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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Jan 10. 2022

25개국 여행지에서의 잡설토막들.

여행을 한창 다닐 때는 정말 수많은 이야기들을 보고 듣고 경험했다. 

그 중 아무 두서없이 그냥 오래 기억에 남은 것들 위주로 남겨보는 토막 이야기들.

대부분 현지에서 내가 경험한 것이나, 현지인들이 과장해서 들려준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으니 그냥 재미로 보길 권한다.

1. 동아프리카 일대에서 쓰는 스와힐리어는 엄청나게 귀엽다. '잠보'하고 인사하면 '포와'하고 대답하는데, 애들이 외국인을 신기해하는 눈으로 '포와...' 하고 대답하면 쓰러진다.



2. 귀여운 언어 하니까 생각났는데 스페인어로 횡단보도는 '얼룩말길'이다... 귀여워...


출처: http://kitimototz.blogspot.com 기다란 것은 바나나.

3. 탄자니아는 이슬람 문화권이긴 하지만 중동지역만큼 엄격한 분위기가 아니라 은근슬쩍 돼지고기를 먹는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마을 중심가엔 잘 없고 변두리로 나가면 전문 요리집이 있다. 이 돼지고기 요리는 '키티모토kiti moto'라고 부르는데 해석하면 '뜨거운 의자' 라는 의아한 뜻이 된다.

왜 '뜨거운 의자'일까, 추론을 해본 결과 "돼지고기가 맛은 있는데 들키면 곤란하니 허겁지겁 먹는 음식"이라는 뉘앙스가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말의 '가시방석' 같은 느낌. 맛은 한국의 돼지갈비찜과 엄청 유사하다.


4. <라이온킹> 주인공의 이름 '심바'는 스와힐리어로 그냥 '사자'다. 디즈니의 네이밍은 참 성의 없는 것 같다. 최근에 나온 새 작품 <엔칸토>에서 할머니의 이름 '아부엘라'는 스페인어로 '할머니'다...


5. 비슷한 예로 '히말라야'에서 '히말'은 그냥 '산'이란 뜻이라고 들었다. '히말라야'는 복수형이라고.

산스크리트어로 '히말라야'는 '눈의 거처'라고 하는데, 말인즉슨 이 동네 사람들한테는 만년설 정도는 있어줘야 산 취급을 받는 모양이다. 그래서였는지 한라산보다 높은 고산촌의 마을을 갔는데 거긴 산이 아니라고 했다.

1년 내내 눈이 오지 않아(그래서 네팔의 많은 건물엔 애초에 난방시설이 잘 없다) "눈=산"인 네팔 사람들이 한국의 겨울에 오면 몹시 혼란스러울 것 같다. 산이란 개념의 대혼란.


6. 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러브레터>의 배경이 된 오타루와 인근의 대도시 삿포로는 눈이 엄청나게 온다. 그래서 길이 항상 빙판. 안 넘어지려다 보니 걷는 게 훨씬 피곤했다.

이게 생활이 가능한가 싶어, 지자체 차원에서 빙판길에 대한 대처가 잘 이루어지냐고 물었더니 들은 대답은 "조심조심 걷는다"였다.


7. 네팔에서 차를 타고 갈 때 사고가 날 뻔한 적이 있다. 분명히 우리 기사가 잘못했는데 도리어 화를 내길래 왜 사과를 안 하는지 물어봤더니 네팔어에는 '미안하다'가 없다고.

사실 있긴 한데 "그건 어마어마하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느낌이라 잘 안 쓴다고. 근데 관광객들을 많이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으니 "쏘리"가 사실상 사과하는 말로 정착했다고 한다. 

진짠가...


8. 반면 두 손을 모으고 인사하는 "나마스떼"는 직접 해본 인사 중에 가장 공손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인사합니다"라는 뜻이라고. 뜻도 공손한 느낌...


9. 나이로비에서 어느 가정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했는데,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겠냐기에 달라했더니 갑자기 옆에 있던 아이들이 서로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스와힐리어로 발음이 같은 'kofi'가 싸대기란 뜻이라고...


10.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어딜 가도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울리는데, 내가 들었던 건 진짜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래서 아침 기도시간에는 무조건 깰 수밖에 없다.


11. 무슬림들의 금식월인 '라마단'에 이슬람 문화권을 가면 심지어 맥도날드도 영업을 안 하거나, 하더라도 쇼윈도를 커튼으로 가려놓는다. 여행객들은 훤히 보이는 곳에서 뭘 먹으면 안 되고 포장해서 숙소에 가서 먹어야 한다. 관건은 냄새. 금식월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 냄새를 풍기면 안 된다.

근데 '라마단'은 해가 떠있을 때만 금식이라 해가 지면 엄청나게 먹는다. 그래서 카탈로그 등에 "저희 식당과 함께 품격 있는 라마단 식사~" 같은 홍보물을 볼 수 있는데, 말하자면 금식월이 금욕과 고통의 시간이라기보단 축제 기간에 가까운 느낌.


https://the-schuttes.blogspot.com/

12. 버락 오바마의 이름 '버락'은 케냐에서 가장 흔한 남자애 이름인 '바라카'인데, 스와힐리어로 '축복'이라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가 케냐인이라서 스와힐리 이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케냐나 탄자니아 시내 곳곳에는 온통 오바마 벽화 투성이였다. 미국에 감사할 것만 있는 나라는 아닐 텐데 미국 대통령이 그렇게 영웅이라는 게 처음엔 신기했는데, 곧 오히려 그래서 더 영웅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김응복 선생님 아들 한인 2세 김영수 씨가 미국 대통령이 됐다니 엄청나잖아.


13. 스페인어의 흔한 여자 이름 중 하나인 '돌로레스'는 '고통'...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람 이름인데 고통이래... 기독교 문화가 지배적인 지역이라 그런 것 같다.

자기들도 그게 좀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부를 때는 '고통아~'하고 안 부르고 '로라'라고 부른다. 아니 그럼 그렇게 짓지 말지...


14.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요정을 믿는다고 한다. 진심으로 믿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함부로 돌을 던지면 안 된다는 예절도 "요정이 맞을까 봐"라고. 한국의 '문지방 밟으면 / 다리 떨면 복 나간다' 정도 느낌인 것 같다. 심지어는 요정이 사는 지역이라고 도로를 우회해서 만든 적도 있다고 한다.

근데 아이슬란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진짜 믿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15. 킬리만자로는 명성에 비해 정상까지 가기가 비교적 수월한 산이다. 하산까지 포함해서 좀 빡쎈 4박5일 코스가 있고 덜 빡쎈 5박6일 코스가 있다.

근데 킬리만자로 가이드의 얘길 들어보니 일부러 정상에 거의 도착하기 직전까지 정상('우후루'라고 부른다. '자유'란 뜻이라고)이 안 보이는 코스로 간다더라. 이유는 이틀 사흘 오르는 동안 정상이 계속 보여버리면, 보이긴 하는데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아서 등산객들이 더 쉽게 포기하고 싶어해서라고...

그러니까 역시 힘든 거 할 때는 자꾸 목적지 보지 말고 발끝만 보고 가는 게 답인 거 같다.


16. 네팔의 가장 흔한 음식은 '달밧'이다. 거의 1년 내내 먹는다고 한다. 카레처럼 묽은 '달'을 쌀알이 기다란 밥인 '밧'에 쏟아부어서 섞어 먹는다. 그러니까 번역하면 정확하게 '국밥'이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국에 밥을 말고, 네팔은 밧에 달을 붓는 거랄까. 확실히 비벼 먹기 좋게 밥알에 찰기가 적다. 

하지만 나는 국밥도 말아먹는 것보다 밥공기에 조금씩 떠서 비벼먹는 쪽을 좋아하는데, 생각해보니 달밧에 훨씬 가까운 것 같다.


17. 탄자니아에서 바나나를 부르는 말은 '은디지'와 '마토케' 두 가지다. '은디지'는 우리가 흔히 먹는 달달한 바나나인 반면, '마토케'는 훨씬 크고 단단하고 푸르스름한 요리용 바나나. 요리해서 먹으면 감자와 고구마의 중간맛이 난다.


18. 동아프리카에서 우리의 밥에 해당하는 주식은 '우갈리'라고 부른다.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서 쪄서 만드는 요리인데, 좀 더 찰지게 먹기도 하고 더 퍼석하게 먹기도 한다. 맛은 백설기 비슷. 담백하게 고소하다가도 씹다보면 달짝지근하다.

다른 지역 가서 '당신들은 뭘 주로 먹냐' 물으면 다른 이름을 말하는데, 보면 우갈리다. 그 일대는 다 그거 먹는 것 같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자주 보인다.


19. 탄자니아 관광지들에는 스테이크가 꼭 있는데 13년 전 기준 한 접시에 5~8000원 정도 했다. 로컬 시장에서 바나나 20개가 천 원, 아보카도 하나가 이백 원 정도니까 현지가로는 엄청나게 비싼 가격. 하지만 소득격차가 많이 나는 나라에 갈 땐 그냥 그 정도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절대 '굽기'를 물어보지 않고 바싹 익힌 고기가 나온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건 전부 우리가 먹는 소가 아니라 버팔로 고기라고. 질겅질겅 씹는 맛이 있다.


http://bit.ly/2vRJpY

20. 몽골은 정말 고기천국. 채소 만나기가 엄청 힘들다.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동물은 풀을 먹고, 사람은 동물을 먹는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고기 먹으면 다 먹는 거다)


21. 여행하며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던 건 바르셀로나의 푸아그라 스테이크와 오렌지 주스, 고베의 고베규였다. 푸아그라 스테이크는 생각보다 정말 싸고, 고베규는 아주 많이 비쌌다.


22. 코카콜라와 펩시는 영화 <부시맨>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저소득국가 음료시장을 완전히 독점해버렸다. 물보다 콜라가 싼 경우도. 대부분의 저소득국가에 가면 간판도 없이 가게 온 벽에 페인트로 자기 브랜드 그림을 그려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 대가로 음료 냉장고를 준다고 한다.


23. 그런데 페루에 가서 '콜라 주세요' 하면 코카콜라도 펩시도 아닌 '잉카콜라'를 준다. 노란색인데 약간 미란다 느낌도 나고 나름 산뜻하니 맛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코카콜라가 콜라 점유율에 뒤진 브랜드인데, 다분히 페루 내의 민족주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이 흥미로운 이야기의 결말은 코카콜라가 잉카콜라를 인수하는 뻔한 결말로 끝난다...


함부로 들이대면 침을 맞는다. 얼굴에 씹다 뱉은 풀떼기를 쳐 맞은 사진(우).

24. 페루에선 거리 곳곳에서 길강아지 마냥 알파카를 볼 수 있는데, 너무 귀엽지만 비슷한 녀석인 라마는 조심해야 한다. 이 녀석은 침을 뱉는다...

침을 뱉는 행위는 '무리 내의 서열이 낮은 수컷'에게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25. 세렝게티나 킬리만자로 같은 국립공원들은 무조건 가이드를 동반해야 들어갈 수 있다. 여행객의 안전을 위해서기도 하겠지만 자국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도 좋은 제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렝게티에 사파리카를 타고 들어가면 차에서 내릴 수 없다. 역시 안전을 위해서기도 하지만 보호구역이라서 그렇기도 한 듯.

차창 밖으로 동물들에게 먹을 걸 던져줘도 안 된다. 가이드가 말하길, 그러다 걸리면 자기가 구속된다고. (구속은 좀 과장 같지만) 역시 여행객의 안전보다는 관광자원 보호의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26. '사파리'는 스와힐리어로 '여행'이란 뜻이다. 현지에서는 그 대신 'game drive'라는 말을 쓴다. 어차피 그거 하러 오는 사람들은 다 영어 화자들이니까.

사파리의 가이드나 드라이버는 시력이 어마어마하게 좋다. 저 쪽 수풀 속에 사자가 숨어있다고 하는데 찾다찾다 안 보여서 망원렌즈로 당기니 겨우 보였던 적도. 300mm짜리 망원 렌즈였으니 어마어마하게 키워주는 건데도 손톱만하게 보였는데, 그 가이드는 그걸 달리는 차 안에서, 맨 눈으로 보고 알려준 것. 놀라운 피지컬의 격차.


https://www.facebook.com/McDonaldsCanada/

27. 여행하다 만난 캐나다 애는 '우리는 애국심이 넘쳐서 늘 집 앞에 국기를 걸어놓는다. 심지어 맥도날드 로고에도 메이플이 그려져 있다'라고 했다. 찾아보니 정말로 맥도날드 로고 가운데 메이플이 조그맣게 그려져 있는 것 아닌가.

더 찾아보니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 인근에서는 캐나다에서도 미국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데, 미국 맥도날드 광고를 본 캐나다 사람들이 자꾸 캐나다 맥도날드에 없는 제품을 광고에서 봤다며 달라고 하는 바람에 혼란을 줄이기 위한 조처였다고.

그러니까 여행 다니면서 듣는 얘기들은 적당히 걸러서 들어야 한다. 물론 이 포스팅도.


28. <해리포터>의 기차역 장면을 촬영한 런던의 킹스크로스 역에 가면 정말로 9와 4분의 3 정거장이 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기둥에 반만 들어가 있는 카트 위로 '9와 4분의 3'이라고 쓰인 정거장 표시가 있을 뿐.

오히려 인상적이었던 건, 그거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거였다. 왠지 한국이었으면, 더구나 <해리포터>쯤 되는 작품이었으면 이정표는 물론이거니와 옆에 래드클리프 등신대 포토월 같은 것도 있었을 것 같은데, 정말 무심하게 설치된 그 카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태도가 굉장히 멋지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래서 찾으려면 역무원에게 '해리포터 어딨어요?' 물어봐야 한다. 그럼 씩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켜 준다. 카트 잡고 앞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자세 잡고 사진 찍는 게 국룰.


29. 2개월 남짓의 유럽-미국 여행은 유수의 미술관/박물관들을 다니는 게 목적이었는데,

런던: (거의) 전부 입장료 무료,

파리: 입장료 만 원 내외,

뉴욕: 니가 내고 싶은 만큼 내고 들어와

-인 것이 재미있었다. 공공미술 정책에 대한 각 나라의 태도를 보여주는 느낌.


30. 직접 본 작품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오르셰에 있던 고흐의 자화상이었다. 괜히 벅차올라서 홀린 듯 그 앞에 하루 종일 앉아있다가 폐장할 때 쫓겨났다.


적어놓고 보니, 대부분 20대 후반까지의 여행들이다. 서른이 넘어서도 꽤 많은 여행지를 다녔는데, 그 이후의 기억들은 별로 적히지 않는 것을 보니 여행도 다닐수록 무뎌졌던 모양이다.


무뎌지지 말고, 자꾸 적고, 기록하며, 다시 새로운 눈으로 일상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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