈던 만큼은 아니지만, 머리가 꽤 굵어진 이후로도 불현듯 그 감각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리 피곤하지도 나른하지도 않은 밤 잘 시간이 되어 누웠을 때, 방 안의 그 어둠이 억겁의 우주라도 되는 것 마냥 까마득한 깊이로 덮쳐오는 순간.
내 존재가 까마득한 모래사장의 모래알 하나보다 더 하찮은 무게감으로 느껴지는 그 기분이, 머리가 아니라 온 몸 구석구석을 아찔하게 뒤덮어 버리는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그런 순간이 있다. 바닥이 혹은 천장이 아득하게 멀리 푸욱 꺼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
이런 형이상학적인 감각이 아닌, 조금 더 일상적인 경험으로 옮겨와도 유사한 느낌을 찾을 수는 있다. 이를테면 마주 앉은 사람과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 분명히 같은 단어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그이와 내 머릿속의 교집합을 찾기 위해 쉼없이 더듬거려야 할 때도 그런 까마득함을 느낀다.
군대에 처음 입대했을 때도 그 감각을 느꼈던 것 같다. 징병제라는 암울한 제도에 이끌려 온 수많은 청년들이, 권태로운 일상에 묻혀 미시적으로는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하는 그 생기 없는 모습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 역시 하루는 땅을 파고 그 다음 날은 그 구덩이를 다시 메우는, 그 무시무시한 무의미의 하루를 2년 동안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답답함에 온몸이 뒤틀리고 소스라칠 것 같았다.
그리고 모처럼 여유가 생겨, 즐겨찾던 극장의 상영관에 앉아 다시 그 감각을 느끼고 말았다. 마고가 30년 뒤 등대에서 다니엘과의 키스를 상상하는 장면에서. 아마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 순간 그녀가 느낀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그 까마득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상하기 그지없는 남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말았겠지.
일상의 감각 /
심리학에서 쓰는 이름 중에 '시간수축현상(Time Contraction)'이라는 말이 있다. 사견으로는 contraction를 '수축'보다는 '생략'으로 번역하면 더 적절할 것 같다. '시간생략현상'.
이 현상을 설명할 때 활용되는 가장 빈번한 예시는 마트에서 판매하는 세트상품에 대한 이야기다. 퇴근 후 고단했던 일상을 위로하는 디저트를 사러 마트에 갔을 때, 플레인 요거트 세 개들이 묶음과, 블루베리, 스트로베리 요거트가 함께 포함되어 있는 세 개들이 묶음을 만나면 사람들은 보통 여러가지가 섞여 있는 후자를 선택한다는 이야기이다. 설령 그이가 플레인 요거트를 좋아한다 해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플레인 요거트를 좋아하더라도 매일 똑같은 것만 먹으면 지겨울거야.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플레인 요거트가 들어있던 자리만 비어있는, 블루베리와 스트로베리 요거트들로 즐비한 냉장고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삶이란 것이 머릿속에서처럼 단순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마트에서 요거트 묶음을 살 때 그리는 미래에는 매일 요거트를 먹는 사건만이 한없이 강조되어 있다. 내일도 플레인 요거트를 먹고, 그 다음날도 플레인 요거트, 그 다음날도 플레인 요거트를 먹으면 분명 질릴거야.
하지만 실제로 살아보면, 회사에 출근해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고, 운전을 하고 샤워를 하고- 그리고 나서야 겨우 요거트 하나 뜯어 먹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올 테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 하루 종일 수많은 일들을 겪고난 뒤 비로소 집에 들어와 요거트를 먹을 수 있을 쯤에는, 이미 어제 먹었던 플레인 요거트의 맛은 커녕 그 사실조차 그리 선명치 않다. 질리기는 무슨, 오늘도 무심코 좋아하는 플레인 요거트를 집어든다.
'생략'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삶은 분류하기도 어려울만큼 수많은 종류의 사건들로, 혹은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만큼 사소한 행동과 시시한 시간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강하게 경험하면, 그 모든 사소함은 생략한 채 비슷한 강렬함만이 강조된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마치 앞으로의 삶은 그 사건들로만 가득차 있을 것처럼.
이별을 경험한 밤이면 떠나간 이와의 추억이 찌르는 듯 아파온다. 앞으로의 매일매일이, 매 순간들이 이 모든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픈 조각들로만 가득차 있을 것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배도 고프니 밥도 먹어야 하고, 양치도 해야하고, 화장실도 가야한다. 버스를 타면 카드도 찍어야 하고, 기왕이면 환승해서 가면 좋고, 집에 들어오면 휴대전화 배터리는 꼬박꼬박 충전해주어야 한다. 아프고 슬퍼도 또 아무 상관 없는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일도 생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안부를 물어야 할 일도 생긴다. 생각보다 내 일상에 그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구석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구석이 늘어가면서 상처는 저물기 마련이다.
생각이 많은 건 별로 좋지 않다. 물론 무엇인가 고찰하고, 탐구하고, 고민하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고민해서 얻은 씨앗을 삶에 심어, 일상에서 열매를 수확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생각들 속에만 빠져 일상의 감각을 잃게 되는 순간, 한 발 떨어져보면 절대 저지르지 않을 엉뚱한 실수에 이르기도 종종이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움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지극히 사소한 일상으로 도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구덩이 속에 있는 시간에는, 제 아무리 용기를 내어 미래를 그려봐도 수많은 구덩이들이 자꾸 눈에 띌 따름이다. 그럴 땐 일상의 감각 속에 피해 있어야 한다.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맛있는 걸 먹고, 물건을 사고. 잠시 동안은 '일생'을 살아갈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를 쌓아내는 생활인 뒤에 숨어있는 것. 그게 의외로 현명한 해답일 때가 많이 있다.
끝까지 남편과의 행복을 지키고자 했던 마고는, 트럭에 짐을 싣고 떠나는 다니엘의 뒷모습을 보며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2040년 8월 5일 오후 2시'라고 적혀있는 엽서의 등대를 본 순간, 그 날까지 이를 모든 미래가 오로지 지금 느끼는 강렬한 상실감으로만 채워지게 되리라는 공포에 빠져든다. 꿈결처럼 그려진 30년 뒤 그 날이 로맨틱한 영상미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헤어날 수 없는 상실감으로만 이어진 30년의 끝에 만날 허무한 달콤함이기 때문이었을 테다.
실은 그렇지 않았을 거다. 이제는 창문 너머로 다니엘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루의 다정한 장난기가 때론 무심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굳은 심지의 그가 주는 안정감은 분명 아늑한 데가 있다. 사랑을 속삭이는 대신 서로 그로테스크한 밀담을 주고 받는 시간은 그 강렬한 상실감을 금세 희석해주리라. 문득 외로워지는 밤이면, 잠든 남편 몰래 서랍을 열어 꺼내보는 엽서의 진한 그리움이 차라리 로맨틱하다. 그 정도의 정서적 외도는 충분히 눈감고 기다려줄만큼 루는 단단한 사람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순간 마고의 머릿속에 그려진 미래에는 이런 순간들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감은 눈 아래엔 떠나는 다니엘의 뒷모습, 2040년 8월 5일 2시의 키스, 그리고 그 30년 동안의 까마득한 '끼어있는' 시간들만이 그려졌다. 결국 마고는 애써 잠든 척하고 있는 루를 깨워 일으킨다. 슬픔과 자책감, 미안함을 모두 뒤로한 채 벅찬 가슴으로 다니엘을 향해 달려간다. 그 벅찬 발걸음은 또 다른 미래의 순간들만을 그리며 나머지는 모두 생략했으리라.
Take This Waltz /
영화는 정말 좋았다. 사라 폴리 감독은 그 세련된 외모만큼이나 멋진 연출을 보여준다. 감각과 감정을 어루만지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굉장히 많은 영화인데, 그 중에서도 마고와 다니엘이 마티니를 시켜놓고 마주앉아 있는 장면은 단연 백미다. 멀쩡하게 앉아서 대화를 하는 여주인공의 롱테이크 바스트샷이 그토록 관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미셸 윌리엄스의 미세한 연기와 연출이 함께 빚어낸,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장난기 넘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인력거를 타는 장면, 놀이기구를 타고 내리는 장면, 샤워실과 수영장, 유리창을 사이에 둔 두 사람, 계단에 나란히 앉아 안부를 묻는 두 사람 등, 말 한마디 보태지 않고 수많은 느낌들을 그토록 선연하게, 그러면서도 참 예쁘게 전달해내는 감독의 기지가 고마울 정도다.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까지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의 여운 또한 빼놓을 수 없이 진하다. 모두 영화가 아니면 만들어내기 힘든 정서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영화라는문법이 가지는 힘을 실감나게 해준다.
더 재미있는 것은, '영화의 보여주는 힘'을 그토록 잘 활용하던 그가 정작 영화의 메시지는 너무도 작위적일만큼 분명하게,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대사로 고스란히 전해버린다는 사실이다. 주제를 직접 말로 하는 영화는 관객의 수준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리만치 사라 폴리 감독이 제럴딘의 입을 빌려 말을 쏟아놓은 장면은 그리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되려 시원하기까지 하다. 섹슈얼리티에 관한한 내가 보수적인 편이기 때문인 걸까. 'Take This Waltz'가 흐르는 동안 빙글빙글 돌아가는 달리의 바큇수 만큼 자라난 내 안의 가려운 부분을, 제럴딘이 내뱉는 몇마디가 시원하게 긁어준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 애당초 왈츠는 격정적인 춤이 아니다. 지루할 만큼 규칙적으로 진행되는 음악에 맞추어, 두 사람이 그리 어렵지 않은 동작을 반복하기만 하면 멋드러지게 출 수 있는 춤이다. 하지만 왈츠를 조금이라도 즐겨본 사람은, 이 단조로운 음악 속에서도 어지간한 유행가 못지 않은 흥겨움을 풍성히 누릴 수 있다는 걸 깨달을 거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지치지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