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만두에서 만나 며칠을 함께 돌아다녔던 네팔인 다큐멘터리 감독 Jiban Bhai가 찍어준 사진.
여행지에서 사진은 무례하고 폭력적인 시선이 될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렌즈 너머의 낯선 이들과의 좋은 교감의 다리가 되기도 한다.
관광객들의 패러글라이딩을 구경하러 나온 산마을 주민들.
포카라(Pokhara) 사랑곶(Sarangkot)의 패러글라이딩장은 제법 유명한 곳인지라, 이제는 꽤 익숙한 풍경일 텐데도 좋은 구경거리인 모양이다.
네팔의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과일 포장마차.
눈 앞에서 갈아주는 즉석 과일 주스를 파는 곳도 많다.
카메라를 대자 상큼하게 얼짱 표정을 지어주는 염소.
저렇게 목에 종을 달고 있는 녀석들이 보통 무리의 이동을 인도하는 우두머리라고 한다.
처마 그늘에서 주인아주머니와 나란히 누워 쉬고 있는 새끼 염소.
네팔 하면 히말라야 트레킹이겠지만 라운딩을 할 수 있는 일정은 안돼서 하룻길로 올라갈 수 있는 오스트레일리안 캠프까지만 다녀왔다. 마침 날씨가 좋아서 안나푸르나 봉우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안 캠프에서 찍은 '마차푸차레(Machapuchare)' 봉우리.
내 눈에는 썩 닮아 보이진 않지만, '물고기의 꼬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통상 외국인들에게는 'Fish Tail'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네팔리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산이라 유일하게 등반을 금지한 미등정 산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마차푸차레'에 비해, 훨씬 유명하지만 그 모양새의 인상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안나푸르나(Annapurna)' 봉우리. 저 하얗게 쌓인 눈더미처럼 보이는 게 '안나푸르나' 봉우리라고 한다.
사실 '안나푸르나'는 여러 개의 봉우리를 가진 커다란 산 전체를 이르는 말인데, 현지인들은 통상적으로 저 눈더미를 보며 '안나푸르나'라고 부르는 듯하다. 내가 만난 네팔리의 설명으로는 '안나(Anna)'가 곡식을 비롯한 '먹을 것들', '푸르나(Purna)'가 섬처럼 '잔뜩 쌓여있는 더미'를 뜻하고, 저렇게 쌓여있는 쌀섬 같은 봉우리의 모습이 풍요를 떠올리게 만들기에, '안나푸르나(Annapurna)'가 '풍요의 여신'을 의미한다고 한다. 어느 나라를 가든 현지의 민속 문화를 헤아리다 보면, 주로 커다란 무언가는 '풍요', 화려한 무언가는 '악운의 회피, 혹은 기복'을 상징한다고 보면 얼추 맞는 듯하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 '히말라야(Himalayas)'라는 이름이다. 네팔리들 사이에서 '히말'이라는 단어는 '산'을 뜻한다.
"뭐야, 그러니까, 특별한 뜻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산'이야?" 싶은 생각이 든다. 스와힐리어로 '심바(Simba)'가 '사자'인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라이온 킹>의 주인공 이름은 '사자'다. 성의 없는 월트 디즈니.) 그런데 네팔과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히말라야'는 '눈의 거처', '눈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히마(Hima)'가 '눈', 알라야(alaya)가 '거처'라는 뜻이라고 한다. 말인즉, 눈이 내리지 않는 네팔 사람들에게 '산'은 곧 '눈'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는 얘기다. 만년설 정도는 있어줘야 산 취급해준다.
사진에 보이는 다랭이논은, 한국에서는 남해 어느 마을을 유명 관광지로 만들 만큼 볼 만한 광경이지만 네팔의 시골에서는 몹시 일반적인 농경지일 뿐이다. 경사진 곳에 경작을 하기 위해 계단식으로 논이나 밭을 만드는 방식을 다랭이라고 부르는데, 사진을 찍은 저 마을이 이미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곳. 눈이 없기 때문에 네팔리들에겐 산이 아니다. 산이라고 안 부른다. 그냥 언덕이다. 나는 등산화 신고 헥헥거리며 올라가는 곳을 여기 아낙들은 치마에 쪼리를 신고 다닌다. 참고로 한라산 정상이 1950미터다.
여기서부터는 포카라 근처 산촌에서 만난 산마을 사람들.
인도와 마찬가지로 힌두 문화권인 네팔에서도 인사를 할 땐 두 손을 공손히 모아 '나마스떼'라고 한다. 저 인사법이 참 예쁜 것 같다. 대충 인사를 할 수가 없다. 뭘 하다가도 어떻게든 인사를 하려면 하여튼 두 손을 모아야 한다. 인사를 건넬 때도 받을 때도 절로 마음이 공손해진다.
한국에서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에게 인사를 하면, 엄마가 아이의 고개를 살며시 당겨 숙이게 만들어주는 것처럼("안녕하세요~ 해야지."), 네팔의 아이에게 인사를 하면 엄마가 아이의 두 손을 함께 잡고 나마스떼를 만들어준다. ("나마스떼~ 바나.") 둘 다 참 따뜻하다.
염소에게 먹이로 줄 여물을 잔뜩 캐가거나, 아침나절 학교 가기 전에 마을 공용 수도에서 그 날 쓸 물을 한 통 가득 떠가는 건 아이들의 일이다. 국제 인권과 같은 민감한 이슈들을 주로 익숙하게 만나다 보니, 이런 장면들마저 '아동 노동이 아닌가' 하며 움찔할 때가 있는데, 가만 보다 보니 그렇게까지 도끼눈을 뜨고 볼 일은 아니다 싶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역시 시골에서는 아이들도 한 명 분의 노동력으로 취급받았다.
농사일을 거들게 시키느라 학교마저 보내지 않는 게 아니라면 등교 전, 방과 후에 무리하지 않는 수준으로 부모의 일을 돕는 것은 정상적인 문화일 테다. 거듭 느끼는 거지만, 애들 참 착하다. 낮에는 학교 가서 공부하고 아침저녁으로 농사일을 거들면서도, 낯선 나에게 참 예의 바르고 맑은 웃음으로 대해준다.
물론 이런 악동도 있다. 지구 어딜 가나.
그것은 또 그것 나름대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포카라는 네팔 최대의 관광도시이면서, 수도 카트만두 다음으로 큰 도시이기도 하다. 덕분에 밤늦은 시간까지 비교적 안전하게 다닐 수 있고, 곳곳에 기념품이나 장식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장식품점 주인아주머니네 딸 책가방이 뜯어진 모양이다. 장사도 중요하지만 애 학교도 보내야지.
이발소 지붕 아래서 비를 피하는 남자들.
이발소 안에서는 면도가 한창이다.
포카라는 호수가 있는 도시다. 포카라 숙소 아무 곳에서나 슬렁슬렁 걸어갈 수 있는 커다란 호수는 '페와'라는 이름의 호수. 포카라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 나가면 페와 다음으로 큰 호수인 '베그나스'가 나온다. 사람도 많고 조금은 지저분하기도 한 '페와'에 비해, 관광객들이 훨씬 덜 찾아오는 '베그나스'는 비교적 한적한 모습이다. 덕분에 관광객들에게 배를 태워주고 돈을 받는 이 분들은 조금 따분한 모양이다.
커다란 베그나스 호수에는, 나로서는 네팔인들과 구분이 안 가는 몇몇 인도 관광객들만이 나룻배를 타고 있었다. 네팔인과 인도인들은 서로의 나라를 여행하는 여행객이 꽤 된다고.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찾는 관광객이 많은 것과 비슷한가 보다.
뿔이 나는 중이라 가려운 건지 나무에 머리를 열심히 비비고 있는 베그나스 호숫가의 염소들.
염소는 급하게 경사가 기울어진 땅에서도 평지마냥 잘 서있곤 하는데, 덕분에 뒤로 펼쳐진 베그나스 호수의 수면이 기묘한 하늘의 모습처럼 보인다.
베그나스 호수에서 빨래를 하던 여인.
카트만두에서 로컬버스로 40여분을 타고 가면 나오는 도시 박타푸르(Bhaktapur). 18세기 이전까지 네팔은 세 개의 왕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면서 왕국의 중심은 통일 왕국의 수도 카트만두로 집중되었다. 왕국의 수도가 된 카트만두와, 바로 근처에 있던 다른 수도 파탄은 네팔의 근대화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도시가 되었는데,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박타푸르는 그 발전의 결을 함께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해서 박타푸르 자신의 번영기였던 14~16세기의 모습들을 꽤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꽤 중요한 관광지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낡고 오래된 건물들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문화유산의 보호 측면과 함께 관광자원의 확보를 위해 개발을 제한하고 있는 듯하다. 아마 어느 정도의 보상금도 받고 있겠지.
도시가 현대화가 안되니 다른 사업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여전히 네팔에는 농업 종사 인구가 대부분이고, 여기 박타푸르의 거주민들도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곳곳에서 탈곡을 하고 농산물을 건조하는 모습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심지어 탈곡하는 모습도 상당히 복고풍이다. 저렇게 선풍기를 돌려놓고 그 바람 위로 수확한 곡식을 떨어뜨려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한다.
하지만 박타푸르도 한 때는 번영했던 왕국이었던 만큼, 공예 분야는 굉장히 발달했었다고 한다. 번영했던 왕국은 유적지로 쇠락했지만, 한때 발달했던 다양한 공예문화는 오히려 관광지가 되어버린 이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곳곳에서 미술과 공예품의 제작 및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당연히 볼 만한 구경거리였을 테니 낯선 이의 눈길이 익숙한 것 같았다. 사진을 찍어도 되는 지를 묻자 흔쾌히 허락하는 모습에서 여유마저 묻어난다.
방석을 깔고 앉아 세붓으로 민속화를 그리는 가게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제법 어린 친구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어폰을 끼고 중간중간 흔들거리며 그리는 민속화라니 재미있다.
박타푸르는 조각술이 뛰어난 나라였다. 여행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내어놓은 나무 조각품들 말고도 사원의 계단이나, 주택 난간에서 마저도 예사롭지 않은 조각들을 볼 수 있다.
박타푸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금속 공예가 발달했던 쪽은 파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금속 공예품 상점에 별로 손님이 없어 보이는 것은 사실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여행지를 다닐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대체 저런 건 누가 기념품으로 사가는 걸까.
곳곳에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엄마의 일터가 아이들의 놀이터다.
네팔에는 다양한 계통의 민족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몽골이 근원지로 추정되는 민족들은 실상 한국인과 구분하기 어려운 이들도 많고, 또 반대로 전형적인 유럽인의 모습을 한 민족들도 있다.
주류는 브라만(Brahmin) 족으로, 카스트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민족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서남 아시아인들이라고 한다. 쌍꺼풀을 기본 옵션으로 장착한 커다란 눈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이들. 내가 만난 표본이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린아이의 눈가에 스모키 화장 마냥 저렇게 검은 칠은 한 경우는 주로 브라만 족인 듯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귀나 코를 뚫어 장신구를 하는 문화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눈 화장에도 분명 어느 정도 미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 외에도 어린아이의 눈가에 검은 화장을 하면 눈이 좋아진다고 믿는 미신이 있다고 한다. 애 시력에는 괜찮을까. 우리만큼 TV나 컴퓨터를 들여다보지 않으니 차라리 그보다는 좋으려나.
천으로 만든 공예품들을 파는 상점의 주인. 비수기이기도 하고, 하루 종일 있어봐야 살 사람 별로 없을 것 같은데 그냥 문 닫고 좀 쉬시지.
나무 조각과 함께 도자기는 박타푸르의 주요 생산물이라고 한다.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도자기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카트만두 인근을 통틀어 가장 많은 도자기가 여기서 생산된단다. "Potter's Square(도자기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을 가면 망치로 때려 흙을 반죽하는 사람에서부터 <사랑과 영혼>에서 보던 물레 성형, 빚어진 도자기를 말리고 있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
도자기 반죽하는 노인. 팔에 오랜 노동의 흔적이 실하다.
윷놀이라도 하는 걸까. 얼핏 보니 땅 위에 뭔가 놀이판을 그려놓았다. 이 작고 낡은 도시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여흥 거리는 어떤 것들일까.
박타푸르의 대문을 빠져나와 즐비한 택시 호객꾼들을 지나고 나면 보이는 커다란 저수지. 이 곳에서 빨래도 하고 아이들은 멱도 감는가 보다.
보드나트(Bodhnath)는 불교의 여러 갈래 중 하나의 성지다. 티벳 불교 중심의 네와르족 불교신자들이 주로 찾는 숭배지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보드나트'인 모양인데, 편하게 '보우더' 정도에 해당하는 발음으로 부르는 일이 잦은 것 같다.
전체의 크기가 제대로 드러나는 사진을 찍지는 않았는데, 꽤 크다. 저 사리탑이 있는 건물 위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주로 그 주변을 돌며 순례를 하는 신자들이 대부분인데 따라 걸어보니 10분은 족히 걸린다.
순례를 온 티벳불교의 승려들, 불공을 바치러 온 네팔 신자들, 그리고 관광객들까지, 사리탑 주변을 도는 행렬은 꽤나 쉼 없이 장대하다.
성당처럼, 이곳에서도 초에 불을 켜 공양하는 풍습이 있는 모양이다. 사원의 관리인 중 한 명인 듯, 불을 붙여둔 지 오래된 초들의 촛농을 따라내고 있다.
사리탑의 주변을 따라 걷다 보면 조그마한 광장 한편에 비둘기들이 잔뜩 모여있는 곳이 있다.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비둘기가 상식 이상으로 많이 모여있는 곳에는 늘 그렇듯 푼돈을 받고 비둘기 먹이를 파는 장사꾼이 있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그 행위가 이 불교의 성지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또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행위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은 지구 어디에서나 한결같다.
하품하는 노 승려. 초를 바치는 제단 앞 쪽에 줄곧 앉아있다. 한 번씩 가방에서 먹을 것도 꺼내는데, 한참을 보고 있어도 그곳에 앉아있는 이유를 짐작하는 데는 실패했다.
제단 옆에 서있던 또 다른 노 승려.
네팔에 있는 국제개발현장 몇 군데를 다니다가, 코이카의 사업 지원 공모에 선정되어 카트만두에 자리를 잡은 S.E.A 센터를 만났다. S.E.A 센터가 운영하고 있는 몇 가지 사업 중에 제일 눈길을 끌었던 것은 'M.A.P Nepal'이라는 공정여행 사업. CBT(Community Based Tourism)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공정여행 사업을 쉽게 이야기하면, 네팔 안에서 그리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면서도 현지의 문화와 자연을 잘 보존하고 있는 지역 마을에 홈스테이를 연결해주는 방식이다. 유명 관광지에서 관광객들에게 맞추어 상업화된 여행지가 아닌, 현지인들의 삶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얘기만 들었을 때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매력적인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네팔 내국인들 사이에서도 제법 인기라고 한다. 한국에서 템플 스테이가 인기인 것과 비슷한 느낌인가.
실제로 이 공정여행 프로그램인 'M.A.P'은 네팔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여행상품이 있고, 홈스테이 프로그램 외에도 유명 관광지를 '공정하게' 여행할 수 있는 상품도 마련해 놓은 듯하다. (http://www.travelersmap.co.kr/)
시골 마을의 홈스테이 프로그램을 정기적인 여행상품으로 사용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 매력과 함께 예상할 수 있는 부작용들도 떠올랐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냥 그 홈스테이 프로그램을 직접 이용해 보기로 했다.
해서 찾게 된 곳이 남끼(Namki) 마을. '따망'이라는 이름의 민족이 비교적 전통 생활방식을 잘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곳인데, '따망'은 몽골 계통의 민족인지라 한국인들과 굉장히 닮은 외모를 지니고 있다. 경관도 수려하고, 따망 민족의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고 있는 사례가 많지 않아 홈스테이를 위해 찾는 네팔리들이 제법 많은 편이라고 한다.
다만 카트만두로부터도, 포카라로부터도 상당히 멀고,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아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일은 아직 없다고. 사업 개발을 위해서 몇 번 방문한 적은 있어도 여행객의 신분으로 이 곳을 찾는 외국인은 내가 처음이라는 모양이다. 한나절을 들여 도착해보니 확실히 이해는 간다. 산악자전거라도 타야 할 것 같은 그야말로 '산길' 위로 두어 시간을 쉼 없이 요동치며 달리는 일은 그저 앉아있기만 해도 녹초를 만든다.
네팔의 도로 위에는 휴게소랄 것도 없이, 가정집과 구멍가게 사이 어드메쯤에 해당하는 가게들이 많다. 초면구면 상관없이 내 집인 양 앞마당에 가 앉으면 주인이 차를 내온다. 앉아 쉬면서 넋두리를 늘어놓다가, 차 한 잔의 값을 치르고 나서면 그게 휴게소다.
기름에 튀기는 음식이 많은 네팔의 구멍가게들. 벽에는 예쁜 색의 페인트를 칠했는데, 스위치엔 기름때가 잔뜩.
바다가 없는 나라. 그래서 해산물이 비싸고, 생선이라고 하면 이런 민물 생선들을 말한다. 저렇게 건조시킨 다음에 요리해서 먹는 듯하다.
남끼 도상에서 만난 여인. 사진 속 여인은 갓난쟁이 아이를 둔 20대 초반의 엄마였는데, 남편은 인도로 일을 떠났다고 한다. 일자리가 부족한 네팔의 젊은 남성들은 거의 대부분 인도, 중동, 아시아(특히 한국)로 일을 하러 떠난다. 물론 대부분은 브로커를 통한 비자격 노동자들이다.
하여 시골 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여성, 노인, 아니면 아이들 뿐이다. 그래서 농업뿐 아니라 건설 노동처럼 전형적인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현장에서도 일하고 있는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네팔 GDP의 가장 큰 금액에 해당하는 부분이 해외 노동자들의 국내 송금액이라니 알 만한 일이다.
산 등성이의 고지대마다 마을이 있다 보니, 몇 개의 봉우리가 모이는 골짜기에는 봉우리 위의 마을보다 약간 더 큰 규모의 마을이 꼭 있다. 산 위의 사람들이 농작물을 내와서 거래하는 일종의 다운타운이다. 굳이 따지자면 여기가 산골마을의 '읍내'라고 할까. 산 아래에 있는 큰 마을이니 말 그대로 정말 다운타운(Down-Town)이다.
사진은 남끼의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에서 만난 여인. 카메라를 보고는 사진을 찍어달라며 다가왔다. 여인은 약간의 발달 장애가 있는 듯했는데,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것 같았다. '광기의 격리'는 근대화의 산물이라고 했던가. 푸코였나.
10개월 정도 되었다는 아기. 귀를 뚫었다. 한국의 아기들과 다르지 않은 생김새다.
세상 모든 아빠들이 다 한다는 바로 그것. 위아더월드.
자매인 듯한데, 머리를 감고 나와서는 서로의 머리를 골라주고 있다. 정확히 뭘 골라주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서부터는 남끼에서 만난 사람들.
담배를 태우는 노파. 세월의 흔적이 굉장히 깊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60대 후반 정도라는 듯하다. 화장품도 일절 없고, 뜨거운 해 아래 워낙 고된 육체노동이 일상인 데다가, 고산지의 마을에는 산소 농도도 낮다 보니 마을 사람들 전반적으로 한국 사람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
이 역시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로 시작한 것이겠지만, 이마에 쌀을 붙이는 풍습이 있다. 내가 처음 도착했을 때도 환영의 의미로 붙여주었다.
그리고 어딜 가나 아이들은 참 예쁘다.
홈스테이를 했던 집의 막내아들 티셔츠에서 강남스타일이 보인다. 확실히 세계적인 인기를 거둔 모양이다. 더구나 네팔은 한국이 비교적 더 친숙한 나라이니.
이 바구니가 참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는데, 평소에는 끈을 연결해서 머리에 이고 짐을 나르는 용도로 쓰다가 그렇게 사용하지 않을 때는 닭들 위에 엎어 놓고 간이 닭장처럼 사용한다.
이 아이의 경우에는 요람으로도 쓰는 모양이다.
그리고 요람 속에 있던 아이는 낯선 외국인인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
남끼 마을에서도 하룻 동안 쓸 물을 떠 오는 것은 아이들의 일이다. 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를 수 있는 물이란 게 한계가 있어서, 충분한 양을 뜨려면 저렇게 몇 번을 오가야 한다. 그러고 나서 학교에 간다.
한국과 똑같은 공기놀이가 있다. 한국의 공기도 그 방식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한국의 공기와 거의 완벽히 똑같아 보인다. 몽골에서 시작한 놀이인 걸까.
꼬마녀석들 말고도 시골 마을 사람들의 표정은 늘 밝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홈스테이를 하며 머무르는 여행 상품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도시 생활과는 전혀 다른, 이들의 삶을 대상화함으로써 구경거리를 만들어버리는 건 아닐까 싶은 걱정이 앞서긴 했다. 직접 이들을 만나고 보니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대규모의 관광 인원이 들어올 수도 없는 이런 고산 마을에, 홈스테이는 말 그대로 집을 빌려줄 뿐이고 내가 잠을 자든 깨든 아랑곳 않고 이들은 이들의 일상을 꾸려 나간다. 적어도 한동안은 이 프로그램 때문에 마을의 어떤 부분이 왜곡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오히려 구경거리는 나다. 무료한 산골마을 생활에 찾아온 이방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들에겐 즐거운 구경거리인 셈. 누가 누굴 구경거리로 만든다고 걱정을 한 걸까 나는.
네팔에서는 '알루'라고 부르는, 아이 주먹만 한 감자가 이 마을의 주된 간식이다. 끼니 때도 반찬으로 곁들여져 나오지만 식간마다 수시로 삶아서 소금에도 찍어먹고 설탕에도 찍어먹고 고수풀을 섞은 양념장에도 찍어먹는다. 고수풀을 섞은 양념장 맛있다.
남끼마을 근처에 또 다른 마을이 있다고 해서 다녀오기로 했다. 분명히 말은 '바로 옆 마을'이라고 했는데, 어마어마한 경사의 산길을 타고 세 시간을 걸어야 한다. 산 중턱쯤에서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질려버린 표정의 나를 보며 너털웃음을 짓는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의 얼굴에는 땀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산 아래 읍내에 다녀오는 길이었는지, 쌀을 한 가마니 지고 있었다. 반쯤 죽어가고 있는 나는 등산화를 신고 있었고, 노인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마을 중간중간마다 들어서 있는 공동수도에서 아이를 씻겨 주고 있는 엄마. 네팔의 시골 대부분은 집 안에 수도시설이 있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에, 어른들도 이런 공동수도에서 목욕을 한다. 여성들도 예외가 될 수 없는데, 그래서 수건이나 천 등으로 몸을 적당히 가리고 수건 아래로 씻는다고 한다.
옆 마을에서 만난 처녀와 아이들이 예뻐서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처녀분이 살짝 신이 나신 것 같았다.
아이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네팔에서도 저 포즈는 그리 유행에 잘 맞는 편은 아닌 것 같다. (.....)
여흥거리가 많지 않은 산골 마을에서는, 오히려 그래서 핑계만 있으면 마을에서 크고 작은 잔치를 벌여 놀고는 한다. 최초의 외국인 여행객인 나를 맞이하기 위해 한 밤에 펼쳐진 춤판도 몹시나 흥겨웠는데, 남끼 마을을 벗어나 좀 걷다 보니 이번엔 옆 마을에서 작은 잔치를 벌이기 위해 염소를 잡았다. 마을의 새로운 공동 수도가 만들어졌다나. 어쨌든 잔치를 벌일 만한 적당한 핑계가 생긴 모양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잔치에 쓰이는 모든 것은 자급자족이다. 마을 사람들이 넉넉히 먹을 모양인지 내가 본 것만 염소를 두 마리 잡았다. 몸통은 적당히 해체해서 고기를 발라내겠지만, 머리는 또 머리 나름대로의 쓰임이 있는 것 같다. 따로 잘라내어 불에 털을 그슬린 후, 네팔의 전통 칼인 쿠크리로 긁어내고 있다.
염소의 배를 가르고 머리를 잘라내는 그 바로 옆에서 이런 꼬마들이 신나게 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네팔 사람들에게는 그리 충격적이거나 불편한 장면은 아닌 듯하다. 염소의 속이 분리되든 말든 이 친구들은 그저 즐겁다. 아니 오히려 염소의 속이 분리되고 있어서 더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오늘 저녁은 별미를 먹을 테니.
아쉽게도 염소를 잡은 건 옆 마을이고, 나는 홈스테이 집에서 늘 먹는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물론 이 저녁식사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맛이 있다.
전통적인 구조의 부엌이다. 이 부엌의 아궁이 앞에서 대부분의 요리가 이루어지고, 이 바닥에 그대로 앉아 식사도 한다. 수도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마당에 받아놓은 물로 식재료를 적당히 씻어내고, 식기는 헝겊으로 닦아낸다.
불이 약할 때는 대롱으로 숨을 불어넣어 불을 키운다. 어릴 적 안동 시골의 큰 집에서 아궁이에 고구마를 구워 먹을 때도 비슷한 방법으로 불을 살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저녁식사는 이렇게 생겼다. "달밧"이라고 부르는 이 음식은 네팔 가정 대부분의 주식인데,
사실 이 달밧을 포함해 네팔에서 주로 먹는 음식의 가짓수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도 나머지 음식들은 어쩌다 먹는 별미일 뿐이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이 달밧을 먹는다고 보면 된다. 달밧의 '달'은 왼쪽 위 작은 그릇에 담겨있는 수프의 일종이다. 녹두나 콩을 주원료로 해서 향신료를 넣고 끓인 묽은 죽이다. '밧'은 쌀밥을 말한다. 그러니까 '달밧'은, 직역하면 정확히 '국밥'이 된다. 한국의 국밥과 다른 점이라면, 우리는 밥을 국에 말아먹지만 달밧은 수프 그릇의 '달'을 '밧' 위에 부어서 섞어 먹는다. 나 같은 외국인에게는 이렇게 스푼과 포크를 주지만, 네팔리들은 도시에서도 꽤 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먹는다. 아마 그런 식문화의 차이가 '국밥'과 '달밧'의 '섞는 방법의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했을 법하다. 우리처럼 국에다 밥을 말면 손으로 먹을 수가 없으니까. 단출한 메뉴지만, 달밧은 꽤나 입맛에 잘 맞았다. 곁들이는 반찬으로 데쳐서 양념을 한 나물, 혹은 닭이나 염소의 고기를 카레와 함께 담아서 내오기도 한다. 고기반찬은 늘 나오지는 않는데, 내 경우에도 손님이 온 특별한 대접의 의미였는지 첫날 저녁에만 맛볼 수 있었다. 식당에서 달밧을 주문하더라도 고기반찬은 추가 메뉴로 있는 경우가 많다. 네팔에 있는 동안 꽤 많은 끼니를 이 달밧만 먹었는데, 서남아시아 특유의 향신료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마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설사를 어마어마하게 한다. 네팔을 찾는 여행객 대부분이 이 세균성 설사병을 앓는다고 하는데, 원인은 아무래도 다소 비위생적인 요리 환경이라고. 그래서 어지간히 위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세균성 지사제를 꼭 챙겨가라는 조언이 일반적이다. 물론 나는 저 조언을 한국에 오고 나서야 들을 수 있었다. 일단 먹을 때는 맛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열흘 정도 더 설사를 했던 것 같다. 으허허.
네팔의 학교는 토요일이 휴일인 주 6일제이다. 그래서 내가 남끼에서 다시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날은 일요일이었는데도 아이들이 교복을 챙겨 입고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까지 이런저런 독특한 의복을 입고 있던 아이들이, 다 같이 교복을 챙겨 입은 모습을 보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다행히 이런 산골마을까지도 학교는 대부분 들어와 있다고 한다. 덕분에 어지간한 차로도 들어오기 힘든 해발 2000미터 이상의 이 산골마을 아이들도, 조금만 걸어가면 공립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꽤 작은 단위의 마을마다 학교가 들어서 있다는 사실은 꽤나 고무적이다. 하기야 인구의 상당수가 이런 고산지대에 살고 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의 여러 가지 복지를 모르쇠 할 수는 없었겠지.
짐을 챙겨서 지프로 돌아왔는데 짐칸 뒷 유리에 아이들 얼굴이 한가득 보인다. 가까운 학교라고는 해도 비탈진 산길을 40여분에 걸쳐 걸어가야 하는 거리인지라, 내려가는 길에 태워주기로 했다고 한다.
그건 좋은데, 그럴 거면 애들을 앞에 앉히지. 5인승 지프의 뒷자리 짐칸에 아이들이 아홉 명이나 끼어 앉았다. 자리를 바꿔 앉자고 해도 막무가내이다. 하긴 그래, 입장 바꿔서 내가 너희였어도 나 차 태워주는 외국인이 나한테 자리 바꿔 앉자고 했으면 엄청 불편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