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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Mar 25. 2022

문자시대 소통의 슬픔

왜 틀린 맞춤법의 뜻이 더 풍요로운가.

온라인 어디선가 발견한, 이런 종류의 모음집 중 가장 강력했던 것. 이런 놀라운 '마춤뻡' 사례들은 점점 늘어만 가지만, 또 하나하나 캡처가 이루어졌던 최초의 사례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고유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사실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이 이렇게까지 일상화되기 전에는 사람들은 서로의 '글'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대단히 특별한 일이었으니까. 저기 쓰여있는 대부분의 단어들은 그냥 소리 내어 읽으면 아마 눈치 채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단어가 아니라 맥락 위에서 이루어지니까. 


그런 의미에서 또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자면, 언어의 놀라운 '자기복원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대부분 저 글자로 알고 있어도 맥락만으로는 상호이해에 전혀 문제가 없었기에 누군가의 마음속에 정착했을 텐데 읽다 보면 또 그랬겠다 이해가 된다. 어떤 표현들은 원래 글자가 드러내고자 했던 그 의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 것을 넘어, 오히려 더 풍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거북암이 든다"는 '거부감'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답답하며 곤란한 감정을 상기시킨다. 느려서 답답함의 상징이 되어버린 '거북'과, 같은 감정을 가리키지만 적절하지 않은 표현으로 끊임 없이 지적받고 있는 '암'의 만남이라니. 


"숲으로"로 돌아가는 것 또한 단순히 물거품을 뜻하는 '수포'보다 실패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체념적 어조까지 느껴지게 한다. 받아들이는 것은 곧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뜻 아닌가.


ㅡ정확한 벼슬의 직위는 알 수 없지만 "마마를 잃은 중천공"에서 느껴지는 비장함은 고작 '사내의 한마디'에 비할 바가 아니다.


ㅡ'숫기'가 없는 애보다 "습기가 없는" 애는 감성조차 메말라 더 대하기 어렵겠지. 파사삭.


"일해라절해라"는 단순한 지시대명사 "이래라 저래라"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간섭하는 느낌을 주며, "골이 따분"은 그저 형용사일 뿐인 '고리타분'보다 더 확실하지 않은가. 골이 따분하다니. 이렇게 구체적일 데가.


ㅡ초면에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묻는 것은 사회적 신뢰가 필요한 맥락이기에 그저 예의일 뿐인 "실례지만"보다 "신뢰지만"이 더 이상향을 향한다.


ㅡ좁은 집을 넓어 보이게 만드는 '수납공간'은 단순히 귀찮은 것을 쑤셔 넣는 느낌이지만 "순합공간"은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조화를 떠올리게 하며, "곱셈추위"는 확실히 '꽃샘추위'라는 예쁜 말로 불러주기엔 너무 춥긴 하다.


물론 '장례희망'이나 '엿줄게 있습니다'처럼 아예 반대방향이거나, 평등한 단어 '반려자'를 성편향적이고 모욕적인 '발여자'로 만들거나, '유종애미'처럼 패륜적인 실수도 있기야 하다.


하지만 상당수가 전혀 다른 어원으로 대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의미가 더 풍성하고 정확해지는 데서 언어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맥락과 소통,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언어다. 어쩌면 정확한 뜻과 철자까지 서로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전혀 다른 얘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더 많을 지도.


다른 시대였으면 말하는 사람은 그 나름의 풍성한 심상으로 더 창의적인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을 텐데, 이 놈의 카톡과 인터넷 문자문화 때문에 조롱거리가 되었으니 어쩌면 이 역시 기술이 만들어낸 소외의 현장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글 쓸 때는 맞춤법 평소보다 세 번 더 확인한다.)


이쯤에서 시대적 사명감으로 만든 노래 하나 듣고 가자.

https://youtu.be/riQ1ax3lv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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