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블루스크린

by 고승환

요즘 글을 안 쓰느냐는 말을 들었다. 흠. 생각해 보면 요즘 글을 안 쓰는 것 같다. 최근 들어 기껏 쓴 거라곤 술 마시고 놀러 다니는 사진 밑에 시시콜콜한 농담거리를 덧붙인 게 전부다. 문장이 아니라 캡션을 구겨 넣은 것이다.


행간을 읽되 행간에 써넣어라. 애들러가 한 말이다. 읽기란 아주 미세한 쓰기 행위이고 읽기와 쓰기는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요즘 나는 이 말을 실감한다. 요즘 내가 쓰지 않으니 읽지도 않게 되더라. 읽지 않으니 다시 쓸 수도 없지.


왜 요즘은 쓰지 않는가. 이유는 여럿일 테지만 어쩌면 지금의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안도 줄어들고 마음도 잠잠해지니 뭔가를 붙들 필요가 없어진 것이 아닐까. 기록하려는 충동이 사라진 게 아니라 붙잡아 구해낼 무언가가 줄어든 것이다.


최근 친구의 글을 읽었다. 글의 요지는 글은 불행한 사람이 쓰기 마련이고 그래서 글을 좋아한다는 것은 곧 불행한 글을 좋아한다는 뜻이었다. 다소 과감한 요약이지만 요지는 분명했다. 글은 대개 아쉬운 사람이 붙들고 늘어진다. 세상만사 팔자 좋은 사람들은 굳이 쓰지 않는다. 그들을 읽는다. 지금 이 자리에 머문다. 반대로 부족한 사람들은 쓴다. 벗어나려 하고 견뎌내려 한다.


사람들은 문학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글을 풍요의 부산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장 단단한 문장은 가장 오래된 결핍에서 나온다. 내가 여태껏 써온 문장들도 대체로 부족과 결핍에서 나왔다. 끝내 잡히지 않던 것들이나 이미 떠나간 것들, 한때 내 것이었으나 상실코만 것들. 사랑, 외로움, 불안, 희망, 오래된 두려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최근 들어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삶이 잠시 균형을 찾았다는 소식일 수 있다. 아니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충동과 결핍을 흘려보내고 있었을 수도 있다. 대화나 산책, 술, 방탈출(?). 글 밖의 통로가 더 효율적일 때도 있다. 그동안 글은 뒤로 밀려난 것이다.


여기까지 자각하는 데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그래서 다시 써보려고 하는데 마땅한 글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글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쓸까, 하는 고민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삶과 세계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막혔다는 뜻에 가깝다. 학교를 오가며 지하철에서 마주친 표정들이나 카페에서 엿들어버린 대화 한 조각에서 단어나 문장을 건져 올리곤 했는데 쓰기를 멈추니 그 연결이 한꺼번에 끊어졌다.


모든 것이 그냥 이미지다.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못할지도 모르는 이미지들을 그냥 흘려 보내버렸다. 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를 바가 없지만 문제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해 내려는 시도 자체가 사라졌다는 거다. 이 시도가 사라진 자리에는 즉각적인 자극들이 들어왔다. 텍스트보다는 이미지, 이미지보다는 비디오. 길고 느린 문장 대신 짧고 밝은 순간의 즐거움이 더 쉬웠다.


그러다 보니 읽기는 자연스럽게 멈췄다. 쓸 마음이 없으니 읽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간신히 책을 펼치면 공허함만 느껴지고 활자 위에서 내 초라함을 확인하는 시간만 자꾸 길어졌다. 나도 한때는 작은 문장 하나에도 심장이 뛰곤 했었는데 말이다. 요즘은 좋은 문장을 읽어도 부러움에서 멈춰버린다.


각설하고 돌아오면 글은 써야겠고 그래서 어찌저찌 노트북 앞에 앉아는 있는데 말한 대로 글감이 없다. 대부분 눈치챘겠지만 나는 글감이 없어서 그냥 글감이 없는 것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경험을 기록하고 쓸 것이 없다는 상태를 포획해 보려 한다. 빈자리 그 자체를 주체로 돌리는 것이다.


생각을 돌려보면 쓰고 싶음에도 글감이 없다는 이 난감함 역시 결핍의 한 종류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이것을 결핍이라 부를 수 있다면 나는 결핍을 붙잡아내고자 글을 쓰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고 붙잡아 기록하는 순간 나는 다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결핍에 이름을 붙이는 일 자체가 이미 쓰기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긴 망설임에 비해 이 전환은 짧다. 아 내가 지금 쓰고 있구나.


막연하던 생각들이 구체적인 문장의 언어로 번역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쓸 게 없다며 투정 부리던 내가 내 투정을 적어가는 와중에 이미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다. 결핍에서 출발한 문장이 스스로를 부정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의 복원력은 대단하다. 한 번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워두면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글쓰기도 그런 것 아닐까.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던 나도 몇 문장 시작하고 나니 금세 리듬을 되찾았다. 결핍을 토로하면서도 나는 이미 그 결핍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있다. 글감이 없다는 투정이 글감이 되고 쓸 것이 없다는 고백이 바로 쓰여진 문장이 되는 문학은 이렇게 자기모순을 통과하면서 스스로를 구원한다. 이래서 내가 문학을 못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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