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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May 25. 2023

진품을 보면 뭐가 달라?

예술감상과 관심자원

랜드마크나 미술품의 '진품'을 보는 것에 크게 의의를 두지 않고 "그거 그냥 사진으로 보면 똑같아"라든지, "다큐멘터리로 봐서 내가 더 잘 알아"라는 사람들이 꽤 있다. 물론 적지 않은 경우는 그런 것들에 너무 연연하다가는 짧은 생 발만 동동 구르다 끝날 가능성이 다분하니 처음부터 '흥' 해버리는 '신포도'적 마음가짐일 것이다. 실제로 미디어로만 접하던 건축물이나 미술품을 직접 봤을 때의 그 묘한 반가움은 TV로만 보던 연예인을 목격했을 때와 닮아있다. 말 그대로 '목격'인 것이다.


게다가 이 '목격'은 대부분 실망을 동반하는데, 시끄러운 관광객으로 가득한 루브르의 <모나리자> 전시장이 대표적이다. 낭만과 여유를 상상하며 도착한 성수기의 관광지는 대부분 출퇴근 시간 신도림역을 방불케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그제야 이곳의 민낯에 실망하며 '아 미디어에서 본 낭만은 정말 통제와 연출의 결과로구나'하고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목격'과 '인증샷'이 목적이 아니라 그 이상의 향유를 해볼 요량이라면 '인류의 자산'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은 확실히 직접 찾아가서 감상할 가치가 있다. 꽤 많은 나라를 여행 다니고, 다들 그렇듯 미술관은 꼬박꼬박 들렀던 내 경험으로 돌아보자면 나를 가장 오랫동안 하염없이 붙들었던 작품은 오르셰에 있는 고흐의 자화상과, 벨베데레 궁의 <키스>였다.

고흐의 경우는 군대를 전역하고 처음으로 혼자 오랫동안 떠난 여행이었다는 점, 그리고 군대에서 어빙 스톤이 쓴 고흐의 전기소설을 막 감명 깊게 읽고 왔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오르셰는 친절하게도 이 작품 정면에 의자를 배치해 원하는 만큼 앉아서 고흐와 교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덕분에 나는 그의 꿈틀거리는 붓자국에 홀려있다가 폐장시간이 되어 쫓겨나야만 했다.


사실 클림트는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장식성이 강한 작품일수록 진품을 보는 의미가 적다고 생각하는데, 애초에 장식으로 시작해 장식으로 끝장을 본 예술가 아니겠는가. 다만 오스트리아 빈에 며칠 머무르게 되면서, 이 볼 것 많은 도시에서 짧은 시간 한 가지 테마에 집중한다면 클림트여야 할 것 같았다. 빈에서 태어나 빈이라서 전성기를 누리고 한 번도 빈을 벗어난 적이 없는 빈의 화가니까.


그리고 마침내 <키스>를 봤을 때 그게 정말 잘한 결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도 클림트의 전시와 작품을 가끔 봤지만 이런 감흥은 없었는데, 확실히 <키스>는 달랐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화폭은 아낌없이 바른 금 덕분에 바라보는 각도마다 휘황하게 빛났다. 디지털 이미지로는 절대로, 이 황홀함을 경험할 수 없다.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으로 클림트와 똑같은 해에 태어나고 똑같은 해에 죽은 드뷔시를, 조성진의 연주로 들으며 한참을 서 있었다. 세상이 하얗게 사라지고 황금빛 연인과 나만 어지럽고 아득했다. 정신을 차리게 된 건 같은 노래가 다시 나오고 있어서였다. 앨범이 한 바퀴 돌았으니 최소 한 시간은 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셈이다. (관광객이 득실거리는 미술관에서 온전히 그림에 빠지고 싶다면 노캔 이어폰은 정말 최고의 동반자다.)

진품을 감상하는 것은 네 가지 측면에서 디지털 이미지로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


앞의 두 가지는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으로, '크기''질감'이다. 둘 다 물리적인 요소인 셈인데, 크기는 설명할 필요도 없고 특히 <키스> 같은 작품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반사광이 달라지는 도금의 질감을 직접 보지 않고 이 작품의 감상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머지 두 가지는 '지리로서의 장소''물리적 감상환경'이다. 둘 다 결국 '맥락'이라는 단어로 바꿀 수 있다. 지리적으로 클림트의 그림은 빈에서 봐야 한다. 그걸 보러 벨베데레 궁까지 가는 동안 클림트가 살았던 도시와 거리, 당시의 분위기와 공기들을 온몸에 묻힌 채 작품 앞에 서야 이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 느낄 수 있다. 남프랑스의 푸른 햇살과 줄무늬 티셔츠들을 보다가 피카소의 그림들을 보고, 기차 차창 밖으로 쉼 없이 흐르는 목가적인 풍경들을 보다가 쿠르베의 그림을 보면 한국의 '특별전'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인다.


네 번째 '물리적 감상환경'이라는 건 결국, 미술관은 기술적으로 '지루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거긴 그림 밖에 없다. 눈을 현혹하는 광고판도, 쉴 새 없이 귀를 자극하는 유행가도 없다. 지루한 조명과 빈 벽 위 그림만 있다. 그래야 그림을 오래도록 볼 수 있다.


가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는데, 위대한 예술은 첫눈에 기적처럼 나를 사로잡고 전율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물론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처럼 그런 예술도 있다(이 경우는 '1. 크기'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지만). 하지만 훨씬 많은 경우 예술은 '들여다보고' '내가 생각해야' 향유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뭔가를 발견하겠다는 굉장히 능동적 자세가 있어야 한다. '니가 그렇게 대단해?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하며 날 감동시켜 보라는 자세는 '목격'과 '인증샷' 이상의 감동을 주기 어렵고 결국 '미디어로 봐도 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나도 미술관이 이토록 지루한 공간인 덕분에 의자에 앉아 고흐의 자화상을 한 시간을 볼 수 있었다. 가능할 리 없겠지만 설령 그 자화상이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어서 매일 볼 수 있다 해도 오르셰에서의 그 전율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집에는 뭐가 많거든. 이케아 쇼룸에서는 그렇게 예뻐 보이던 소품도 집에 가져오면 갑자기 시시해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다. 거긴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것도 없는' 곳이니까.

언제부턴가 집에서 책 읽는 것이 좀 힘들어졌다는 걸 느낀다. 나도 아내도 책을 좋아하다 보니 독서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꽤 중요한 활동이고, 그래서 나름 책 읽기에 좋은 환경을 갖춘다고 갖춰 놓았는데도 종종 집중이 잘 안 된다. 내 문젠가 싶지만 또 외출할 때 들고 나온 책을 버스나 카페에서 읽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집이 문제인 거다. 내 주의를 끄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다른 것들, 예컨대 플스와 닌텐도 스위치, 각종 OTT들과 침대는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문제지만, 내가 깨달은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다른 책들'이다.


우리 집엔 책이 많다. 이미 많은데 계속 많아지고 있다. 사는 속도를 읽는 속도가 따라잡지 못한 지도 한참 됐다. 그러니 마음 한편에는 늘 조바심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 뭐 하나 읽겠다고 잡았는데 100페이지쯤 읽다 보면 이제 슬슬 이건 무슨 책인지 알 것 같고 다른 책도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눈을 돌리면 책등마다 그렇게 재미있어 보일 수가 없다. 당연하지 내가 샀거든.


그런 독서법도 나쁘지 않다고는 하지만, 나는 한 권을 잡으면 어지간하면 완독을 해야 하는 편이다. 그래서 계속 잡고는 있는데, 마음은 자꾸 다른 책들에 빼앗긴다. 그런데 한 권을 들고 밖에 나오면 이제 선택권이 없다. 이 책 밖에 없다. 그럼 아주 잘 읽힌다. 약속 시간에 일찍 나와서 한참 재밌게 읽고 있는데 하필이면 상대방도 일찍 나와서 흥이 깨지기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비행기 타는 걸 좋아한다. 여행의 설렘이나 기내식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고, 강제로 모든 방해요소와 선택권을 차단당한 채 직접 가지고 온 것들로만 시간을 보내야 하는 타의적 몰입의 시간. 거기서 읽은 책과 본 영화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 것들이 많다. 감상의 조건은 그보다 더 열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위기는 이제 상식이 된 것 같다. 영화 관계자들에겐 꽤 된 얘기고 이제 관객들도 안다. 넷플릭스와 코로나와 물가상승을 거치며 사람들은 영화에 아주 인색해졌다. '티켓 한 장 8천 원 만 원일 때야 이런 것도 봐줬지만 이제 내 돈 2만 원과 내 시간을 쓰게 하려면 그 정도로는 어림없지'라는 태도는 어디서나 정설처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바로 그 '2만 원' 값을 하는 영화로 호출되는 것들은 주로 거대한 블록버스터들이다. <아바타>나 <탑건> 같은 영화들. 거대한 스크린과 사운드의 '체험'이 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선사하는 영화들. 타당한 얘기다. 반면 드라마가 주가 되는 작은 영화는 '이건 OTT용' 소리를 듣는다. 극장의 양극화는 불을 지핀 것처럼 가속화된다.


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작은 영화일수록 극장이 필요하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가 영예를 가져간 이번 아카데미는 노미네이트 된 작품들 대부분이 참 좋았는데, <애프터썬>, <이니셰린의 밴시>, <타르>처럼 나를 사로잡은 영화들을 극장이 아니라 집에서 봤다면 과연 나는 끝날 때까지 핸드폰을 한 번도 안 볼 수 있었을까? 영화는 시간예술이고, 앞에서부터 쌓아가는 호흡과 서사의 예술이다. 한 순간이라도 다른 맥락에 눈길을 빼앗겼다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것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가 쉽다. 그래서 요즘엔 집에서 영화를 볼 때도 전화기를 꺼두거나 다른 방에 놓고 오려고 한다. 그럼에도 고요한 영화들을 온전히 즐기려면, 내게는 극장이 필요하다. 휘황한 블록버스터는 집에서 봐도 쭉 따라가며 볼 수 있다.


극장은 미술관, 비행기의 지루함과 같은 맥락에 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관심을 한곳에 집중할 때 그것을 향유할 수 있다. <어벤저스>처럼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날 압도해 주기만을 바란다면, 어떤 종류의 감각들은 영영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본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집에서 몬스테라를 키우고 있다. 결혼 선물로 받을 때만 해도 쇼핑백에 넣어져서 왔던 녀석이 3년 여 동안 무서운 속도로 자라더니, 꽤 커다란 화분으로 분갈이를 해줬는데도 금세 뿌리가 아우성치며 밖으로 뻗어 나왔다. 저 뿌리의 넘치는 생명력을 보고 있으면 이 화분은 좁다며 '흙...'하고 음울하게 신음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요즘 택시에 타면 뒷좌석 바로 눈앞에서 현란하게 빛나고 있는 광고 태블릿부터 끄는 게 일이다. 이제 관심은 자원이다. '관종'이라 불리는 소셜미디어 셀럽들이 끝도 없이 늘어나는 것도, 실제로 저 '관심'들이 정확하게 환금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방법으로 시장을 확장해 온 자본은 이제 쪼그라드는 인구와 시장의 한계에 부딪히며 점점 더 치열하게 사람들의 관심 쪼가리라도 쟁탈하려 애쓰고 있다.


관심을 더 많이 쟁탈하려면 사람들의 주체성이 사라져야 한다. 보여주는 대로 따라와야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자기가 정하게 하면 안 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들은 검색기능을 일부러 박살 내놨다. 그나마 유용하게 사용하던 해쉬태그 검색 기능조차 얼마 전부터 '최신순'으로 정렬하지 못하도록 바꿨다. 원하는 정보에 체계적으로 접근하게 해 버리면 안 되니까. 자신들이 제공하는 알고리즘에 무분별하게 더 많이 노출되도록 헤매며 시간을 쓰게 만들어야 하니까.


화분이 너무 좁아 비집어 나오는 몬스테라의 뿌리 같다. 내가 조용히 능동적으로 뭔가를 향유하고 생각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유튜브에 내 검색을 기반으로 한 알고리즘 추천기능을 꺼 놓은 지 오래되었는데, 덕분에 내 유튜브의 초기화면은 참으로 고요하고 지루하다. 유튜브 첫 화면을 켜도 흥미를 끄는 것이 별로 보이지 않아, 조용히 필요한 영상만 검색해서 보고 끈다. 과연 유튜브는 언제까지 나에게 이런 자유를 허락해 줄까.


하지만 자본이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제 사람들은 눈앞에 1.5배속으로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본다. 한 순간도 지루함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이미 도파민에 절여진 세상이라 앞으로는 흐름에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할 것 같아 보인다. 내가 생각하는 근미래의 희망편은 "뭐? 30년 전에는 미성년자들에게도 소셜미디어를 자유롭게 쓰게 해 줬다고? 진짜 야만적이었구나."에 가깝지만,' 작은 영화는 앞 세대의 오페라가 되어버리고, 종이책은 앞 세대의 미술작품이 되어버린' 버전이 좀 더 현실성 있게 느껴지는 것이 내가 요즘 좀 무기력해서 그런 거라면 좋겠다.


아, 그전에 전쟁이 나거나 기후위기로 문명이 한 번 싹 재정비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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