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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Jun 13. 2020

최소의 비용으로 지구를 도는 법

나의 첫 배낭여행 세계일주

내 첫 배낭여행은 세계일주였다. 몇 개의 외항사에서 '세계일주항공권' 상품을 팔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일주항공권은 항공사가 운영하는 노선들을 연결해서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묶음 상품으로 파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대륙마다 한 번씩 들리는데, 한국을 출발해서 중국이나 싱가폴 같은 아시아에 한 번 내려줬다가, 거기서 다시 유럽 어딘가에 내려줬다가, 다시 태워서 아프리카 어디, 오스트레일리아 어디, 남미와 북미를 들러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마지막으로 타는 식이다. 최소 다섯 번 이상의 비행이 포함되어 있고, 당연히 여행일정이 길어질 테니 날짜는 1년 이내로 자유롭게 지정할 수 있는 오픈티켓이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수차례의 비행, 날짜를 자유롭게 지정할 수 있는 오픈티켓인 만큼 보통 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상품이다. 그래도 각각의 항공권을 따로 구입했을 경우와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싸다.


나는 저런 상품들은 당연히 엄두도 못 냈다. 내가 구입할 수 있었던 건 싱가폴 항공사의 세계일주항공권이었다. 인천에서 싱가폴, 싱가폴에서 유럽 10여 개 도시 중 하나, 거기서 알아서 프랑크푸르트까지 가서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다시 뉴욕에서 알아서 미대륙을 횡단해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면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 네 번의 비행, 6개월의 오픈 티켓이 2009년 당시 250만 원 정도였다. 훌륭한 가격이다.

내가 알기로는 얼마 전까지도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물가상승이 반영되어 숫자는 조금 커졌지만 상대적인 체감 가격은 거의 비슷했던 걸로 기억한다. 다만 항공사가 줄줄이 도산하는 이 마당에 세계일주 항공권 상품이 아니라 싱가폴 항공사가 잘 버텨낼지가 걱정이다.


어쨌든 적도 이남으로는 얼씬도 안 하고 영어권 국가로만 다니는 비교적 소프트한 노선인 만큼 '세계일주'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조금 유난스러운 느낌은 있었다. 그래도 서해로 나가서 동해로 들어오는 것이니 분명 일주는 일주다.

원래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 다 못 만난다. 동위도 선상에 있는 애들만 만날 수 있다. 온 세상 어린이 다 만나려면 앞으로만 가면 안 되고 나선이나 지그재그로 가야 한다. 그래도 아무도 이 노래 가사에 시비 걸지 않는다. '일주'의 의미는 '한 바퀴'를 도는 데 있다. 250만 원짜리 세계일주에서 엄밀함을 요구하지는 말자.

물론 이런 종류의 세계일주 항공권은 보통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동해로 나가서 서해로 들어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싱가폴 대신 인천에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먼저 타면 반대 방향으로 돌아 들어올 수 있다. 실은 이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 시간상 미세하게 이득이다. 지구 자전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가면 최종적으로 하루 정도를 더 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미국보다는 유럽을 먼저 가보고 싶었다.


다른 세계일주 항공권과 비교하면 싱가폴 항공사의 250만 원짜리 상품은 분명 훌륭한 가격이 맞았지만, 그렇다고 2009년의 나에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마침 군 전역을 앞두고 복학을 위해 등록금으로 마련해둔 돈이 있었을 뿐이다.

삶에 조금의 여유도 두지 않았던 당시의 나는 애초에 전역하자마자 바로 복학할 생각으로 6월에 입대를 했었다.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머리를 깎고 군대를 간 거다. 그럼 6월쯤 전역할 테니 여름방학 기간 동안 조금 추스르고 9월 학기에 바로 복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전역이 다가오자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앞으로도 그리 여유 있는 삶을 살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지금 말고 내가 길게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때가 또 있을까. 없을 것 같다. 지금 다녀오자. 그래서 등록금으로 모아놓은 돈으로 항공권을 결제했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를 곱씹으며. 덕분에 여행을 다녀와서 다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 학기는 고스란히 휴학을 하고 돈을 벌었지만.

중요한 건 그 뒤로 10년 동안 20여 개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저 말을 곱씹었다는 거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내가 아프리카를 가보겠어.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내가 히말라야를 가보겠어. 아이슬란드 갈 때도 '지금 아니면 또 언제'를 주억거렸더니 듣고 있던 친구 녀석이 "너 저번에 네팔 갈 때도 그 말했잖아."라고 짚어주었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근데 맞다. 아마 그때가 아니면 거기는 못 갔을 거다. 아이슬란드도, 네팔도, 탄자니아도, 마추픽추도. 무턱대고 'YOLO'를 외치는 것도 너무 싫지만, 지금이 아니면 오지 않는 기회들도 분명 있기 마련이다. 팔십까지 이 말하면서 살아야지. 지금 아니면 또 언제.


2009년의 저 말 또 맞는 말이었다. 그때 했던 3개월의 세계일주 이후로 아직 그 정도로 오랫동안 어딘가를 여행한 적은 없다. 그러니까 정확했다. 그때가 아니면 3개월 동안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할 일은 아마 없었을 거다.


어쨌든 250만 원은 오로지 항공권의 가격이었고, 다녀와서 벌 돈은 등록금이었고, 체류비는 당연히 별도였다. 3개월 동안 8인실 도미토리 같은 곳에서만 자고, 하루 식비는 만 원 이하로 쓴다는 계산 아래 출국까지 남은 기간 동안 악착 같이 돈을 모았다.

유럽과 미주를 도는 내 첫 번째 배낭여행의 목적은 미술관과 극장이었다. 서양미술을 오랫동안 좋아하고 공부한 만큼 진품들을 직접 보고 싶었고, 공연예술을 사랑했던 만큼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의 오리지널 무대들을 보고 싶었다. 공연 티켓들은 당연히 비쌌지만, 미술관은 대부분 무료에 가까웠던 만큼 다른 데 들어가는 돈을 최대한 줄이면 안 될 것도 없어 보였다.


꾸역꾸역 모은 돈에 주변 어른들이 소식을 듣고 노자에 보태라며 조금씩 주신 돈을 합치자, 그럭저럭 3개월 치의 여비가 만들어졌다. 쇼핑이라든지 맛집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지만, 그래도 노숙은 면할 수 있을 액수였다.

그리고 실질적인 첫 여행지였던 런던의 셋째 날, 경비의 반을 도둑맞았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고, 카드 해외이용 수수료가 어마어마하다는 소문에 겁도 먹었던 차였다. 여행 경비 거의 전부를 반은 파운드로, 반은 달러로 뽑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돈 좀 아껴보겠다고 런던의 4존에 숙소를 구했다. 런던은 대중교통을 동심원의 구역(zone)으로 나누어 운영하는데, 중심부인 1존에서 외곽으로 갈수록 2존, 3존으로 숫자가 커지는 식이다. 하루 이틀 구경하는 관광객은 1존 밖을 나설 일이 없으며, 대부분의 관광객들도 2존 안에서 거의 모든 구경을 마칠 수 있다. 4존이면 현지인들도 갈 일이 없는 곳이 많다. 서울로 따지면 천호나 원당쯤 되는 곳이다. 아마 서울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저 동네엔 안 가본 사람들이 꽤 될 거다.


게다가 숙소도 멀쩡한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 쉐어하우스였다. 요즘 한국의 쉐어하우스는 뭔가 대안적인 삶을 고민하는 젊은이들의 힙한 거주 문화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2009년 런던 4존의 쉐어하우스는 그냥 청년 구직자들의 임시거처 같은 곳이었다.

브렉시트 이전의 런던은 사실상 유럽연합 전체를 아우르는 경제의 중심지였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복지는 훌륭하지만 젊은이의 가슴을 뛰게 할 일자리는 없 수많은 젊은이들은 국경을 쉽게 넘어 런던으로 모여들었다. 가진 건 열정뿐인 이들이 싼 값에 구하는 숙소가 바로 이 쉐어하우스였다. 2층 침대가 세 개씩 들어서 있는 방이 대여섯 개, 화장실은 두 개, 주방은 하나. 그나마 호스텔 도미토리에는 라커라도 있지, 이 친구들은 노트북이고 지갑이고 그냥 침대 위에 던져두고 돌아다녔다.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잘 때도 돈다발을 바지춤에 꽁꽁 넣어놓고 잠들었거늘, 어느 날 밤엔가 자다가 흘렸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빠듯했던 여행 경비의 절반이 사라지자 눈 앞이 아득해졌다. 내 여행을 응원하며 봉투에 마음을 담아 보태주신 분들의 얼굴들도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평생 살면서 스스로가 가장 한심한 순간이었다.


내가 쉐어하우스를 들쑤시며 너무 괴로워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한 불가리아 녀석은 나에게 위로랍시고 런 말 했다. "어쩌겠어, 인생의 수업료를 지불했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

이래서 누군가 괴로워할 때는 가장 먼저 공감을 해주라고 하는 거다. 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좀 너무하다 싶어 "이게 인생의 수업료가 될 수 있다는 건 알겠는데, 고작 물건 간수를 꼼꼼히 하자는 교훈을 얻기 위한 대가 치고는 너무 비싸지 않아?"하고 반박했더니 그 녀석이 하는 말이, "인생의 수업료는 니가 액수를 정할 수 있는 게 아냐."였다.

와씨 재수 없어. 근데 세월이 흐를수록 그 녀석이 한 말이 맞는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재수 없긴 재수 없어.

솔직히 말해서 그냥 평범한 여행이었으면 더 끌어올 수 있는 비상금도 없었으니, 이미 망칠 대로 망친 여행 남은 돈을 적당히 쓰고 돌아오는 비행기 날짜를 변경해 그대로 한국에 돌아왔을 거다. 하지만 런던에 있는 나에게 한국행 비행기 티켓은 없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일단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거기서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다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야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이미 끊어놓은 항공권들. 추가로 국제선 항공권을 예매할 돈은 없고.

세계일주 항공권을 사놓은 덕분에, 사상 최대의 고난도 여행퀘스트가 주어진 셈이었다. <최소의 비용으로 지구 반대편까지 도달해 집으로 돌아가시오>


여행이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진 순간이었다. 안 그래도 여유가 없었던 식비는 극도로 쥐어짜 하루에 1달러짜리 샐러드나 샌드위치만 먹고 버텼다. 석회질로 악명을 떨치는 유럽의 수돗물을 자주 마셨다. (심지어 화장실도 유료잖아.) 너무 배가 고파 미술관 복도에서 휘청하고 주저앉기도 여러 날이었다.


생존이 절실해지자 뻔뻔해졌다. 미술관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인상이 좀 만만해 보이는 여행객이 눈에 띄면 슬쩍 다가가 거래를 제안했다. 내가 오늘 너의 일일도슨트를 해줄 테니 밥 한 끼만 사주겠니. 그래도 서양미술 공부해놓은 보람이 있었다. 여행객들은 마음이 열려있고,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는 아시아 남자에게 기꺼이 환대를 제공했다. 그리고 내 미술 설명은 나름 괜찮은 편이었을 거라고 혼자 위안삼아 본다.

그것도 마땅찮으면 그냥 얻어먹기도 했다. 여행지에서는 원래 혼자 온 여행객끼리 알아보는 법이다. 제일 좋은 수단은 사진이다. 지금처럼 셀카가 훌륭하지 않을 때였으니, 혼자 사진 찍으려 낑낑 대고 있는 이에게 다가가 '찍어드릴까요?'하고 말을 붙인 후 나도 한 장 찍어달라고 한다. 그러다 보면 이리저리 대화가 이어지기 마련이고, 인상이 나쁘지 않으면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을래요? 까지도 어렵지 않다.

그럼 나는 입을 틀어막고 "실은 내가 여행자금을 도둑맞아서..."라며 난처해한다. 이 관대한 외국인들은 '오 저런! 정말 안됐구나! 밥 한 끼 정도는 내가 기꺼이 사줄 수 있어!'라며 또다시 여행객에게 환대를 제공한다. '이 나라에 와서 곤경에 처했으니 이 나라 사람인 내가 사과할게. 이 나라에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기억해줘'라는 멋진 말과 함께.

그리고 요긴했던 것이 여행 다이어리였다. 나는 여행지에 가면 꼭 자리에 앉아 그림을 한 장씩 그리는 습관이 있는데, 위급상황이 되자 이걸 유사화폐로 쓰기 시작했다. 그림 한 장 뜯어주고 5달러를 받고, 그림 한 장 뜯어주고 밥 한 끼를 얻어먹고. 그렇게 여기저기 뜯어주다 보니 사진으로나마 남겨둔 그림은 이렇게 세 장뿐이다. 금문교를 그린 그림도, 하이델베르크 도시 전경을 그린 그림도, 에펠탑을 그린 그림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까 소중한 기억은 꼬박꼬박 기록으로 남기는 게 좋다. 안 그러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다. 물론 이 경우는 이렇게 이야기가 남았지만.


여행 다이어리는 여러 순간 나에게 즐거움이 되어주었다.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는 손에 들고 있던 다이어리를 옆에 잠시 내려놓고 사진을 찍었는데, 카메라를 잠깐 들었다 내린 그 사이에 다이어리가 사라져 버렸다.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이라면 모를까, 낡고 해진 공책을 누가 들고 갔을까.

그래도 나에게는 소중한 물건인 만큼 분실물 보관소도 쫓아가고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보니, 미술관의 스탭 중 한 명이 내 다이어리를 들고 사람들 하나하나 붙잡아가며 묻고 있었다. 혹시 이거 니 꺼냐고. 그 잠깐 내려놓은 사이 분실물로 보였던 모양이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내 것이라고 했더니 너무 다행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주인을 찾아주려고 안의 내용을 슬쩍 봤는데 이 그림들 다 직접 그린 거냐고 물어왔다. 응 내가 그린 건데? 와 정말 마음에 들던데, 너 미술 전공생이야? 아니 그냥 취미야. 오 정말? 너 정말 마음에 든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그러고는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유료전시를 입장할 수 있는 Comp. 티켓을 두 장 들고 왔다. 한 달 동안 아무 때나 입장할 수 있으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예산 때문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는 상설전시만 구경하고 다녔는데, 유료 전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획전시들은 입장료가 꽤 되는 편이었다. 테이트모던에서만 대형 유료 전시가 두 개나 진행되고 있었는데,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는 티켓이 생겼다. 너무 황홀한 순간이었다. 여행 다이어리는 꼭꼭 알차게 채워서 다니자. 가끔 적당히 흘려주기도 하고.

그렇게 세 달 동안, 최소의 비용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죽지 않고 마침내 집에 돌아왔다. 석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온 형에게 문을 열어주던 동생의 첫마디는, "형한테 노숙자 냄새 나."였다.


그래도 노숙은 안 했는데. 비슷하게 길바닥이나 역사에서 밤을 샌 적은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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