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의 언어와 역사를 공유하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다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여전히 온라인 서점 일일 베스트셀러 상위권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한강 작가의 책들이 출판계의 기대처럼 독서 문화를 다시 부흥시킬 수 있을지는 살짝 의문이 든다.
가장 원성이 자자한 부커상의 <채식주의자>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읽기는 힘든 서술과 묘사로 가득하고, 비교적 서사와 감정이 강렬한 <소년이 온다>도 명확한 사건의 묘사는 드물거니와 너무 고통스러워서 몸이 아플 것 같은 책이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겠지만, 평소 책을 가까이하지 않던 사람이 노벨상을 계기로 모처럼 집어 들었다가는 오히려 '역시 나랑 안 맞는다'는 심증을 굳히기가 쉽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런 비슷한 증언들이 가끔 들려오던 차에, 그럼 서점 간 김에 한강 말고 다른 책 한두 권을 더 집어 온다면 권할 만한 동시대 한국 문학을 몇 권 적어 본다. 대부분 서사 구성과 인물 묘사가 매력적이고 흥미로워서,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매체에 더 익숙한 사람이 읽는다면 머릿속에 장면들이 쉽게 그려지면서도 문학의 맛을 느끼기 좋은 소설들이다.
사실 대부분 잘 알려진 책들이고, 브런치는 읽는 걸 좋아하는 이들이 찾는 곳이니 새롭지 않을 수도 있겠다. 다만 의외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동시대 한국문학'은 잘 읽지 않는 이들이 많다. 교양으로 남는 비문학이나, 고전, 20~30년 이상 지난 거장들의 작품, 번역되어 들어오는 외국 문학들 위주로 읽는 사람이 꽤 많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이유는 아마 '검증'이 아닐까. 동시대에 쏟아져 나오는 작품은 너무 많고, 읽을 시간은 늘 부족하고, 몇몇 추천이나 수상으로도 그 가치가 다 확인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시대감이나 문화적 맥락이 달라져도 살아남는 이야기들이 가지는 의미가 분명히 있겠지.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당대의 이야기를 읽는 묘한 긴장감과 호흡을 놓치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만큼 '좋다'는 기준은 저마다 너무 다양하니, 무조건 '좋다' 보다는 각각의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의 결을 가진다면 어떻게 비유할 수 있는지를 곁들어 소개해 본다. 나름의 유용한 참고가 될 것이다.
1. 정세랑, <피프티 피플>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의 원작자로 알려진 것 이상으로 동시대 한국문학의 대표적인 스타작가인 정세랑 작가. 장르문학을 연상시키는 유쾌하고 독특한 세계관이 유명하지만, 나에게 그의 대표작은 <피프티 피플>이다. 어느 지역 병원을 매개로 살아가는 50명의 사람들, '피프티 피플'이 서로 어떻게 엮여 있는지 각각의 에피소드를 보여주며 조금씩 큰 그림으로 엮어나가는 구성이 흥미롭다.
보통 영상매체를 좋아하는 것에 비해 소설을 잘 못 읽는 사람들은 소설 특유의 '내면 묘사'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사건이 없고 사변적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피프티 피플>은 비교적 담백한 서술로 인물과 사건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쌓아가는 방식이 이런 이들이게 부담 없이 읽힐 것이다. 살인사건부터 우스꽝스러운 소동극까지 인간사만큼 다이내믹한 이야기들 위로 특유의 따뜻함과 유머감각이 시종 흐른다.
잘 만들어진 HBO의 현대극 같다.
2. 장류진, <연수>
내가 장류진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 묘사에 있다. 모순적이기도 하고 '킹받게' 하기도 하는 인간 군상을 오밀조밀 그려내는데, 너무 짜증 나지만 또 미워할 수 없는 인물들로 가득하다. 소설을 읽으며 소리 내서 웃거나 끙ㅡ하고 신음을 흘리게 만드는 드문 경험을 하게 하는 책.
작가는 등단작에서부터 '판교 문학'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세련된 온도로 풀어내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는데, 최근작인 <연수>에 이르러는 본래의 매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문학적 저변이 한층 묵직하게 넓혀지는 수록작들이 눈에 띄었다.
드라마로 따지면 tvN 같달까.
3.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문학이 다룬다면 어떤 느낌인지 경험하게 해주는 소설. 최진영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생각하면 '오 이런 소재를?' 싶은 생각도 드는데, 읽고 있으면 또 수긍이 된다. 대재앙 이후 문명이 사라진 지구 위 '관계'의 의미를 미세한 문체로 보여주는데,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서로가 아니면 그 밖의 대재앙 이후든 평화로운 세상이든 크게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세상은 언뜻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를 떠올리게도 만드는데, <더 로드>의 인물들이 신화적이라면 <해가 지는 곳으로> 속의 인물들은 한결 더 부서질 것처럼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 거대한 스케일의 이야기와 배경 속에서, 문장들은 속삭이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느껴보시길.
특유의 암울하면서도 섬세한 터치가 A24의 영화로 비유하면 좋을 것 같다.
4.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가장 최근에 등장한, 흥미로운 새 이름. 아이돌 팬덤 문화와 온라인 밈들이 문학을 만나면 이런 모양이 되는구나 싶을 만큼 시대감이 강렬하다. 그만큼 익숙한 듯하면서도 '어 이거 못 본 느낌인데' 싶은 반가움을 주는 소설들. 무거운 주제들을 발랄하면서도 시니컬하게 담아내며, 문장들이 재치와 속도감이 있어서 금방금방 읽게 된다.
제목의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어와 표지의 교차로 때문에 언뜻 '인터체인지'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여기서의 '인터내셔널'은 노동자 혁명과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민중가요 '인터내셔널가'의 인터내셔널이다. '노동 문학'이라고 하면 왠지 손이 안 가는 무게감이 느껴지지만 표제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이 소설책을 통틀어서 가장 유쾌하면서도 뒷맛이 쓸쓸한 작품이다. 최진영 작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가벼워지면 이런 느낌일까.
이토록 적당하게 느껴지는 온습도와 달콤씁쓸한 맛이 JTBC의 드라마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5. 장강명,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세상>
원래는 영국의 드라마였던 넷플릭스의 <블랙미러> 시리즈가 독보적인 상징이 된 이후로 유사한 시리즈가 많이 등장했지만 그만한 존재감을 드러낸 사례는 아직 없는 것 같다. <블랙미러>를 한국에서 아주 잘 만든다면 장강명의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흔히 미래의 과학을 다루는 소설에 붙는 SF라는 장르 대신 STS, '과학사회기술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소설이라는 장르를 표방한다. 기존의 SF도 '공상과학'이 빚어내는 미래의 사회상을 재현하는 고민을 하지만, STS를 표방하는 그의 소설들은 미래의 '사회상'을 훨씬 더 깊이 있고 핍진하게 기술한다. 이미 상당 부분 실현 되었거나 곧 충분히 현실이 될 근미래의 과학기술들이 한국 사회 안에서 어떤 장면들을 만들어 낼지 설득력 있게 그려낸 소설들이 이어진다. 평소 소셜미디어와 칼럼 지면에서도 동시대의 장면들에 솔직한 평을 하는 작가답게, 한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들이 소설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때로 느껴지는 온기들 마저 무기력하고 서글플 만큼.
넷플릭스의 <블랙미러>의 한국문학판 그 자체. 좀 더 엄밀하게는 영국 드라마였던 앞쪽의 더 차가웠던 시즌들.
6. 정대건, <GV빌런 고태경>
앞의 책들 보다는 조금 덜 유명하지만, '영상 같은 소설'이란 소개에는 가장 어울리는 책
영화감독 출신의 작가가 그려내는 영화판 이야기라서, 그 동네가 현실감 있게 그려지면서도 모든 문장이 영화처럼 눈앞에 보이는 소설이다. 시나리오나 콘티를 그대로 글로 옮긴 것 같은 수준. 소설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강렬한 장면들일수록 유독 더 시각적인 묘사가 단단하다. 당연히 술술 읽힌다.
'GV빌런'은 영화나 공연 GV에 참석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안 좋은 기억으로 만들어진 밈이다. 관객과의 대화 질의응답 시간에 제대로 된 질문은 하지 않고 1. 자기 지식이나 이력을 뽐내는데 질문 시간을 모두 쓰거나 2. 감독이 무안할 정돌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질문, 혹은 공격적인 질문을 하거나 3.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배우나 감독의 사생활에 대한 당황스러운 질문을 하는 케이스를 일컫는다. 영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소비되는 이러한 애증의 우스갯소리를 하나의 갖춰진 이야기로 풀어내는 과정이 흥미롭다. 열정과 불안감 사이에서 시달려 본 청춘의 기억이 있거나, 혹은 지금 그런 청춘이라면 더욱 빠져들 이야기.
적당히 대중적이면서도 위로의 메시지를 녹여내는 시선이 명필름의 최근 영화들 같은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