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사진은 2011년 방송 됐던 <무한도전>의 한 장면이다. 흔히 방송인들이 '좌상단'이라고 부르는 화면 왼쪽 위의 프로그램 로고 위치가 좀 이상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은 두 번째 <놀면 뭐하니?> 화면처럼 최대한 바깥쪽에 바짝 붙도록 배치한다.
비디오 편집툴이나 인쇄물의 디자인 프로그램을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프로그램에는 대부분 '세이프가이드'를 설정하는 기능이 있다. 인쇄물의 경우는 종이에 꽉 채워 출력했을 경우 잘려나갈 위험이 있는 영역을 알려준다. 비디오의 경우 최근에는 다소 의미가 없어졌는데, 과거 브라운관 시절에는 모니터의 굴곡 때문에 화면의 끝쪽으로 갈수록 왜곡되거나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왜곡 없이 안정적으로 표시되는 영역을 참고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방송국의 경우는 '흘림자막'이라고 부르는, 방송화면 최하단에 표시되는 자막에 가려지지 않는 것도 중요한 기준이다. <무도>와 <놀뭐> 자막들도 모두 이러한 가이드라인에 맞춰 배치된 것이다.
그중 <무한도전>의 저 이상한 좌상단 로고 위치는 표준기술의 발달과 아직 이를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을 고려한 결과다. 2011년은 이미 방송제작 설비와 기술이 16:9의 HD기준으로 갖춰진 지 오래였고, 모든 방송을 이 기준으로 제작하고 있었다. 그 전의 방송은 4:3 비율이었는데, 지금은 4:3 화면이라고 하면 <카이스트>나 <전원일기> 같은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지지만 KBS에서 마지막으로 4:3 비율의 드라마를 제작한 것은 2007년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추억하는 <내 이름은 김삼순>도 2005년작으로 4:3 드라마였다. (아 그것도 충분히 까마득하다고...?)
SBS <카이스트>, MBC <내 이름은 김삼순>
TV는 쉽게 바꿀 수 없는 고가의 가전이다. 2007년 전후로 대부분의 방송이 HD로 전환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4:3 비율의 오래된 TV를 사용하고 있는 가정이 많았고, 공공재인 전파를 사용하는 공영방송은 이러한 시민들을 대강 무시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일정기간 과도기를 가지기로 하고, HD로 제작은 하되 내용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정보들은 4:3 비율의 TV로도 안전하게 보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16:9 화면에 4:3 기준으로 자막이 들어가니 위치들이 영 이상했던 것이다.
최근 넷플릭스 등으로 방송을 볼 때 한국어 방송도 한국어 자막을 켜놓고 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이때 보통 CC(closed caption,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자막)로 선택할 수 있는 자막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음향설명 자막이라 대사뿐 아니라 (박수 소리), (자물쇠 여는 소리) 같은 음향 지문들도 표시가 된다. 처음에는 한국어 CC의 존재 이유를 모른 채 그냥 자막이 편해서 보던 사람들이 '이런 불필요한 설명은 왜 나오는 거냐'며 불만을 얘기하기도 했는데, 점점 그 이유가 알려져 가는 듯하다.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
실제로 대부분의 유튜브나 예능 프로그램들은 한국 사람이 등장해 한국어로 말하지만 거의 모든 말을 자막으로 받아 적어준다. 그래서 방송을 보지 않고 캡처된 '짤'들만 이어서 봐도 내용 대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익숙해지면 자막이 없는 영화나 드라마는 한국어 대사라도 왠지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다만 한국어 자막을 켜놓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정말로 '한국어 대사가 안 들려서' 자막을 절실하게 활용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들은 대부분 배우의 발음을 지적한다. 발음이 뭉개져서 자막이 없으면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건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는 거다. 어찌 보면 한국어 CC가 존재하는 목적에 충실히 부합하는 이유다. 물론 모든 배우가 발성 발음이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최근 곳곳에서 언급되는 유의미한 설명을 들어보면 배우들 입장에선 좀 억울할 법도 하다.
한동안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최은아 음향편집기사의 인터뷰(from <영화하는 여자들>, 좋은 책입니다)에서는 촬영현장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동시녹음 기사의 힘이 약해서 배우에게 붐 마이크가 충분히 가깝게 붙지 못한다는 거다. 카메라에 걸리면 NG니까. 이 문제는 최근 들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후시녹음으로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하다. 오디오가 깨끗하게 들리는 드라마나 영화의 대부분은 배우가 후시로 다시 입힌 목소리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입에 딱 맞아서 아닌 것 같아도 요즘의 배우들은 후시 연기도 기가 막히게 하신다.
다른 이유로는 기술의 앞선 발전이 다시 한번 언급된다.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가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상/음향 설비를 갖추고 있고,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과 제작사는 자신들의 작품을 최고의 컨디션으로 완성하고 싶기 때문에 이러한 영화 설비를 기준으로 믹싱을 한다. 재작년 이슈가 되었던 <승리호>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인데, 극장의 돌비 애트모스 기준으로 믹싱한 사운드를 가정의 일반 TV 스피커로 듣다 보니 뭉쳐지거나 덮여버리는 소리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플랫폼을 바꿔 다시 판매하거나 옮길 때마다 거기에 맞춰 믹싱을 다시 해야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경우는 개인이 가진 스피커에 따라 전혀 다른 소리를 듣게 되는 셈이다.
최근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기간 음악을 작업하는 사람들은 믹싱실에서 마스터를 만들 때 '자동차 테스트'를 한 번씩 거쳤다. 자동차의 평범한 '카 오디오'로 믹싱한 결과물을 들어보는 것이다. 믹싱실은 최고의 설비를 갖추고 있으니 모든 소리가 훌륭하게 들리겠지만, 그 음악을 듣게 될 모든 사람이 이런 설비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가장 음악을 많이 듣는 공간인 자동차에서 들어도 준수한 결과물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PD들도 방송 자막의 크기 등을 확인할 때,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스크린인 스마트폰으로 파일을 옮겨서 확인해보곤 한다. TV 모니터로는 충분해 보였어도 사람들이 많이 보는 스마트폰 모니터에서 너무 작으면 문제가 된다. DI 색감이나 오디오도 마찬가지다. 작업은 가장 최고의 환경에서 하지만, 가장 열악한 장비와 세팅에서도 본질적인 부분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가장 열악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도 충분히 즐거워야 하는 것이 TV PD들에게는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영화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예언이 쉬지 않고 나온다. 내로라하는 감독들은 영화를 향한 유언장 같은 영화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영화계 사람들은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해도 제작되는 영화의 편수나 예산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무섭게 실감하고 있다. 이제 이 판의 가장 큰 예산은 점점 영화가 아니라 시리즈물로 옮겨가고 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영화는 가장 평등한 향유의 공간이었다. 영화 티켓값이 비싸지기도 했고, 좌석별로 몇 천 원씩 가격 차등을 두는 시스템이 도입되기도 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극장은 누가 어떤 집에 살고 있고 무슨 차를 몰고 있든 상관없이 모두 같은 좌석에 앉아 최고의 음향과 영상 설비로 영화를 감상하는 공간이었다. 내가 두 평 짜리 방음도 안 되는 고시원에서 조악한 14,000원짜리 이어폰과 휴대폰을 쓰며 살든, 아니면 80평대 아파트에 살며 85인치짜리 최고급 TV를 가지고 살든, 극장에 오면 모두가 똑같은 화면에 똑같은 음향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영화 <원스>
그게 점점 시리즈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은, 이제 같은 작품도 내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 경험을 할 일이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고의 컨디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리즈물 제작자들은 저 이상한 좌상단 위치를 감수하면서 아직 HD TV를 사지 못한 4:3 TV의 소유자들을 배려해 줄 생각이 별로 없을 거다. 영화 티켓값은 똑같이 1만 원을 내면(지금은 거의 2만 원) 똑같은 환경에서 감상할 수 있었지만, 넷플릭스는 똑같이 월 최고 구독료 17,000원을 내도 전혀 다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 덕분에 아마 멀지 않은 시기에 넷플릭스 시리즈도 극장처럼 최고의 환경에서 감상할 수 있는 상영관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넷플릭스도 꾸준히 극장 상영이라는 '명예'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훌륭한 넷플릭스 드라마를 조악한 우리 집의 노트북 스피커 말고 최고의 시설에서 감상하고 싶은 사람들도 점점 많을 테니까. 인기 드라마의 마지막 회 단관 상영 같은 이벤트들이 점점 보편적인 현상이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