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성민 Nov 15. 2019

서양 미술 속 세례 요한 찾기


여행을 다닐 때 미술관은 꼭 들린다. 생애 첫 배낭 여행이자 첫 세계 일주였던 스물 네 살의 여행도 실상 런던, 파리, 뉴욕, 샌프란시스코의 미술관을 다니는 미술관 투어에 가까웠다. 빠듯한 여행일정의 대부분을 하루종일 미술관에서 보내는 데 썼다. 같은 미술관을 3~4일씩 갔다. 그리고 여행경비가 부족해서, 미술관을 서성이다 조금 어리버리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도슨트를 자처하고 밥을 한 끼 얻어 먹곤 했다. "내가 설명해줄 테니까 나 밥 한 끼만 사줄래?"

미술은 분명 아는 만큼 보이는 경향이 있다. 현대미술에 와서는 그런 기호와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되려는 작품이 많아서, 어느 정도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 것도 많아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유럽의 미술관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 날 중세-르네상스의 서양미술은 확실히 아는 게 많을수록 보이는 것도 많다.

여기엔 크게 두 종류의 지식이 필요한데, 한 가지는 작품의 기술적인 측면, 그러니까 물감이나 안료를 쓴 기법이라든지, 구도를 분석하고 작품 안에 배치된 상징들을 읽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이건 해석의 영역이다.

또 한 가지 내용의 영역이다. 그래서 이 장면이 무슨 이야기의 어떤 장면이고, 저 화폭 안의 인물들은 왜 저러고 있는 건데?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면 작가가 묘사한 그들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사실 미술 전문가가 그림을 해설해 준다면 전자의 지식 위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그런 해석과 기술을 관심 있게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대중을 상대로 하는 르네상스 미술 작품 해설은 주로 후자가 된다. 그림이 묘사하는 장면의 옛날 이야기. 사실상 미술 해설이라기보다는 문학, 종교사, 역사에 가까워진다.


이렇게 내용을 기준으로 서양화를 감상하려면 미술사적 지식이 없어도 두 가지 코드만 꿰고 있으면 어느 정도는 즐겁게 볼 수 있는데, '기독교'와 '그리스로마 신화'다. 근대 이전의 서양미술에 내용이 있는 그림은 거의 이 두 가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30년을 교회오빠로 산 나에게 전자는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아주 빠삭한 주제다.

보통 대부분의 중세 미술은 '예수'와 '성모'로 가득차 있고, 이들을 알아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이 모자 다음으로 가장 자주 보이는 인물은 예수의 또래로 보이는 또 다른 남자로, 모자의 백옥 같은 피부에 비해 훨씬 까무잡잡하고, 옷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가죽을 두르고 있으며, 나뭇가지가 됐든 잘 만든 지팡이가 됐든 기다란 무언가를 들고 있는 인물이다.

세례요한이다. 중세 미술에서 차지하는 지분 만큼이나 성경 전체를 통틀어 그 중요도가 꽤 크신 분. 예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친척으로, 세례요한을 임신한 엘리자베스의 집에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가 찾아오자 뱃속에서 태동으로 반응하기까지 한다. 예수께서 서른에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대중은 사실상 요한을 메시아로 받아들였을 정도로 따르는 무리도 많았다. 강가에서 세례를 주며 설교를 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서른 살에 시작된 예수의 공생애는, 바로 이 세례요한의 세례로 시작한다. 요한을 따르는 무리 앞으로 서른의 예수가 나타나 세례를 받고, 그 위로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는 장면으로부터 본격적인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요한은 예수 시대 당시의 '에센파'의 일종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존재했던 종파의 하나로 극도의 정결주의를 지키던 이들이었는데, 결혼이나 사유재산을 제한하고 대부분의 필요를 공동의 소유로 해결했으며 주로 기도나 율법 연구로 일상을 보냈다. 마을 곳곳에 퍼져 있었다는 설명도 있고, 사해 연안의 동굴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는 설명도 있다. 세례요한을 설명하는 성경 구절들은 '광야에서 생활을 하며, 가죽옷을 입고, 메뚜기와 야생꿀을 캐먹고 살았다'는 묘사들이 대표적인데, 이러한 모습이 에센파와 많이 겹쳤기 때문이리라. (메뚜기는 번역의 오류로, 나무 열매였다는 설명도 있다)    

요컨대 세례요한은 미술에서 묘사되고 있듯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살며, 오로지 메시아-예수의 등장만을 준비하는 인물이었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도 그를 일컬어 선지자보다 나은 자이며, 여자가 출산한 이 중에 이 보다 큰 자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여자가 출산한 이 중에 이 보다 더 큰 자가 없다.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 자신을 제외하고 성경 속 인물 중에서는 세례요한이 제일 대빵이란 말인 셈이다.

그런 그의 끝은 어땠을까. 이 역시 서양미술에서 즐겨 다루는 장면이다. 쟁반 위에 담겨진 머리. 아마 서양미술을 통틀어서도 그로테스크하기로 상당히 상위권에 꼽히는 장면일 게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여러 화가들에게 욕심나는 장면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예수에게 세례를 주고 난 뒤에도 계속 활동하던 세례요한은, 당시 로마 식민 치하 팔레스타인의 섭정이나 다름 없었던 헤롯왕의 잘못된 혼인관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가 구금된다. (권력자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기독교인들에게 부디 본이 되길. 그런데 이렇게 외치던 어떤 기독교인들은 정권이 바뀌자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가장 앞장 서서 정부를 규탄하고 있기도 하다.)   

예수의 십자가 형도, 당시 로마 재판관이 예수를 처형할 경우 그를 따르던 무리들로부터 소요가 일어날 것을 염려해 여러 차례 재판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요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헤롯왕은 요한을 따르는 세력이 적지 않음을 인식해 그를 가두어만 놓고 딱히 더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연회장에서 재롱잔치를 보인 딸의 춤에 감동해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가 결국 세례 요한의 목을 치고 만다. 딸이 소원으로 바란 것이 세례 요한의 목이었기 때문이다.

그 딸의 어머니 헤로디아가 바로 요한이 비판했던 헤롯왕의 '잘못된 아내'였고, 당연히 헤로디아는 요한이 증오스러웠다. 해서 딸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요한의 목을 달라'고 부탁하게끔 한다. 딸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엄마의 부탁을 따랐을 뿐이다.

공언을 했던 헤롯왕은 어쩔 수 없이 요한의 목을 쳐서 딸에게 준다. 어쨌든 위험을 감수하고 공약을 지키는 걸 보니 요즈음의 어지간한 위정자들보다 훨씬 낫다. 그 딸의 이름이 '살로메'다. 서양미술의 끊임 없는 소재이자, '악녀'의 대명사로도 자주 소비 되지만 성경에는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유대 역사서로부터 전해진 이름일 뿐이다. 게다가 사실 이 이야기 대로라면 살로메는 그저 춤을 잘 췄을 뿐 악녀라고까지 불릴 일은 아니다. 억울하지 싶다.     

어쨌든, 이게 예수께서 공언한 '여자에게서 난 자들 중 가장 큰 자'의 최후다. 딸 재롱에 감동한 아빠 선물로 바쳐진 머리. 쟁반에 담겨서. 평생을 아무것도 누리지 않고, 안락한 집도 가족도 없이 광야에서 살았던 인생의 끝이다. 부디,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인생이 술술 풀린다' 말하는 설교 믿지 마시라.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가장 잘 믿었던' 사람의 인생은 이거다.     

이 이야기를 다룬 [3호실의 죄수]라는 책이 있다. 얇고 짧은 동화책이다. 성경에는 예수께 세례를 준 이후로 그 요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그나마 잠시 등장한 텍스트에 살을 붙인 책이다.     

잠시 등장한 텍스트는 이러하다.

투옥 중이던 요한은 자기 제자 중 한 명을 예수께 보낸다. 보내서 묻는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이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러니까, 내가 그토록 외치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당신이 정말 맞습니까, 되묻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손으로 세례까지 줘 놓고. 세례 주고 막 머리 위로 비둘기 날아오는 것까지 봤으면서. 모르긴 몰라도 감옥에서 전령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기껏 보내서 묻는 말이 '정말 당신이 메시아 맞습니까'인 것이다. 평생을 그걸 위해 살아온 사람조차, 약해지는 순간에는 확신을 잃는다. 감옥 속에서,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암흑 속에서 한 마디 위로가 될 확답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그럴 땐 '맞다, 내가 바로 당신이 기다리던 메시아다'라고 해줘도 될 것을. 예수께서는 성격이 이상한 건지 항상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눈먼 자가 보게 되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고 일러 주어라. 즉 자신이 행한 일들, 하지만 요한 그 역시 이미 알고 있는 그 일들을 다시 상기시켜 주라 전하고는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실족, 넘어짐. 나로 말미암아 넘어지지 않는 이는, 절망하지 않는 이는 복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었을까. 메시아를 믿고 따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때문에 절망하고, 메시아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복이 있다.     

[3호실의 죄수]의 저자 진 에드워드는 그 말 앞에 열거한 기적들의 장면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눈 먼자가 보고, 듣지 못하던 자가 듣고, 걷지 못하던 자가 걷고, 나병환자가 나음을 입는다는 장면들. 그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는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늘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성경은 묘사한다. 그 기적이 정말이었다면, 더구나 의료수준이 지금과는 달랐던 그 시절 팔레스타인이었다면, 정말이지 그 기적이 간절한 사람은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성경 속에서도 정말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갖은 어려움을 뚫고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안타까운 이들의 사연을 여럿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 모든 이들에게 기적을 베풀었을까. 안타깝지만 아니다. 그가 모든 마을을 다 찾은 것도 아니었으며, 자신에게 몰려든 모든 군중을 다 치료한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는 수많은 이들을 다 물리고 홀로 섬으로 떠나 버리기도 했다.     

여러 해를 앓는 딸을 보며 가슴을 끓였던 어미 앞에서 순서가 끝나버린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소문을 듣고 이제는 이 절망적인 삶을 끝낼 수 있으리라 벅찬 가슴으로 기다렸던 나병환자의 마을에는, 아예 찾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들을 한 번 제 눈으로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던 눈 먼 아버지는 저 멀리 군중들 밖에서 그저 소음으로만 그를 만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디, 나 때문에 절망하지 마십시오.

예수의 그 당부는, 옥중에서 확신이 간절히 필요했던 요한을 비롯한 그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그 대답을 전해들은 요한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성경은 말해주지 않는다. 한낱 딸 재롱에 대한 선물로 참수 당하던 그 순간, 요한의 표정은 참담했을까 평온했을까. 모를 일이다.     


교회를 오래 다닌 나에게 가끔 따져 묻는 사람이 있다. 세상이 왜 이러냐고. 너 기도한다면서, 그 기도 들어주시긴 하는 거냐고. 기도가 응답 받는다면 세상에 이렇게 마음 아픈 장면들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기도, 물론 한다. 다른 사람들 위한 거. 교회에선 보통 중보기도라고 부른다. 눈에 보이는 일들이 너무 속이 아파서,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는 나오지도 않는다. 엄두도 안 난다.

거기에 대한 응답은 늘 한 가지다. 기도하는 그 무릎을 일으켜 가서 네가 그 기도의 응답이 될 수 있는 곳까지 되라는 거다. 그게 하나님이 세상에 일하시는 방식이다.     

성경에는 그런 장면도 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군중이 몰려들었는데, 밥 때가 되니까 제자들이 예수께 사람들 밥 먹게 그만 돌려보내자 말한다. 예수의 대답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였다.


작가의 이전글 열흘 간의 네팔 여행, 사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