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스의 비밀을 찾아서
실론섬, 그러니까 지금의 스리랑카의 서해안은 북쪽 자프나반도에서 남쪽 해안으로 꺾이는 지점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그 긴 해안 중간에서 좀 더 아래쪽쯤에 수도 콜롬보가 있다. 콜롬보 앞 인도양은 망망대해로, 서쪽으로 곧게 뻗어가면 아프리카에 닿기 전까지 육지가 없다. 뻗어 나간 끝은 아프리카의 케냐에 닿을 것이고 각도를 조금 남쪽으로 하면 마다가스카르, 조금 북쪽으로 하면 소말리아에 닿을 것이다. 실로 광활하고 넓은 바다다. 중세 유럽에서 쓰였던, 바람으로 움직이는 범선으로 여행한다면 달포도 더 걸리는 거리일 것이다. 그것도 계절풍이 항해를 도와주는 계절일 때의 이야기다.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란 사람이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가 보겠다고 선단을 꾸려 포르투갈에서 출항해 대서양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아프리카 서안을 따라 남하하여 그 끝에 이르고, 거기에서 남안을 돌아 아프리카 동해안으로 나아갔다. 다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면서 모잠비크를 지나 케냐의 말린디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시 목적지 인도를 향하여 출항하려고 할 때 운 좋게도 아랍인 안내인 한 명을 만났다. 그의 도움으로 그 망망대해 인도양을 건넜다. 그 계절이 4월이었는데 바로 계절풍이 부는 시기였다. 다 가마 선단이 인도 남서쪽 해안의 캘리컷항에 도착했는데 인도양에서의 항해일수는 23일이었다고 한다. 아주 운이 좋았던, 매우 빠른 항해였다고 한다. 콜롬보와 캘리컷은 말린디항에서 비슷한 거리에 있는데 다만 캘리컷의 위도는 좀 더 북쪽이다.
내가 콜롬보에 살았던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이 그 인도양을 마주하며 서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했을까? 해가 지는 저녁 나절의 그 바다 낙조(落照)를 마주하면 내가 선 자리 근처 건물들의 유리창들이 낙조 반사의 빛으로 붉은 화염처럼 훨훨 타오른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 콜럼버스가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아 지구가 둥글다는 이론을 믿고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가서 인도에 도착하겠다고 선단을 이끌고 출항했다. 그리고 오랜 항해 끝에 지금의 바하마 군도 산살바도르쯤에 도착하였다. 콜럼버스는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하고 곧바로 그가 찾으려고 하는 목표물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목표물은 찾지 못하고 얼마간의 황금과 그곳 원주민 인디언 몇 명과 처음 보는 이상한 것들만을 증표로 가지고 귀국한 때가 1493년이었다.
바스쿠 다 가마는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497년 포르투갈 리스본을 출발하여 아프리카 서안을 항해하여 남단 희망봉에 이르고 아프리카 동해안으로 돌아 인도에 이르는 인도양을 건넌 것이다. 그리고 리스본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2년이 걸렸고 도합 42,000km를 항해했다. 함선 네 척에 170명의 인원으로 출항했는데 돌아왔을 때는 함선 두 척과 생존자 55명뿐이었다.
바스쿠 다 가마가 알려지지 않은 항로를 위험을 무릅쓰고 무모한 항해를 감행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포르투갈 왕들은 왜 그의 항해에 막대한 투자를 했었나? 서쪽 항해를 감행한 콜럼버스의 궁극적인 목표물은 무엇이었나? 이들 이후에도 여러 선단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항구를 떠났고 한 세기가 지난 뒤에는 네덜란드와 영국에서도 선단들이 떠났다. 많은 목숨들이 스러졌다. 그들은 왜 그렇게 죽기 살기의 모험을 감행했을까? 그 이유는 한 가지, 바로 향신료 때문이었다. 콜럼버스가 찾다가 못 찾은 물건도 향신료인 후추였다. 바스쿠 다 가마는 인도에서 그가 목표로 한 ‘검은 보물’ 후추를 싣고 귀국하여 수백 배의 이윤을 남기고 그 자신은 귀족 작위도 받았다. 바스쿠 다 가마의 첫 항해 이후 포르투갈의 다른 원정대 하나가 그가 갔었던 길을 따라 아시아의 다른 곳으로도 가고자 항해를 했는데 이들이 기착한 곳이 바로 실론섬 해안이었다. 그들이 실론섬 남쪽 해안 골(Galle)이란 곳에 이른 때가 1505년이다. 지금은 스리랑카로 불리는 실론은 향신료, 특히 시나몬(Cinnamon)의 원산지인 낙원의 섬이었는데, 포르투갈인이 이렇게 졸지에 들어온 이후 스리랑카는 450년 동안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게 식민통치를 받는 나라가 되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에 의하여 통치를 받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해가 1948년이니까 1505년부터 기산 하면 무려 443년 동안이다. 포르투갈 다음에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이라는 국가들의 순서는 대체적으로 아시아에서 그 나라들이 휘두른 세력의 흐름이다.
골은 스리랑카 남단에서 제일 큰 도시다. 2004년 인도네시아 안다만해에서 발생하여 인도양을 강타한 쓰나미가 스리랑카 해안을 덮쳤다. 스리랑카에서는 4만 명에서 6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수십 만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골은 가장 많이 피해를 본 해안지역 중 하나였다. 사고 후 나는 골을 방문하여 참상의 잔해를 목격했었다. 내가 다녔던 한국 대학에서 보낸 수십 명의 의료진과 함께 의료봉사를 했고, 한국 새마을운동본부를 도와 집을 잃은 이재민에게 주택을 지어주는 등 이재민 구호에도 참여했다. 내가 운영하던 회사에서도 회사 구호금과 직원들이 모은 구호금을 합쳐 몇 번에 걸쳐 구호물자를 보냈다. 내가 회장을 맡고 있던 스리랑카 한인회에서도 구호 쌀을 실어 보내기도 했다.
골에는 더치포트(Dutch Fort)라는 유적이 있다. 이곳은 다국, 다민족의 문화가 녹아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588년 포르투갈이 건설한 방위포트인데 17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점령한 뒤 확장건설을 했다. 그리고 150년쯤 뒤엔 영국이 이들을 내쫓고 영국이 스리랑카를 식민통치했다. 이 더치포트는 역사적, 고고학적, 건축학적 가치의 유산이다. 물론 여기에도 쓰나미가 덮쳐 들어왔지만 다행히 쓰나미에 의하여 훼손된 곳은 크지 않았고 잘 복구되었음을 비교적 최근에 방문했던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부유한 귀족, 특히 왕가에서는 동양에서 왔다고 하는 향신료를 써서 음식을 조리하였다. 그런 신비의 향신료는 이미 로마 시대에서도 쓰여 왔다고 하는데 중세에 들어와서는 아주 귀하게 여겨져 고가를 주어야만 살 수 있는 특별한 물건이었다. 금값보다도 더 비쌌다고 하니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막상 그 물건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질문을 한다면 그냥 ‘아시아에서 왔다’라는 대답이 고작일 뿐 어떤 곳에서 어떤 식물 또는 광물에서 채취되는지도 몰랐다.
음식 조리에 쓰는 수백 가지의 향신료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향초(香草)로부터의 향은 채소 같은 것으로부터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다만 후추와 같은 향신료는 특별히 귀하게 여겨졌다. 후추는 육류의 냄새를 잡아주고 육류를 오래 저장할 수 있게도 해 주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약효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졌다. 또 다른 귀중한 향신료로는 정향(cloves)과 육두구(nutmeg), 그리고 시나몬(cinnamon) 등이 있다. 후추와 시나몬이 인도라는 나라에서 온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지만, 그곳은 너무 멀어 중세 유럽 사람들은 감히 가 보겠다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설사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도 그곳으로 가는 육로는 너무나도 위험한 길이었다. 도처에 강도가 득실대어 지니고 있는 돈이나 물건을 빼앗길 것이 분명하고, 심지어 목숨마저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무리를 지어 무장을 하고 간다면? 가는 길 대부분의 지역이 오스만제국의 이슬람교도의 영역이라 그들은 절대로 길을 열어 지나는 것을 허용치 않을 것이었다.
바다로 가는 길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한 형편 때문에 후추 같은 향신료는 오로지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살 수밖에 없었다. 바다 위에 집을 짓고 사는 베네치아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아랍인,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이 뱃길로 가져오는 그 물건들을 받아 팔았다. 베네치아로 운송되는 물건의 선적지는 대개가 지중해 건너 알렉산드리아와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었는데, 알렉산드리아까지의 육지 운송로는 당연히 사막이다. 아랍의 상인들이 낙타 등에 싣고 사막을 횡단하여 가져온 것이다. 그리하여 베네치아 사람들은 향신료 장사로 돈을 엄청 벌었다. 부르는 게 값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의 대서양에 면해있는 척박하고 작은 땅의 왕국 포르투갈은 인구도 백만이 될까 말까 하는 소국이었고 늘 스페인의 억압 아래 눈치만 보고 사는 변방의 약소국이었다. 오스만제국과 아라곤 공국(스페인) 그리고 베네치아가 장악하고 있는 지중해로는 나갈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고, 망망대해 대서양 저쪽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라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남쪽 아프리카 연안으로 항해하여 그곳 사람들과 작은 교역을 하여 먹고 살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후추나 정향 같은 향신료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그들과는 상관없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웃나라 스페인에서 콜럼버스라는 사람이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고 갈 수 없다고 믿어왔던 망망대해 대서양을 건너 인도를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향신료인 후추를 가지러 갔는데 향신료는 가져오지 못했지만 황금 등 귀한 것들을 가져왔다고 했다. 포르투갈은 조바심이 났다. 포르투갈도 콜럼버스 이전에 아프리카 서해안 남단까지의 항해를 했었던 귀중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주앙 2세가 아프리카에 옛날부터 기독교를 믿는 에티오피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어,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에게 그 나라를 찾을 것을 명하였다. 그는 명을 받들어 아프리카 서해안 남단으로 항해하면서 그곳을 찾아 나섰다. 결국 그는 그곳을 찾는데 실패했지만 최남단 희망봉 근처까지 항해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바스쿠 다 가마가 국왕 마누엘 1세의 후원으로 후추를 찾아 인도양 항해에 나섰을 때 희망봉까지 항해를 한 경험이 있는 바르톨로뮤가 동행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믿고 있는 콜럼버스는 둥근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서쪽으로 향하여 갔지만, 바스쿠 다 가마는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정보를 가지고 아프리카를 돌아가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남쪽으로 출발했다. 훗날 영국에서는 북쪽으로 가서 북극을 돌면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북쪽으로 떠난 선단도 있다. 이 선단은 북극 얼음에 갇혀 거의 모두가 얼어 죽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다 할 수 있지만, 그만큼 그들은 절실했다. 목표는 한 가지, 즉 후추, 정향, 육두구 같은 향신료였다.
어쨌든 포르투갈은 유럽 최초로 인도양 항해에 성공하였고 인도의 후추 공급처를 확보했다. 그리고 계속 선단을 보내 후추를 가져왔다. 바스쿠 다 가마 그 자신도 후일 인도 총독 겸 부왕(副王)으로 임명되어 인도로 3차 항해를 떠났으며 전권으로 인도의 포르투갈 통치 지역을 다스리다가 그곳에서 열병으로 죽었다. 콜럼버스는 그가 도착한 곳이 인도라고 철석같이 믿었고 계속하여 향신료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가 찾으려고 하는 향신료는 찾지 못하고 대신 다른 매운 향신료인 고추를 가져왔다. 몇 차례의 항해를 더 하면서 스페인에 ‘신대륙 발견’이란 영광을 안겨주고 그는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죽을 때까지도 그곳이 그가 목표로 했던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의 유골은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은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한편 포르투갈은 인도로 가는 항해 중에 졸지에 실론이라는 섬에 상륙하게 되었는데, 그곳이 또 다른 향신료인 시나몬의 원산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은 실론을 150여 년 동안 시나몬 공물을 받는 바치는 식민국으로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더치포트의 유적이 바로 그들의 자취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취는 그 포트의 유적만이 아니다. 현재 스리랑카 사람들의 성(family name)에 포르투갈식 성을 가지고 있는 인구 상당한 많다. 내가 알고 지내는 스리랑카인의 상당수가 그렇다. Silva, Fernando, Perera, Almeida, Costa, Fonseka, Corea, Mendis, Cabral, Tissera, Thabraw, Alwis, Dias 등이다. 내가 사장으로 있던 회사에서 “어이, 실바” 또는 “페레라”하고 소리쳐 부르면 아마도 두세 명이 동시에 돌아보리라.
나는 근래까지도 현재의 포르투갈 사람들과 사업과 관련하여 관계를 가지고 교우를 하며 지내왔다. 아프리카 앙골라에서 건설공사를 수행하던 십여 년의 세월 동안 그들과의 접촉은 불가피했다. 앙골라는 과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까닭에 여전히 경제 문화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 많고 많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들어와 산다. 앙골라의 제1 공용어부터가 포르투갈어이다. 특히 식문화는 그대로 전이되어, 앙골라 식단은 포르투갈 식단과 다를 게 없다. 물론 마니오크(카사바)처럼 유럽에 없는 재료로 만든 음식이라면 포르투갈 음식일 리가 없겠지만, 그런 아프리카 전통 음식을 빼면 그렇다는 얘기다. 외식을 한다고 하면 중국식당, 인도식당, 때로는 브라질 식당이 아니라면 나머지는 현지음식, 즉 포르투갈 음식을 먹는 셈이다. 포르투갈의 염장 대구요리, 빠깔랴우(Bacalhau)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웬만한 호텔에서의 아침식사는 대개가 뷔페식의 식단인데 포르투갈의 여러 빵류를 즐길 수 있다.
가깝게 지내고 있던 포르투갈 친구 파울러와 아침식사뿐만 아니라 저녁식사도 가끔 같이 하곤 했는데 그가 말하기를 앙골라의 빵이 포르투갈의 빵보다 더 포르투갈 고유의 빵이라고 한다. 이해가 된다. 변화가 빠른 유럽의 사회보다 아프리카 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느리거나 아예 변화하지 않기도 할 터이니 빵도 그들 고유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수 있다. 파울러는 포르투갈 사람이지만 포르투갈에서 출생한 사람이 아니다. 아프리카의 남동해안에 있는 또 다른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였던 나라 모잠비크에서 출생하였고 거기에서 포르투갈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앙골라에 일자리를 얻어 루안다에 와서 산다. 모잠비크는 앙골라처럼 석유가 발견되지 않은 여전히 가난한 나라로 남아 있어 변변한 일자리를 얻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포르투갈인 부인과 아이들도 루안다에 와서 산다.
애들 교육비가 너무 비싸다고 툴툴대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포르투갈은 관광으로 먹고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주요 산업은 관광이지만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인건비가 싼 편이라 제조업이 그런대로 발달해 있는데 특히 인력 의존도가 큰 봉제산업이 발달하여 있다. 전통적으로 건설부문이 강한 편이라 건설공학 인력도 많은 편이다. 파울러도 건축 엔지니어다. 앙골라 건설프로젝트에 고용되어 컨설턴트 회사의 사장직을 맡고 있다. 전문인력이 부족한 앙골라는 같은 언어로 소통이 편한 포르투갈과 브라질에서 고급전문 인력을 채용한다.
그리하여 앙골라 프로젝트에서 일하는 우리 한국 직원들은 포르투갈에서 흔한 이름의 프란시스, 조아웅 등의 이름을 가진 포르투갈 엔지니어들과 늘 부딪치며 일을 하고 있는데 포르투갈인들에 대하여는 별로 좋은 평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애들은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요. 1분이면 들통날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요. 사과요? 그 친구들은 아예 사과란 말을 몰라요. 아이유우! 지겹고 얍삽한 포르투갈 놈들.”
물론 우리 한국 직원들 말을 그대로 믿어 같이 뇌화부동(雷和附同)할 생각은 없다. 포르투갈 쪽에서는 거꾸로, “아휴! 지겨운 한국 놈들”이라고 뒤에서 욕을 할지 누가 알랴. 그러나 나하고 친하게 지내는 파울러는 좋은 친구다. 무엇보다 흉금을 털고 솔직히 얘기하는 그의 성격이 내 맘에 든다. 그런데 그의 고용주인 앙골라 사람들이 그를 책임자 자리에서 쫓아내어 그는 사직을 하고 별 볼일 없는 다른 회사로 옮겨 갔다.
이제는 옛날 그들을 통치하면서 주인행세를 하던 포르투갈인을 앙골라 사람들이 좌지우지한다. 2010년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등의 나라들이 유동성 부채가 너무 늘어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특히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들의 언어가 통하는 옛 식민지 나라에서 직업을 얻고자 몰려나오고 있었다. 짐승 사냥하듯이 사냥당하여 노예로 팔려 나갔던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들이 그들의 ‘상전’이었던 사람들을 매몰차게 부린다.
앙골라의 수도인 루안다는 한때 노예무역 시절에 아프리카 서안의 가장 큰 노예 송출항이었다. 몇백 년 전 대항해시대에 지금 나의 포르투갈 친구의 조상 포르투갈인들이 향신료를 얻기 위하여 아시아로 항해하여 들어와 얼마나 잔혹하게 그곳 민족들을 겁박(劫迫)하고 도살까지 하며 향신료를 갈취하여 갔는지를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네덜란드, 영국인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것이다. 바스쿠 다 가마가 그의 첫 번째 인도양 항해에서 인도에 도착했던 곳이 서남부 해안의 캘리컷이었다. 그 뒤 포르투갈은 계속된 인도 항해에서 캘리컷뿐만 아니라 북단과 남단 해안의 여러 항구에 배를 대고 후추 등의 향신료를 사면서 교역을 증진시켰다. 그러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제고시켰다. ‘영향력 제고’라 함은 강압적 통제를 의미한다.
1505년에 포르투갈의 마누엘 국왕은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를 첫 인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곳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였던지 그를 총독의 지위를 뛰어넘는 부국왕(副國王)에 해당하는 ‘Viceroy’라는 칭호를 쓰게 했다. 그는 현지 세력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포르투갈의 입지를 지키고자 노력했는데 불과 천여 명의 군사로 수십 배에 달하는 군사로 도전을 해오는 현지 왕국들을 맞아 싸워야 했다.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그의 아들조차 인도 측을 도우러 온 이집트 해군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울분에 찬 그는 귀국길에 병사했다. 포르투갈은 당시 최고의 군사 전략가인 아폰수 데 알부케르크(Afonso De Albuquerque)를 두 번째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포르투갈이 아시아에서 백 년이 넘도록 여러 식민국을 거느리는 ‘상전’의 나라가 되는 토대를 마련한 포르투갈의 군사 전문가이자 정복자였다. 1506년 함대 16척을 이끌고 인도를 향하여 항해하면서 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가 호르무즈 섬을 점령하고 포르투갈 요새를 건설하였는데 그는 페르시아만에 들어간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인도로 와서 캘리컷 북쪽 고아를 침공 점령하고 그곳을 포르투갈의 베이스로 삼았다. 그는 ‘기독교의 수호자’ 역할을 하면서 무슬림을 무자비하게 탄압, 척살하였다. 사실상 그가 싸우는 적은 거기가 호르무즈가 되었건, 인도가 되었건, 그리고 후에 말라카가 되었건, 그보다 훨씬 전의 아프리카 모로코가 되었건 간에 모두 다 이슬람교도였다. 그렇게 보면 이슬람 쪽에서 볼 때 그는 악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무슬림에 의하여 이베리아 반도가 600년을 지배당했었으니까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슬람이 그 당시 인도양에서의 향신료 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현실적인 배경도 있었으리라.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레콩키스타 운동(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국으로의 회복)이 종료된 때가 1492년이니까 불과 20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이기도 하고, 알부케르크 그 자신도 모로코 등지에서 이슬람과 평생 싸워온 전사였다.
1511년, 그는 세계사에 큰 전환 계기를 줄 수 있었던 사건의 단안을 내렸는데 그것은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Malacca)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왜냐하면 말라카는 당시 아시아의 물품이 서쪽 아랍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페르시아, 인도, 아프리카, 오스만, 유럽의 베네치아로 가는 관문의 무역항이었기 때문이다. 아시아 물품이라 하면 곧 향신료가 대부분이다. 그는 그곳을 장악하여 포르투갈 것으로 만들고 인도양을 지배하고자 했다. 말라카 장악을 목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다른 직접적인 이유는 더 깊숙한 동쪽으로 항해하여 말로만 들었던 정향과 육두구의 산지라고 하는 스파이스 제도를 찾아내는데 말라카를 전초기지로 삼기 위함이었다. 한편 포르투갈이 인도 후추와 실론의 시나몬을 독점함으로 인하여 그때까지 지중해를 장악하여 부를 누리던 베네치아와 알렉산드리아는 거의 망할 처지에 처해 있었는데 알부케르크가 말라카를 장악하면 그나마 남아 있던 여력까지도 끝이 날 판이었다. 1511년 4월, 1400명의 군사와 18척의 배가 고아에서 출항하여 벵골만을 건너 말라카 해협에 들어서고 두 달 동안 치열한 공격을 감행하여 말라카 술탄국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해 8월에 점령을 완료했다.
그런데 여기서 포르투갈이 오직 향신료를 얻기 위한 야망으로 어느 나라도 미처 생각도 해 보지 못한 모험을 지구 반대편의 멀고 먼 동아시아에서 수많은 목숨을 담보로 하고 감행하고 있는 것은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될까? 무슨 이념의 실현이라든가,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든가, 생존의 위기로 막다른 곳에 몰려 저항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던 것도 아닌, 고작 먹거리 향신료를 얻기 위하여 부나비처럼 처절하게 뛰어들고 있는 것은 어떻게 기록될까?
그것은 비단 포르투갈뿐만이 아니다. 이후에 포르투갈의 행적을 쫓아다니면서 포르투갈이 차지하고 있는 베이스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자기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을 반복했던 네덜란드와 영국도 똑같은 실상이었다. 그리고 이 향신료의 세계가 세계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동남아시아권의 많은 나라들이 유럽의 식민지가 된 것은 이로부터, 말라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포르투갈이 무력으로 찬탈한 말라카는 포르투갈이 오기 전에 이미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평화롭게 교역을 하던 곳이다. 15세기 초부터 무역교역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세기에 걸쳐 세계의 무역항으로 발전했는데, 카이로, 메카, 아덴의 무슬림과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말린디 등의 동아프리카, 페르시아의 호르무즈 왕국, 인도, 중국, 일본 등 62개 나라에서 온 상인들로 법석대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무력으로 침공하려고 시도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럽의 패권국들이 패권자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바로 ‘부(富)’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들이 부를 얻는 방법은 찬탈(簒奪)로부터였다. 재물을 찬탈하고 노동력을 찬탈했다. 평화롭게 거래에 의한 경제활동을 하는 그곳에 찬탈자가 들어왔고 그로부터 440년 동안 그들의 세계가 되었다. 말라카의 포르투갈 정복자는 숨도 돌리기도 전에 꿈의 스파이스 제도를 찾아 나섰다. 스파이스 제도는 대충 어디쯤일 것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었지만 그곳을 나타내어 주는 해도도 없다. 요행히 스파이스 제도로 들어간다 하여도 정향과 육두구가 있는 섬이 어딘지도 알 수 없다.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다름없을 터였다. 그러나 어쨌든지 아랍인들이 그곳의 어딘가에서 그런 향신료를 말라카까지 가져오는 것을 보면 분명 그 향신료섬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곳을 찾아야만 정향과 육두구를 확보하게 되고 이제까지 감수했던 그 많은 희생을 보상받을 것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정향 한 움큼이면 평생 먹고살 돈과 바꿀 수도 있으니 어찌 마음이 급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말라카 점령은 사실상 그곳의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기인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스파이스 제도'의 이야기이다. 스파이스 제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고 단지 이슬람 상인들이나 자바인들로부터 부정확하고 단편적인 소문 같은 이야기만 있었으니까 그곳은 신비감만 더한 곳이었다. 포르투갈은 말라카 점령 후 그야말로 숨 돌릴 사이 없이 애초 목표지인 스파이스 제도를 찾아 나설 계획을 세웠다. 스파이스 제도는 더 깊은 동쪽 바다 어디인가에 있는데 말레이인들은 ‘바람 아래의 땅’이라고 했다. 그곳의 정보는 아랍인, 자바 원주민, 중국 항해사 등등으로부터 간접적으로 들은 신드바드의 모험에 나오는 허구 같은 이야기들뿐이었다. 옛날 어느 모험가가 쓴 책에 다음과 같은 소개도 있다. ‘섬 원주민의 얼굴은 방패 같았고 머리카락은 말꼬리 같았다.’ 또한 육두구의 섬은 ‘불쾌하고 불경스러운 유해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람들은 짐승 같은 우둔한 모습이었으며 모든 악의 번식지다.’ 좀 더 색다른 기록도 있다. 자바인들이 그곳과 물물교환을 했었는데 일단 해안가에 도착해서 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품, 즉 소금이라든지 허리에 두르는 천 등을 해안에 놓아두고 간다. 그리고 다음날 그곳에 가보면 그 물품의 대가로 정향 꾸러미가 놓여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섬 깊숙이 들어간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모두 신비감만 더해 줄 이야기뿐이었다.
하여튼 인도네시아의 16000개 정도의 다도해에서 정향과 육두구가 나는 섬을 찾는다는 것은 실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비견할만치 어려운 일이다. 믿기 어려운 소문과 종잡을 수 없는 기록들만 전해오는데 그런 소문들이 오히려 그곳을 찾는 데 방해만 될 뿐이지 도움이 될 리가 없다. 그곳을 아는 현지 안내원을 찾는 일이 우선적으로 할 일이다. 어떻게 해서 안내인을 찾았다는 얘기는 어느 기록에도 없지만 하여튼 포르투갈은 그해 12월에 세 척의 소형선을 띄워 출항했다. 8월에 말라카를 점령하고 4개월 만의 출항이다. 안토니우 아브레우를 대장으로 하여 반다제도로 향해 갔다. 반다제도는 스파이스 제도가 있는 몰루카 해의 남쪽에 있는 반다 해에 있는 섬들이다. 세 척의 배 중에 한 척을 프란시스쿠 세랑이란 사람이 이끌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스페인에서 스파이스 제도를 목표로 하고 반대 방향 서쪽으로 떠났던 페르난도 마젤란의 친구였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마젤란은 포르투갈 사람이었고 말라카 정복 전투에 세랑과 함께 참여했었다. 말라카 정복 후 그는 포르투갈로 돌아갔고 세랑은 스파이스 제도 탐사단에 합류했다. 스파이스 제도는 말루쿠(Maluku)해 또는 몰루카(Molucca)라고 알려진 곳에 있는 섬들이다. 말라카에서 해협을 지나 남동쪽으로 내려가면 보르네오와 자바섬 사이의 자바해에 이르고, 동쪽으로 나아가 술라웨시섬을 끼고 북으로 올라가면 거기가 말루크 해이다.
정확한 해도도 없이 목표로 하는 작은 스파이스 섬을 찾는다는 것은 다소 과장을 해서 바늘 찾기라고 말해도 수긍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먼 거리인가? 이렇게 먼 곳을 오로지 정향과 육두구를 찾겠다고 선단을 꾸려 온 이 유럽 사람들은 아프리카 서안 대서양의 카나리아제도를 지나면서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 바다에서 몇 개월을 꼼짝도 못 하면서 견디었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근해에서 종잡을 수 없는 폭풍우, 그뿐만 아니라 이유도 알 수 없는 괴혈병으로 수많은 목숨을 잃으면서 탐험을 계속한다. 16세기 초에 포르투갈 선단, 스페인 선단, 한 세기 뒤에 네덜란드 선단, 그리고 잉글랜드 선단, 거의 모두가 똑같은 위험을 감수하며 항해를 했다. 기록에 남아있는 항해 이야기들을 읽어보면 항해기간이 보통 3년쯤 걸렸고 반수 이상은 항해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어떤 항해는 10%도 안 되는 사람만이 돌아왔다. 또 어떤 항해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사망의 원인은 괴혈병, 이질 등의 풍토병, 풍랑으로 좌초, 원주민에 의한 살해, 다른 유럽 국가와의 전쟁 등인데 심지어는 영국의 북서쪽으로 항해한 선단은 북극에서 얼음에 갇혀 굶다가 모두 얼어 죽었다. 영광은 소수의 귀환자에게만 돌아갔다.
포르투갈의 반다제도에 도착한 배는 육두구를 가득 싣고 떠났다. 그러나 여기서 포르투갈 선단이 어떻게 반다섬을 찾았는지, 적어도 얼마나 어렵게 찾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배타적 반다섬 주민과 협상을 하여 육두구를 배에 가득히 실었는지 여러 자료를 찾아봐도 기술되어 있는 곳이 없다. 그냥 육두구를 가득 싣고 왔다는 기술만 있다. 그리고 남겨놓은 프란시스쿠 세항이 반다에서 달포는 걸려야 할 말루쿠 북쪽의 테르나테와 티도레로 항해하여 정향을 확보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과정이 너무 꾸민 얘기 같아 진실성이 의심된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이후의 무장 상인 선단을 보내 테르나테와 티도레에 포르투갈 요새를 건설한 것은 사실이다. 티도레에 정착한 포르투갈 요새는 그 뒤 네덜란드에게 빼앗길 때까지 1세기 이상을 지속하여 역할을 수행했다.
1529년 포르투갈 무역상 가르시아 선장이 반다제도에 다섯 척의 함대에 군대를 이끌고 가서 상륙을 시도하였다. 육두구가 없는 제일 큰 섬인 반다섬은 제외하고 육두구가 생산되는 두 번째로 큰 네이라섬에 요새를 지어 반다제도의 다섯 개 섬을 경영하고자 했다. 나머지 서쪽에 홀로 떨어져 있는 바위섬 런섬에는 별도의 요새를 마련하고자 산호초로 둘러싸인 위험한 해안에 배를 대고 상륙을 시도했다.
그런데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소문으로 들었던 호전적인 원주민의 저항을 만난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칼날처럼 위험한 산호초의 천연방호벽으로 둘러싸인 섬에 배를 안전하게 대기도 힘든 처지여서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섬을 점령하는 것이 실효가 있는 것인가가 의구스러웠다. 이윽고 그는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로 포르투갈의 어느 상단도 3㎢밖에 안 되는 쪼끄만 그 섬을 방문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섬의 원주민들과의 거래로 육두구를 사들였다. 그 뒤 런섬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는 앞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다.
유럽에서는 수 세기 동안 그들이 그토록 갖기를 원하는 향신료, 후추, 정향, 육두구가 어디서 오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것들을 팔아 부자가 된 베네치아 상인들조차도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의 정보는 일말도 모르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슬람 상인들로부터 구매한 것이 전부였다.
이슬람 사람들은 그것이 오는 곳을 절체절명의 비밀로 부쳐왔다. 그런데 15세기 오스만제국이 지중해 동쪽과 북아프리카를 모두 점령하고 동쪽으로 통하는 루트를 차단했다. 그러면서 향신료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 같은 부피의 금값과 맞먹을 정도가 되었으니 유럽인들은 바닷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 줄 알아야 했다. 소문에 인도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거기가 뱃길로 가면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 또 어느 방향으로 가야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가야 쉽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서쪽으로 향했고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프리카 남단으로 가서 동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 길을 택했다. 드디어 포르투갈 사람들이 인도와 더 먼 말라카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더 먼 곳, 스파이스 제도를 탐험하여 말루쿠 제도에 도달하고 정향의 고향 테르나테와 티도레를 찾았고 육두구의 고향 반다제도를 찾았다.
그러면 이제 구글지도를 검색하여 스파이스 제도인 말루쿠제도를, 정향의 전설적인 고향 테르나테(Ternate) 섬과 티도레(Tidore) 섬, 그리고 육두구의 생산지 반다제도(Banda islands)를 찾아보자. 우선 포르투갈이 점령하여 정향과 육두구 무역의 근거지로 삼은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해협의 항구 말라카로부터 스파이스 제도, 즉 몰라카(말루쿠)해로의 바닷길을 더듬어 본다. 수마트라를 오른쪽에 두고 해협을 빠져나오면 싱가포르의 남쪽 자바해로 내려간다. 현재의 대한민국 상선이라면 북쪽의 남중국해로 올라갈 것이다.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까지 항해하면 반텐이라는 자바섬 서쪽 끝에 이르는데 이곳이 나중에 또 다른 향료전쟁의 중요했던 곳, 옛 이름으로는 반탐이다. 향후 영국과 네덜란드의 피의 전장이 될 곳이다. 자바해는 북쪽에 보르네오, 남쪽에 길게 동서로 놓여있는 자바섬 사이의 큰 바다이다. 계속 동진하면 북쪽의 보르네오는 끝이 나고 인도네시아 5대 섬 중의 하나인 술라웨시가 북쪽에 있고 남쪽은 아직도 자바이다.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 수라바야, 그리고 세계적인 관광지인 낭만의 발리, 그리고 자바제도의 끝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티모르가 있다.
그리고 향신료의 메카, 반다 해가 망망대해로 펼쳐진다. 이제 술라웨시의 동쪽 해안을 끼고 북으로 올라가면 몰루카 해에 이른다. 정향 냄새가 바람에 실려 코 끝에서 감지될지도 모른다(그럴 리야 절대 없지만). 몰루카의 동쪽에 여러 개의 반도를 돌기처럼 가지고 있어 너풀거리고 있는 듯한 섬, 할마헤라(Halmahera) 섬이 있다. 할마헤라 섬 서해안에 섬에 바짝 붙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콩만 한 섬들이 있는데 그 섬 맨 북쪽의 것이 테르나테(Ternate) 섬이고 두 번째 남쪽으로 이웃해 있는 비슷한 크기의 것이 티도레(Tidore) 섬이다. 정향(clove)의 고향, 세계사를 바꾼 향료전쟁의 중심지이다. 두 섬 모두 화산섬이고 섬 가운데 삼각형 화산의 봉우리가 있다. 테르나테는 향료전쟁이 있기 훨씬 전부터 할마헤라를 포함한 몰루카 해의 모든 섬들을 지배하는 강력한 술탄왕국이 있었고 티도레 역시 술탄왕국으로 테르나테와 대적하며 독립적 위치에 있었다. 모두 다 정향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 시대의 어느 정치세력이건 부유하면 힘이 생기는 것 아닌가? 테르나테의 면적은 111.39㎢로 우리나라 영종도만 한 섬이고 거제도의 3분의 1 정도이다. 티도레 섬도 비슷한 크기다. 두 섬의 화산봉우리는 공히 1700m가 넘는다. 뾰족한 봉우리가 섬 중앙에 솟아 있어 위성에서 찍은 사진은 마치 따개비 모양이다. 무슨 연유로 이 섬에 다른 곳에는 없는 향신료 중에서도 가장 강한 향을 품고 있는 정향나무가 자라고 있는지는 신만이 알 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