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발전소 일부 전시 1F
대구예술발전소 - 대구 중구 달성로22길 31-12 대구예술발전소
문학서비스센터 - 대구 중구 명륜로23길 14 302호
실패한 그러나 젊은 문학인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어떤 카페는 테이블이 너무 낮았고, 어떤 카페는 등받이 없는 의자로만 꾸렸으며 또 어떤 카페는 음악 소리가 너무 크고 정신 사나워서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다가 도서관, 독서실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그렇지만 일반 카페의 형태를 빚어낸 카페 하나를 드디어 접했다. 이름도 하필 문학서비스센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난 연애들은 다 취향을 논했다. 카페를 왜 가냐고, 돈이 아깝다고 말하는 X에게서 문학을 왜 하냐고, 쓸데없다고 말하는 부모의 얼굴이 보였다. 그곳에는 순진무구한, 심지어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물음표 하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왜 여행을 가? 왜 모임을 해? 이걸 왜 좋아해? 왜 소설을 써? 뭐랄까, 딱히 악의는 없어 보이지만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물음표 하나, 그 하나에 나의 취향이 왜 취향인가를 설명하던 시절이 있었다.
취향은 조절할 수 있어도 완벽해질 수 없는 카테고리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맞춰가면서 원하는 데이트 코스를 짤 수 있기는 하다. 물론 숱하게 싸우거나 비용 문제로 욱할 때도 있겠지만. 혼자서 갈 정도로 좋아하는 것들은 남에게 쉽게 전염되지 않는다. 취향이라는 게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사실 쉽게 성에 차지 않는다. 상대방이 아무리 좋다 좋다 떠들어도 말이다. 약간의 혹 하는 마음은 생길 수 있어도 5초 전에 길바닥에 던진 담배꽁초와도 같은 같잖은 수명이다. 잠깐 불씨는 남아있을 수 있지만 결국은 꺼지고야 만다. 상대방이 안정감을 느끼고, 심장이 뛰는 것을 만끽하는 일까진 물려줄 수 없다. 취향이 맞지 않은 연애는 힘이 들었다. 재미가 없었다. 서로의 취향을 부정하는 사람끼리는 건강한 연애를 할 수가 없다.
나는 하필 혼자서도 책을 읽고 책을 사는 사람이었다. 직업 특성상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독립서점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여행지마다 새로운 책방으로 향했다. 그래서 대구예술발전소 1층에 좁게 마련해놓은 책과 글귀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비는 사람처럼 조금은 절실하고도 애틋한 눈빛으로 이 자리를 꿰었다. 이대로 오려내어서 집으로 들고 가고 싶을 정도였다. 투박한 손글씨로 적힌 <대봉산책> <고스트 북스> <더 폴락> <차방책방> 전부 다 내가 몇 번씩이고 방문한 대구 책방이었다. 혼자서도 틈만 나면 찾던 나만의 취향들.
무릇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연애를 하고 사람을 만난다고 결론 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혼자 하는 것의 즐거움을 영영 잃어버릴까 봐 또는 함께 하는 즐거움이 너무 비대해져 감당이 되지 않을까 봐, 내내 둘이서 하다가 다시 혼자서 하려니 서글프고 먹먹하다 괜히 어색해져 즐길 수 없을까 봐, 그래서 자꾸 짝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걸까? 혼자 하는 것들이 재미가 없고, 홀로서기에 대한 회의감이 발목에서 허리로, 허리춤에서 가슴께로, 가슴께에서 목 끝까지 차오를까 봐 취향을 공유할 만한 짝을 찾고 또 찾고, 그러다가 헤어지고 이별하고 그러는 걸까?
나는 이토록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차라리 내가 둘이었으면 좋겠다고―우스갯소리로 나는 나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달고 다녔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라는 물음 앞에 나는 자연스럽게 나를 떠올렸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고 내가 쓰는 것들을 사랑하고 내가 외로워하거나 내가 그리워하는 것들에 관해―왜?―부터 달지 않는 사람. 나의 취향관에 대해 이해받고자 한 적 없다고 믿었으나 이토록 많은 취향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으려고 한 것 자체가 이미 나는 욕심쟁이라는 증거인 것 같다. 그냥 나는 갑도, 을도 아닌 취향의 연애를 하고 싶다. 이해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