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절대 이해 불가능성

by 고승환


친구가 울면 일단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 눈물이 슬픔의 눈물인지 기쁨의 눈물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눈물이 분노의 눈물인지 안도의 눈물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수 년을 함께 산 연인의 눈물에도 무슨 일이냐며 반드시 물어야만 알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한다고 착각하지만 이는 위태로운 착각이다. 타인은 언제나 물음표다. 우리가 이해했다고 여기는 것은 타인 그 자체가 아니라 나의 경험과 언어로 오만하게 재구성된 지극히 사적인 해석본에 불과하다.


두통을 예시로 들어보자. 나의 두통은 실제로 아프지만 타인의 두통은 추상적이다. 내가 느끼는 두통과 네가 느끼는 두통이 다를 수 있다. 두통이라는 같은 말을 사용하지만 그 단어가 가리키는 경험의 질감과 깊이가 같은지 영원히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두통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사용한다. 내가 아프다고 할 때의 그 아픔과 네가 아프다고 할 때의 그 아픔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언어는 우리를 연결하는 동시에 격리시킨다.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우리를 같은 우산 아래로 불러들이면서도 실제로는 각자 다른 비를 맞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고독감.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듯 완벽한 사적 언어는 불가능하다. 나의 아픔과 당신의 아픔이 같은 감각을 공유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며 이 세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두통을 느끼는 것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고 다른 모든 이는 전혀 다른 감각을 두통이라 부르며 살아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아픔과 너의 아픔이 현상학적으로 동일한지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관계해야 하는가? 이해하려는 욕망 자체를 유예해야 한다. 분류하려는 충동을 억제하며 이미 알고 있는 이름으로 서둘러 불러버리는 습관을 경계해야 한다. 타인은 특정 형용사로 정의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형용사의 범주를 끊임없이 벗어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이질성을 견뎌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 이질성의 견딤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포용과 침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타인의 세계가 내 세계를 잠식하고 내 호흡을 방해할 때는 과감히 경계를 그을 줄도 알아야 한다. 무조건적인 포용은 미덕이 아니라 자기 파괴다. 타인의 세계를 존중한다는 명분 아래 나를 소멸시키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경계의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의 고유함을 지켜내야만 한다. 이해 불가능성은 모든 것을 허용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타인의 다름을 존중한다는 것과 타인의 폭력을 수용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나와 너는 구분되기 때문에 관계할 수 있고 그 구분의 차이 덕분에 만남이 의미를 갖는다.


타인은 물음표다. 타인은 앞으로도 영원한 물음표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이 영원한 물음표라면 매일 새로운 답을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타인은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다.


이제 사랑을 다시 정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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