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홈커밍>을 보고나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2>가 보고싶어져서 다시 찾아 보았다.
2004년에 개봉한 영화. 자그마치 13년 만에 다시 보니, 토비 맥과이어나 커스틴 던스트의 풋풋한 모습 말고도 정말 옛날 영화라는 느낌이 물씬 난다. 지금 같으면 절대 쓰지 않을 극단적인 클로즈업 줌, 화려한 화면 전환, 자연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는 다분히 연극적인 동선, 종래 웅장한 스코어 같은 것들이 정말 '옛날 연출'임을 끊임 없이 일깨워준다. 시종일관 난무하는 퀵줌은, 당시엔 정말 긴장감을 팍팍 채우는 연출이었지만 요즘은 SNL에서 과장된 연출로 웃길 때 쓰고 있으니 정말 격세지감이다. 2004년이 이렇게 옛날이었나.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만든 영화다. 지금까지도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물론이거니와 마블 원작의 히어로 영화들을 통틀어도 손꼽히는 수작이다. 액션신의 박진감은 <홈커밍>을 뛰어넘고, 의외로 13년 전의 CG도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지금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 CG기술의 발달은 이미 임계치에 이른 모양이다.
영화가 개봉했던 2004년에 나는 고3이었고, 영어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다만 팝송이며 원서들을 가지고 혼자 공부하는 걸로는 전혀 따라잡을 수 없는게 바로 '대화'였다. 해외경험이나 특별한 사교육 없이는 이건 정말 어려웠다. 일단 말할 상대가 있어야지.
다행히 학교에는 (한국말이라고는 전혀 배울 생각이 없는) 원어민 교사가 있었다. 정해진 수업시수 말고는 달리 업무도 없는 모양인지 늘 심심해보였기에, 나는 점심시간마다 그를 찾아가 말동무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정말 심심했던 모양이다. 그도 나를 용기있는 학생이라며 몹시 반가워해주었다. 남학교였던지라 점심시간마다 미모의 백인여성과 함께 다니는 모습은 곧잘 놀림거리가 되곤 했지만 내게는 정말 귀한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잘 못하면서 나름 민감한, 혹은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들을 참 많이도 했다. 부시 대통령과 이라크 전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한국에 와있는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주한미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물어보았다. 대답하기 곤란한 내용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영어수준을 배려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저그저 무난한 수준의 대답을 늘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나눴던 이야기 중에 하나가 저 <스파이더맨2>였다. 왜냐면 극장에서 저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내 눈에는 아시아인이 딱 두 번 보였거든. 하나는 거리에서 스파이더맨 노래를 부르는 우스꽝스러운 악사, 또 하나는 피터파커가 각성을 하는 계기로 화재현장에서 구해내는 가난한 가족. 차라리 아예 안나오면 모르겠는데 딱 이런 지점에만 아시아인을 넣는건 헐리우드가 보여주는 못된 편견 아니냐 물으니, 오 네 말이 맞다며 자신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너 매우 스마트한 학생이구나 대답했다. 당연히 네눈에는 안보였겠지.
이제 다시 보니까 두 번 더 나온다. 상대적으로 더 눈에 안 띄어서 기억에 안남았던 모양인데 하나는 옥박사의 실험 조수로 등장하는 '햄보칼수 없는 콰찐주'(반가웠다!)와, 옥박사가 괴물로 변해 끔살하는 병원 간호사 중 한 명. 고3때 극장에서 발견했던 두 번의 아시아인보다는 그래도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뭐, 심지어 흑인은 그 정도 비중으로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백인이긴하지만 여주인공인 메리제인은 내내 사랑타령만 하다가 시원하게 비명지르는 걸로 역할을 다하긴 한다. (그 역할을 정말 잘하긴 잘한다. 비명 잘 지르는 것도 서스펜스에서 중요한 역할이라고 한다면 커스틴 던스트의 메리제인은 내가 본 히어로 영화 중에 단연 탑이다. 비명소리가 정말 찰지다.)
13년 전 <스파이더맨2>보다 <홈커밍>에서 격세지감을 느낀 건, 되게 열심히 했네 싶을만큼 확보한 인종다양성이다. 피터파커의 주요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피터 혼자만 백인인데다, 아예 영화 도입부에서 '인디언'이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이 맞는 호칭이라는 대사로 시작한다. 여성캐릭터들도 훨씬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사실 뭐 노력해주면 좋긴 하겠지만, 콘텐츠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화이트워싱으로 매번 욕을 먹는 헐리우드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그래야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인 영화의 리스크가 줄어드는 것을. 게다가 현실이 정말 그렇다면 그걸 픽션에 그대로 반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2004년 스파이더맨을 만들때도 지금도, 뉴욕에 거주하는 아시아인들은 실제로 하층민이 많은게 사실이니까. <홈커밍>의 인종다양성도 그냥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을 뿐이다. 영화의 배경인 퀸즈 지역도, 피터가 다니는 과학계 학교도 실제로 비 백인 인구가 과반이 넘는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고3때의 나는 <스파이더맨2>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도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며 살고 싶은데, 아무리 열심히 해서 바다 건너 저 시장에 간다고 해도 절대 주류가 될 수는 없겠구나. 나는 이 세계에서는 영영 주변인이구나. '세계에서 이름을 날리겠어!'하는 야망 같은 건 딱히 품지 않았는데도 그냥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딱히 슬프지도 않았다. 그런 거지 뭐. 그땐 봉감독 같은 사람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런데도 13년이 지나 만난 <홈커밍>이 반가웠다. 대놓고 보라는 듯 다양한 인종의 캐릭터들이 어우러지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새삼스러울 만큼 자연스럽고 하나하나 매력적이었다. 콘텐츠가 꼭 정치적으로 올바를 필요는 없지만, 재미있으면서 그것까지 해주면 참 고마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