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2019년 8월 28일
인연은 어디서 시작될까? 그냥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연주회 가기를 즐긴다는 것만으로 가까워진 그녀, A. 어쩌면 이번 유럽 여행은 그녀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심상하게 흘러가던 어느 날, 워킹 비자로 독일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온 A는, 가게 되면 그동안 궁금했던 독일의 음악회들을 마음껏 가볼 생각에 들뜬 듯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그녀는, “조성진 님 독일에서 연주회 자주 여시니까, 혹시 길에서라도 마주치지 않을까요?”라며 가능성이 낮은, 그러나 팬의 머리에는 당연히 떠오를 법한 이야기를 조잘거리기도 했다.
그녀의 독일행 이후, 각자의 일에 바쁘다가도 서로의 근황을 카카오톡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교환하던 어느날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살며 프랑크푸르트로 출근하던 그녀가 프랑크푸르트 알테오퍼 연주회장에서 공연을 보고나서 표 인증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온 것이 7월 21일 일요일. 나는 “굿굿요(엄지)(엄지)”라는 메시지에 덧붙여 가볍게 한 마디를 보탰다. “난 언제 가면 돼요?” 그러자 이제까지 공연을 함께 보러가고, 식사하고, 카드를 교환하면서 늘 존대를 해온 그녀가 앞뒷말 없이 답했다. “8월 29일”.
그리고 다시 존댓말로 돌아간 그녀가 말했다. “조성진 님 공연 때 오세요, 비스바덴(Wiesbaden)에서 해요”라고. 스크린샷을 찍어 보내준 공연장의 좌석표의 남은 좌석에는 그녀가 직장 동료들과 예매했다는 세 자리의 옆 한 자리가 윙크라도 보내는 양 남아있었다. 그 빨간색으로 채워진 빈 좌석을 나타내는 네모칸을 봤을 때보다도, “8월 29일”이라는 날짜를 봤을 때, 내 마음은 벌써 공항으로 출발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어떤 초대장을 받은 것처럼. “그래, 이참에 가는 거야!”
7월 24일 카카오톡 대화를 확인해보니 그 다음 갈 음악회 일정을 이미 줄줄 늘어놓고 있는 중이다. “31일 유자왕, 정명훈, 드레스덴”, “1일 2시 에센바흐 베를린 오픈 리허설, 6시 유롭스키, 베를린필하모니, 슈트라우스, 그림자 없는 여인 오페라”. 암호와 같은 단어의 나열로 표현되는, 당시 내가 폭풍 검색했던 음악회들은, 그대로 나의 스케줄 표가 되어 나의 여행길을 인도해 주었다. 13박 15일에 최소 6회의 음악회를 관람할 독일 음악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왕복 비행기와 첫날의 호텔을 예약하고, 비스바덴에서 A와 함께 지낼 에어비앤비를 정하고, 비스바덴 이후 바로 드레스덴으로 가는 기차편을 사버렸다. 모든 것은 인터넷으로, 모바일로, 카드 전자결제로 착착 진행되었고, 그런만큼 돈은 쉽게 술술 빠져나갔다. 프랑크푸르트를 ‘프푸’라고 귀엽게 줄여서 부르게 된 현지인 A는 다른 잔소리 없이 “기차표는 하루하루 비싸지니 일정이 정해지면 최대한 빨리 끊어놓으라”는 것과, “‘프푸’ 중앙역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는 것이 편할 것이다”라는 두 가지를 조언했는데, 이 두 가지는 여행 내내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아주 유용한 기준이 되어주었다.
드디어 도착한 프랑크푸르트에서, A가 고맙게도 역에 나와주었다. 아직 해가 떠 있을 때라 이곳 저곳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는 사실 별로 볼 것은 없지만요.” 로컬이 다된 말투로 그녀가 말했다. “피자나 샌드위치 같은 것 사서, 마인 강변 가보실래요?” 서울에 놀러온 외국인이 패키지로 서울에 온다면 명동이나 강남을 가겠지만, 서울 토박이인 ‘나’의 친구인 외국인이 온다면 나도 당연히 한강 산책을 같이 하자고 권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인 강변’은 더욱 괜찮은 아이디어로 여겨졌다. 무언가 현지인의 일상 같은...
함께 거닐며 본 마인 강변엔 과연, 따스한 햇살의 오후를 즐기는 프랑크푸르트 사람들이 영화 속의 엑스트라들처럼 이것 저것을 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패들보트를 타기도 하고, 샌드위치에 맥주를 든 전형적인 모습으로 벤치에 머물기도 하면서.
늘 외국 공항에서 내린 직후에는 내가 영화 속으로 갑자기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서울에서는 평소에 10명 이상 한꺼번에 만나기 힘든 서양인들 한가운데에 갑자기 덩그러니 놓이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평균키가 남자는 178센티미터, 여자는 165센티미터라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키가 갑자기 커지고 다리가 길어진 느낌도 이런 낯섦에 한몫 했던 것 같다. 한국에선 키가 큰 편인 내가, 갑자기 아담하게 느껴질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