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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May 25. 2017

머나먼 여정, 쿠스코

페루여행 #2

짧지 않은 경유시간을 포함해 꼬박 24시간을 날아서 페루의 수도 리마에 도착했다.

이런 저런 나라들을 다니며 생긴 내 나름의 기준이 있다면, 어지간한 선진국이 아니라면 수도는 적당히 거른다는 거다. 특히 한창 개발 중인 나라는 곧 수도의 도시화가 진행 중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는 수도는 여행하기에 영 재미가 없다.

소득수준이 낮기 때문에 보통 시커먼 매연을 내뿜는 노후한 중고차를 수입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도로 사정 역시 좋지 않아 도로 위 흙먼지와 매연이 뒤섞인다. 덕분에 그 나라가 지구 어디에 붙어있는 지와 상관없이 도시화의 정도가 비슷하면 맡을 수 있는 냄새도 비슷하다. 자주 고장 나는 차와 열악한 도로 때문에 곳곳이 체증을 겪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 사이를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숙소에 돌아와 코를 풀면 시커먼 덩어리가 나오는 것도 똑같다.

도시화는 문화적으로도 꽤 획일적인 현상이다. 비슷한 지점을 지향한다. 그러니 더 발달된 도시 출신의 사람이 이런 도시를 찾으면 익숙하지만 덜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큰 도시가 제공하는 경험을 누리고 싶다면 개발단계가 끝난 나라를 찾는 게 낫다. 심지어 그런 나라들도 큰 도시에는 슬럼이 생기기 마련이니 치안 걱정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고유의 문화와 도시화가 섞이면서 나타나는 화학작용은 나라마다 다르고, 그 같은 듯 다른 도시들의 색깔을 누비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일 수 있다. 기왕 온 거 같은 듯 다른 거 말고 그냥 아예 확 다른 풍경을 누리고 싶은 내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어느 도시를 가도 꽤 비슷한 풍경을 만난다. 사진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사실 산업화가 진행 중인 나라에 이런 시선을 가지는 건 별로 예쁘지 않다.

맞다. 소득수준이 다르고 도시 인프라가 달라도 저마다의 문화는 저마다의 가치를 지닌다. 여기에 우열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위험하다. 혹자는 굳이 모든 국가가 산업화의 대열에 합류해야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면 그들이 가진 소중한 것들이 망가지지 않겠냐고. 어쩌겠는가, 그 사람들도 우리가 누리는 이 산업화의 열매들을 누리고 싶다는데. 누릴 것 다 누리고 있는 타자의 시선으로 보내는 우려는 오만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은 것들을 그들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만.

다만 어느 정도의 비현실로 도망쳐온 여행자에게 수도를 기피할 자유 정도는 허락해줘도 될 것 같다. 비행기 타고 와서까지 잘 먹고 잘살기 위한 치열함에서 한 발짝 벗어나고 싶다는데 뭐 그 정도야.


그런 이유로 리마는 들르지 않기로 했다. 이것저것 찾아봐도 리마의 볼거리라고 나오는 것들은 역시나 썩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어차피 페루로 날아온 목적은 마추픽추 하나였으니 아쉬움도 없다. 사실 그게 어떤 도시가 되었든 찬찬히 머무르며 둘러보면 여행은 그만한 대가를 주기 마련이다. 문제는 늘 시간이다. 한두 주 휴가를 내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직장인은 슬프다.

리마 도착시간으로부터 몇 시간 뒤에 바로 쿠스코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끊어두었다. 이미 긴 비행에 슬슬 피로가 쌓이기도 했고, 그리 무겁게 싸지도 않은 배낭이 가랑비 마냥 시나브로 어깨를 짓누른지 오래라 빨리 쿠스코에 도착해서 다 집어던져놓고 늘어져 한숨 푹 자고 싶은 마음만 커지고 있다.

국내선 터미널의 비행정보 안내판을 보니 곳곳에 딜레이가 보인다. 페루의 저가항공사들에게 한두 시간씩의 딜레이는 일상이라는 이야기는 놀랍지 않은 정보였기에 당황할 일은 아니다. 다행히도 내 쿠스코 행 비행기는 정시 출발인 모양이다. 시간에 맞춰 게이트로 가 서둘러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한 시간 반쯤 날아 쿠스코 공항에 착륙했다. 그래도 나름 페루의 관광수도인데, 어째 공항은 좀 초라해 보인다. 뭐 어때. 시골 버스터미널보다도 못한 허름한 공항도 많이 봤다.

음, 아니 초라한 게 문제가 아니라 뭔가 너무 황량하다. 이 유명한 관광도시가 이렇게 풍경이 아무것도 없나. 어느 도시나 공항은 중심지로부터 한참 벗어나 있으니 그런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황량한데. 어쨌든 뭔가 이국적인 풍경을 만나니 기분이 새로워진다. 일단 이 한 몸 푹 뉘일 수 있는 침대가 마침내 코앞이다. 다른 건 다 됐다.

공항 문을 나오니 늘 그렇듯 이름이 쓰인 종이를 든 마중꾼들과 호객하는 택시기사들이 보인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으레 만나는 가장 정신없는 순간이건만 초라한 공항의 규모만큼이나 여기도 비교적 한적해 보인다. 예약해놓은 숙소에서 보내주기로 한 픽업 서비스를 만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안 보인다. 몇 명 되지도 않는 사람들 속에서 못 찾고 있을 리는 없고, 조금 기다려 보기로 한다. 공항문 밖으로 발을 내밀 때부터 따라붙었던 택시기사는 계속 내 행선지를 묻는다. 픽업이 있다며 거절하기가 점점 민망해질 때쯤, 숙소에 전화를 걸어본다.


네, 오늘 거기 묵기로 한 권성민인데요, 보내주기로 한 픽업이 보이질 않네요.
그래요? 저희 기사는 아까부터 나가있었는데 당신이 안 보여서 나왔대요.

네? 한참 전부터 여기 나와 있었는데 못 봤는데요. 그럼 일단 그냥 택시를 타고 갈게요.


이 손바닥만 한 공항에서 뭐가 엇갈린 걸까. 아까부터 나를 태우려 계속 달라붙던 기사에게 다시 다가간다. 픽업이 있다고 계속 거절했는데 뭔가 민망하다. 기사는 진작 오지 그랬냐는 듯 의기양양하게 내가 보여주는 주소를 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떨떠름해진다.


여긴 쿠스코가 아냐.

응?

여긴 타크나야.

이게 무슨 소리야. 한 시간 반을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쿠스코가 아니라니. 허겁지겁 지도 앱을 켰다. 내 위치를 표시하니, 페루 끝자락에 황망한 동그라미가 찍힌다. 한참 멀리에 쿠스코라는 글자도 같이 보인다. 타크나에서 쿠스코까지는 530km. 으아아아아. 서울에서 후쿠오카까지의 거리다.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택시로 쿠스코까지 갈 수 있냐고 물어봤다. 안된대. 당연히 안 되지.

아니 버스도 지하철도 아니고 비행기를 잘못 탈수가 있나. 게이트에서 비행기 탈 때 티켓 검사도 분명히 했는데. 리마 공항에서의 장면들이 문득문득 스친다. 그러고 보니 내가 타려던 쿠스코 행 비행기 게이트에 앞 비행기가 연착돼서 사람들이 잔뜩 앉아있었다. 그 비행기가 내 출발시간이랑 겹쳤던 걸까. 어쩐지 아까 비행기에 앉아있는데 웬 할아버지가 와서 내 자리 맞냐고 물어보더라. 내 티켓을 보여줬더니 순순히 다른 자리에 가서 앉았는데 할아버지, 한 번만 더 이상해 해주지. 그럼 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공항으로 다시 들어가서 내가 타고 온 페루비안 항공사의 데스크로 갔다. 쿠스코 행선지가 적혀있는 티켓을 보여주며 나는 너희가 안내해주는 대로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지금 여기에 와있다고 따졌다. 직원들도 황당한 모양이다. 최대한 슬프고 지치고 우울한 표정으로 어쩔 거냐고 매달렸다. 어딘가에 전화를 몇 통화 하더니 쿠스코로 가는 비행기를 다시 제공해 주겠단다. 다만 타크나에서 쿠스코로 바로 가는 노선은 없어서, 다시 리마로 간 다음 거기서 쿠스코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한다고. 리마 행 비행기는 오늘 저녁, 쿠스코 행 비행기는 내일 새벽. 리마에 도착해서 쿠스코 비행기를 다시 체크인 할 때까지는 세시간 정도 밖에 차이가 안 나서 호텔 잡아달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이미 충분히 피곤했는데.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니가 안내방송 잘못 듣고 탄 걸 왜 우리한테 따지냐고 나왔으면 피곤해질 뻔 했다. 그래 솔직히 내 잘못도 있다. 분명 리마 공항에서는 영어로도 안내방송을 해줬으니까. 하지만 너희들의 영어 안내방송은 너무 알아듣기 힘든걸. 게다가 기차나 버스야 타고나서 옆자리 사람한테 ‘이거 부산가는 차 맞죠’ 물어볼 때도 있지만 비행기를 타서 ‘이거 쿠스코 가는 비행기 맞죠’는 좀 이상하잖아.

어쨌든 리마 행 비행기도 세 시간은 족히 남았다. 손바닥만 한 타크나 공항에서 시간을 보낼 곳이라고는 작지만 깔끔해 보이는 카페가 유일한 것 같다. 그래도 명색이 공항인데 외국인은 거의 찾지 않는 모양인지 어디에도 영어는 보이질 않는다. 몇 개월 속성으로 공부했던 스페인어로 아는 단어를 총동원해본다. 나머지는 문맥으로 때려 맞춘다. 왠지 페루에 있는 동안 스페인어 실력이 굉장히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반가워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 지.

주스, 스페인어로 후고를 한 잔 시켜놓고 책을 읽는다. 창밖으로 노을이 진다. 강제로 받은 거긴 하지만 페루에 발을 디디고 처음으로 뭔가 여유로운 기분은 든다. 목이 다시 부어오는 것 같고, 몸 구석구석 잔 근육까지 어서 누워 쉬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고, 앞자리에 벗어놓은 배낭은 왠지 점점 더 커 보이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기분은 여유롭다.

그래, 어째 출발하기 전부터 기분이 쎄하다 했다. 그 값이 이걸로 전부라면 다행이겠다.

기이한 노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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