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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Nov 28. 2019

짧아도 오래도록 따뜻한 인연

<가시나들> 방송 뒤의 이야기들

6월 29일.

처음에는 그냥, 방송도 끝났고 정규편성도 못 받았고 하니, 걷어갔던 교과서도 돌려드릴 겸 혹시라도 있을 나쁜 사람 주의도 드릴 겸 인사 차 가는 마음이었다. 학교하고 정리할 일도 있었고.

그런데 석달 만에 만난 할머니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더라. 정말 손주사위라도 만난 것 같은 그 표정에 그 반가운 눈가에, 마음이 여러 번 덜컹거렸다.


집집에 들릴 때마다 나오는 살구에 참외에 햇감자는 그렇게 다디달 수 없었고, 수빈이가 먹던 잔뜩 묵은 총각김치도 그대로였다. 연락을 못 받았던 남순 할머니는 올 줄 알았으면 감자 한 상자 빼놨다가 차에 실어줬을 거라는 말을 스무번 쯤 하며 울상이셨다.  

곳곳에 녹아든 짝꿍들의 선물, 선생님의 선물. 아직도 안 떼고 그대로 남아있는 파티용품들. 짝꿍들을 많이 그리워하셨다. 가끔 전화는 온다더라. 제일 좋은 건 정규가 되어 몇 번 더 녹화하러 오는 거겠지만, 그게 안 된 지금 그 바쁘고 통제 많은 아이돌 일정에 따로 스케쥴을 빼서 오기는 힘들겠지.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리움은 고독과는 다르다. 학교 친구들, 동네 친구들이 많은 분들이라 고독하진 않아 보이셨다. 이제 밭일을 시작해 얼굴도 많이 그을리고 살도 많이 빠지셨다지만 낯빛에는 생기가 넘쳤다. 농촌이 바쁜 계절, 들에 좀 덜 나가시면 좋겠다고 손을 꼭 붙들고 말씀드렸다.


얼굴을 보니, 반가움에 글썽이는 눈빛을 보니, 또 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8월에는 옥수수가 맛있으니 오라시기에 색시랑 오겠다고 말했다. 연인은 옥수수를 많이 좋아하니까. 옥수수 먹으러 가야지.


단짝 남순 무순 할머니. 햇볕 아래 밭일을 많이 하는 농번기라 초봄 촬영 때보다 살도 많이 빠지고 그을리셨다.
그저 반가워 하시는 김점금 할머니.
문소리 선생님이 선물로 주고 간 필기구, 중간 고사 상품으로 받은 연필깎이, 이브가 준 남순 할머니 머리집게, 소풍 게임 상품이었던 실내화. 모두 여전히 잘 쓰고 계시는 중.
할머니들 생활 곳곳에 들어선 짝꿍의 흔적들
남순 할머니는 아직도 홈파티 장식들을 그대로 두고 계셨다.
들리는 집마다 한상 가득 내어 오시는 정겨운 음식들. 배가 불러도 멈출 수 없었다. 판순 할머니네 밥 진짜 맛있다.
몇 달 사이에 잔뜩 커버린 까만 메리.
마을 어귀까지 나와 배웅해주신 두 할머니. 실어줄 감자가 없다며 울상인 남순 할머니.


9월 4일.

<가시나들>의 문 선생님이 교육부에서 주최한 '문해의 달 선포식'에서 문해학교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전국의 문해학교 학생들도 참석하는 자리라 함양의 할머니들도 먼 길을 마다않고 오셨는데, 문 선생님이 그 자리에 있는 줄 몰랐다가 만나고는 서로 얼싸안고 울다웃다 하셨다고 한다. 그 와중에 점금 할머니는 동윤이만 찾으시고. 할머니, 동윤이 여장해요 이제.

내 포스팅을 보고 어느 페친님이, 자기 동네 문해학교 할머니 학생들의 시화전에서 발견했다며 '가시나들'이란 시를 찍어 올려주셨다. 한참을 들여다 봤다.


11월 24일.

<가시나들>이 끝나자마자 영화와 연극 일정으로 바빴던 소리 누나가 이제 짬이 좀 나는데 함양 할머니들께 인사 드리러 가고 싶다고 했다. 옥수수 먹으러 가기로 했던 8월에 연락을 드렸더니, 추석 벌초 때문에 집에 없으니 다음에 오라 하셔서 기회를 못잡고 있었다. 마침 작가님들도 할머니들께 내내 마음을 쓰며 연락해오고 있었기에 함께 시간을 맞춰 일정을 잡았다. 소리 누나는 할머니들마다 맞춰온 것 같은 목도리와 영양크림을 두 손에 들고 함박웃음으로 함양을 찾았다.


남순 할머니는 아직도 읍내에 나갈 때마다 농협에서 '아이고나 할머니'로 불린다고 한다. 승자 할머니는 이제 아이패드로 <가시나들> 영상을 찾아볼 줄 아신다.
점금 할머니는 요즘 월화 밤마다 시간을 맞춰놓고 동윤이가 나오는 <녹두전>을 본방사수하시는데, 칼싸움 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동윤이가 다칠까봐 심장이 떨려서 TV를 끄신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거 키이쑤를 아주 찐하게 하대"라며 부끄러워 하셨고, 판순 할머니는 점금 할머니가 질투를 한다며 놀리셨다. (찾아보니 <녹두전> 키스신, 과연 진하더라)
따로 친구와 와서 자고 간 적이 있는 동윤이는 지금 드라마 촬영 일정이 너무 바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와중에도 드라마가 끝나면 다시 점금 할머니를 뵈러 오고 싶다고 얘기했다.  

무순 할머니는 감기가 심하게 드셨다. 봄부터 말썽인 허리 때문에 올해는 밭일도 제대로 못하셨다고 한다. 염색할 새도 없으셨는지 백발이 형형했다.
이제 갈 때가 되었다며 한숨을 쉬시기에, 저번에 맛보여 주기로 하신 여름 옥수수 색시랑 꼭 먹으러 올 테니 약속하시라고 했다. 그러마 하고 기분 좋게 웃으셨다. 몸살로 앓다가도 사람들 만나니 기운이 돈다며.


1년 정도 꾸준히 정규방송 촬영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한 달 4회 파일럿 촬영이었을 뿐인 짧은 시간 동안 서로 마음을 많이 주고 받았나보다. 왕복 하는데만 8시간이 걸리는 함양까지 한달음에 찾아온 소리 누나도, 이미 다른 팀으로 옮겨 각자 바쁘게 방송을 하고 있는 작가님들도 고맙고 따뜻했다. 방송이 끝나고도 벌써 반 년이 지났지만, 내 할머니들인양 앞으로도 종종 인사를 드리게 될 것 같다.


남순 할머니 집에는 아직도 홈파티 전구가 고스란히 붙어있다.
까만 메리는 새끼를 두 마리 낳았다.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했더니, 색시와 한 번 또 오라는 무순 할머니. 그 때까지 건강하세요.
꽃 속에 파묻혀 꽃이랑 구분이 안되는 남순 할머니. 우리가 사라져 안 보일 때까지 꽃 같이 손을 흔들며.
촬영장에서 찍혔던 스틸들.
직접 그렸던 교과서 표지. 한동안 작가님들 핸드폰 배경화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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