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데르트바서와 숲(3)「자연과의 평화협정」로 읽는 훈데르트바서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에게 「자연과의 평화협정(Peace Treaty with Nature)」은 선언문이라기보다 형식의 전환이다. 자연을 사랑하자는 호소문이 아니라, 자연을 정치적 상대로 세우는 문서—즉 ‘계약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시도다. 그래서 이 텍스트의 급진성은 “무엇을 말했는가” 못지않게 “왜 하필 협정인가”에 있다. 그는 자연을 풍경이나 자원(resource)이 아니라, 인간보다 “우월한 창조적 힘(superior creative power)”으로 부르며 인간의 의존을 먼저 적는다. 이 첫 문장은 곧바로 협정의 논리를 정한다. 우리는 조건을 정하는 쪽이 아니라, 조건을 배워야 하는 쪽이라는 설정이다.
이때 ‘비’는(제1부가 감각의 문을 열고, 제2부가 설계의 실패를 추궁했다면) 제3부에서 법적·윤리적 매개가 된다. 비는 “자연이 지금도 작동한다”는 사실을 매번 갱신하는 신호이고, 동시에 도시의 표면을 ‘관할권’의 문제로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훈데르트바서가 협정의 핵심을 7개 항목으로 압축했을 때, 그 항목들은 정책 목록이 아니라 주체를 바꾸는 절차—누가 말할 자격을 갖고, 누가 무엇을 되돌려줘야 하며, 무엇을 참아내고(tolerate), 무엇을 다시 결합(reunite)해야 하는지—로 읽힌다.
협정의 1항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자연의 언어를 배워 그녀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learn the language of nature … communicate with her).”
여기서 언어는 감상(“자연을 사랑하자”)이 아니라 합의 능력의 조건이다. 즉, 협정은 도덕 감정의 총량으로 체결되지 않는다. 그는 자연을 ‘설득해야 할 대상’으로 두지 않고, 인간이 먼저 청취와 번역의 규율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조항이 서문처럼 놓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연을 대상화한 채로는 그 어떤 ‘친환경 합의’도, 결국 인간 내부의 행정 문서로 끝나기 때문이다.
환경윤리학자 Nir Barak은 훈데르트바서의 사유를 “생태적 자아(ecological self)”의 확장으로 읽으면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 옷·건축·도시·사회/정치 환경 같은 ‘층위’가 끼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자연과의 관계는 순수한 내면 윤리가 아니라, 매개된 층(피부들)을 통해 조직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을 따르면 1항의 “언어”는 자연의 로맨틱한 속삭임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둘러쓴 매개층(건축·도시·제도)을 다시 읽는 능력에 가깝다. 협정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매개층을 먼저 교정하라고 요구한다.
2항은 가장 노골적인 권리 문장이다. “하늘 아래 수평인 모든 것은 자연에 속한다(all that is horizontal under the sky belongs to nature).”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경 제안이 아니라 관할의 선언이다. 수평면(지붕·도로·광장)은 인간 소유권이 먼저가 아니라 자연의 권리가 우선한다는 주장, 즉 “도시에 자연을 ‘넣어주자’”가 아니라 “도시가 점유한 것을 돌려주자(restore territories to nature)”로 문장이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훈데르트바서식 문법에서 비는 이 조항의 집행관이다. 비가 닿는 순간, 표면은 더 이상 건축의 장식이 아니라 자연과 도시가 충돌하는 접면이 된다.
이 조항이 오늘 더 직접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친환경’이 너무 자주 추가 옵션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옥상녹화·빗물정원·침투성 포장은 종종 “하면 좋은 것”의 목록으로 밀려나지만, 2항의 톤은 정반대다. 그는 이것을 ‘선택’이 아니라 점유의 시정으로 말한다. 그래서 이 협정은 “도시는 무엇을 할 수 있나?”가 아니라 “도시는 무엇을 반환해야 하나?”로 질문을 바꾼다.
3항은 단 한 문장으로 도시의 통치 미학을 뒤집는다. “자발적 식생(spontaneous vegetation)을 용인하라(tolerate).”
‘용인’이라는 동사는, 자연이 도시로 들어오는 것을 허가해달라는 예의가 아니다. 오히려 도시는 그동안 자생을 불량·오염·관리 실패로 낙인찍어 왔고, 그 낙인이 비의 흐름과 흙의 회복을 계속 막아왔다는 고발에 가깝다.
이 조항이 제2항(표면의 반환) 다음에 오는 것도 중요하다. 표면을 돌려주되, 그 위를 다시 통제하려 들지 말 것. 즉 반환 다음은 방치가 아니라 용인이라는 통치의 절제다.
4항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창조성과 자연의 창조성을 “재접근하고 재결합하라(reapproach and reunite).”
이 문장이 자주 “예술가다운 말”로 소비되지만, 사실은 제2·3항을 실현하기 위한 구조 명령이다. 자연은 도시의 외부에 있고, 도시는 자연을 다루는 기술만 있으면 된다는 분리—그 분리가 “재앙적 결과(disastrous consequences)”를 낳았다고 못 박는다.
즉 재통합은 감성 통합이 아니라 물·흙·식생·거주의 연결을 다시 설계하라는 요구다. (제2부에서 다룬 배수·하수관의 단절이 바로 이 ‘분리’의 형태였다는 점만, 여기서는 암시로 남겨두는 게 제3부의 역할입니다.)
5항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조화롭게 살아라(live in harmony and according to the laws of nature).”
여기서 ‘법칙’은 인간이 자연에게 부여하는 규범이 아니라, 인간이 이미 의존하고 있는 선행 조건이다. 이 조항의 핵심은 ‘조화’라는 단어가 아니라 “according to”에 있다. 자연의 법칙은 협상 테이블의 안건이 아니라, 테이블의 바닥이다. 협정은 결국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보호할까”가 아니라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수 있나”를 묻는다.
6항은 훈데르트바서 윤리의 경계선이다. “우리는 자연의 손님(guests)이며, 행동해야 한다(we must behave).”
이 문장은 자주 교훈처럼 읽히지만, 사실은 주권의 철회다. 손님은 규칙을 만든 쪽이 아니다. 손님은 집을 바꾸는 대신, 집의 리듬을 배운다. 훈데르트바서는 이 조항에서 인간을 “지구를 파괴한 가장 위험한 해충(the most dangerous pest)”이라고까지 밀어붙이며, 인간이 스스로를 “환경적 경계 안으로 되돌려놓아야(put himself back into his environmental barriers)” 지구가 재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협정은 자연과의 ‘평화’가 아니라, 인간 내부의 **권력 감각(통제-소유-가속)**을 해체하는 작업이 된다.
이 지점에서 연구자 평가는 갈린다. Nir Barak처럼 이를 환경윤리의 풍부한 자원으로 읽는 쪽은, 그가 자아를 자연까지 확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시·사회·정치의 층까지 포함시킨다는 점을 높이 산다.
반면 건축·도시 연구 쪽에서는 그의 실천이 종종 “유토피아적 순간들(utopian moments)”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이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통합되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Paul Kraftl의 Hundertwasserhaus 연구는, 그 건축이 ‘비범함’과 ‘일상적 요구’ 사이에서 복잡한 긴장을 만든다고 짚는다.
즉 협정의 윤리가 매력적인 만큼, “그 윤리가 도시의 제도·유지관리·거주 현실에서 어떤 형태로 지속 가능한가”는 별개의 कठिन문으로 남는다.
마지막 7항은 “다시 쓰레기 없는 사회(a society free of waste)”를 말한다.
이 조항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 결백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훈데르트바서는 ‘깨끗함’보다 돌아감을 말한다. 쓰레기 없는 사회란 배출이 0인 사회가 아니라, 배출이 경로를 갖는 사회—분해되고 다시 편입되는 사회에 가깝다. (이 관점은 그가 ‘휴머스(humus)’와 퇴비, 생태적 위생을 강박적으로 붙든 이유와도 연결되지만, 제3부에서는 “마지막 조항이 왜 ‘폐기물’로 끝나는가”라는 구조적 의미에 초점을 두는 게 겹침을 피하는 길이다.)
최근에는 그의 건축/사상이 “키치(kitsch)와의 유혹” 또는 “표면주의(facade-ism)”라는 비판을 받아왔다는 정리도 나온다.
이 비판을 협정의 7항에 대입하면 질문이 더 또렷해진다. “쓰레기 없는 사회”는 포스터 한 장의 미사여구로도 소비될 수 있다. 하지만 협정이 요구하는 것은 슬로건이 아니라 경로의 설계다. 경로가 없으면 아름다움은 장식이 되고, 장식은 제도를 대신하지 못한다.
「자연과의 평화협정」의 7개 조항은 놀랄 만큼 짧다. 그러나 그 짧음은 단순화가 아니라, 논리를 가장 잔혹하게 압축한 형태다.
1항은 자격을, 2항은 반환을, 3항은 용인을, 4항은 재결합을, 5항은 선행 법칙을, 6항은 주권 철회를, 7항은 경로 회복을 요구한다.
그래서 제3부에서 비는 더 이상 풍경도, 경고도, 취향도 아니다. 비는 협정이 효력을 갖는지(발효하는지) 점검하는 집행의 신호가 된다. 비가 닿는 수평면이 여전히 회색의 배제 장치로 남아 있다면, 2항은 위반 중이다. 자생식생이 여전히 ‘관리 실패’로 삭제된다면, 3항은 공문서에서만 살아 있다. 도시가 자연을 파트너로 말하면서도 주권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6항은 끝내 서명되지 않는다.
훈데르트바서의 협정은 결국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도시가 자연을 “보호”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자연은 이미 외부가 된다.
그는 외부를 만들지 않기 위해 협정이라는 형식을 택했다. 자연을 상대방으로 세우고, 인간의 소유와 통치를 제한하는 문장으로, 도시가 스스로를 묶어두려 했다. 그 구속이 가능할 때에만—비가 닿는 표면이 자연의 자리로 되돌아갈 때에만—평화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가 된다.
훈데르트바서의 「자연과의 평화협정(Friedensvertrag mit der Natur)」: 1983년 발표된 생태 선언문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정복’이 아니라 ‘공존’과 ‘화해’의 관계로 재정의하자는 제안. 아래는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