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슈퍼맨>이 빌런을 보여주는 방식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디스토피아의 대조는 유명하다. 그리고 오늘날 『1984』는 완연하게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멋진 신세계』는 이미 이루어졌다. 여기에 대해 사람들은 자주 '오웰은 틀렸고, 우리는 이제 헉슬리를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강명 작가는 이러한 냉소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1984』는 충분히 공포스러웠기 때문에 그 예언의 실현을 막아설 수 있었다. 1984년은 이미 40년 전에 지나갔지만 우리는 지금도 개인 정보와 권력의 감시를 논할 때 '빅브라더'라는 이름을 꺼낸다. 하지만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충분히 공포스럽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헉슬리가 예언한 디스토피아를 막을 수 없었다"는 요지의 말을 남겼고, 나도 여기에 십분 동의했다. 나 역시 두 소설을 모두 읽어보았고, 오웰의 『1984』는 그 충격에서 한동안 허우적거렸지만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페이지가 넘어가는 일도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재앙을 경고하는 예언은 그것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예언이 된다. 설령 그가 광인으로 비웃음 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장강명 작가는 이 '예언'의 이름이 문학이라고 말한다.
(모두 무사해... 전부 그대로야... 결국 돌아왔구나... 우리가 이겼구나. 정말 다행이야! 선생님, 지각해서 죄송합니다! 더 혼내주세요! 하하하!)
이야기는 힘이 있다. 지난 겨울 계엄을 막아선 시민들 중에는 계엄과 유신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세대가 상당수 섞여 있었다는 것은, 공교육의 역사 교육 이상으로 『소년이 온다』, <1987>, <변호인> 같은 이야기의 힘이 컸다고 생각한다. 간혹 비슷한 주제를 너무 얄팍하게 다루었다는 비난을 받는 작품들조차 적지 않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어떤 역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소환되어야 한다. 좋은 의도와 프로파간다가 예술을 압도하는 일은 그 자체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겠지만, 동시에 이야기의 형식으로 역사를 소환하려는 모든 시도가 항상 완숙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어떤 권력들은 출판과 영화와 같은 이야기 산업을 권력의 진영으로 포섭하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나면, 아예 이야기 산업 자체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고 뒤흔들기 시작한다. 한국도, 미국도.
오랜 세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안전한 빌런'은 나치였다. 폭력의 스펙터클이 잔여물 없는 쾌감을 얻으려면 그 대상이 이론의 여지없는 명백한 오답이어야 하고, 인류역사에 나치만큼 좋은 선택지는 없다.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이 동의하기 어려운 의견을 만날 때면 반사적으로 나치와 히틀러의 이름을 꺼낸다. 역사에 실존했던 악마는 모든 이가 편리하게 활용하기 좋은 반례가 되었다.
그 '안전한 빌런'은 냉전의 파장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종종 소련이기도 했다가, 그 이후에는 또 꽤 오랫동안 정체가 불분명한 아랍권의 사막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그랬던 것이 이제 대부분의 영화가 그리는 공포는 '정당하게 권력을 획득한 파시즘 정치인'이거나 '통제 불가능한 글로벌 테크 기업 관종'이다. '슈퍼맨' 시리즈의 숙적 '렉스 루터'는 1940년에 처음 등장했으니 처음에는 딱히 특정인을 상상한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오히려 그 자리에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가 제 발로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영향은 선후가 뒤섞인 채 서로 주고받기 마련이고, 이번에 개봉한 <슈퍼맨>의 '렉스 루터'는 명백하게 일론 머스크다. 렉스 루터 그 자신의 설정은 둘째치고 그의 밑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이 더욱 그렇다. 나치와 소련이 그 자리에 있을 때는 엔지니어들이 점프 수트와 제복을 입었지만, 이제 렉스 밑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은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애자일한 검은 티셔츠와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스포티파이를 틀어놓고 일한다. 이들은 순간순간 윤리적 고민에 부딪히지만 당장 눈앞의 기술적 성취에 열광하느라 그런 고민은 이내 잊어버린다. 테크디스토피아는 이런 관성 속에 점점 고착화 되어간다.
일론 머스크 개인의 성취와 별개로, 그가 세계의 아이콘이 되는 과정에 2008년 개봉한 <아이언 맨> 시리즈의 흥행이 큰 기여를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의도적으로 글로벌 테크 군수기업 대표 '토니 스타크'와 자신을 동치하며 더욱 보란 듯이 기행을 전시했고, 그즈음 출시된 테슬라의 제품들은 이러한 동일시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아이언 맨>이 신호탄을 쏘아 올린 세계적인 마블의 시대는 '토니 스타크'의 희생으로 장식한 '인피니트 사가'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기점으로 하락세에 접어들었지만,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에는 딱히 스스로를 동일시할 것 같지 않은 일론 머스크는 이제 헐리우드 빌런의 단골 모티브가 되었다. 그의 성취와 행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인류는 한 번도 작금의 테크 재벌들처럼 통제 불가능한 권력을 다뤄 본 경험이 없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들은 계속 빌런의 자리에 호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트럼프를 연상시키는 파시스트 빌런, 머스크를 연상시키는 테크재벌 빌런은 이제 슬슬 진부하게 여겨질 정도지만, 이야기는 힘이 있다. 얄팍할지언정. 2025년의 <슈퍼맨>은 오락적으로 훌륭한 영화다. '슈퍼맨'의 중요한 정체성은 지금껏 '절대 선'과 '절대 강함'이었고, 이는 <슈퍼맨> 시리즈를 비롯해 마블의 <캡틴마블>이 지루해지는 치명적인 요소다. 결함이 없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스펙터클은 쾌감이 없다. 제임스 건은 영리하게도 '절대 강함'을 다소 희생하는 대신, '절대 선'이라는 정체성은 오히려 더 극단으로 밀어붙여, 이를 답답하고 나이브하고 촌스러운 결함으로 보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테크 재벌의 시대에 선함이란 이토록 결함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조금 뻔하고 논리가 좀 부족하더라도, 기행을 일삼는 통제 불가능한 권력에 대한 경고와, 답답할 정도의 선함을 추구하는 인물을 강렬하고 화려한 스펙터클 위에 태워 각인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역할을 한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먼지 구름 속에서 조용히 날아오르는 슈퍼맨의 실루엣 위로, 시리즈를 상징하는 OST의 메인테마가 장쾌하게 울려 퍼질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 속고 싶은 마음을 허락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는 쌓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