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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광용 May 31. 2023

[향신료 이야기 2]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스파이스 제도

마젤란의 항해

이왕 구글 지도를 검색하고 있으니 반다 제도도 찾아보자. 말루쿠 해에서 남쪽의 반다 해로 내려가는 중간에 세람 섬(Palua Seram, 스람이라고도 발음)이 동서로 누워있다. 세람 섬에는 인간 사냥꾼 식인종 부족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영국 선단의 선장 데이비드 미들턴경이 식인 인간 사냥꾼에게 잡혀 있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어릴 적 보았던, 제목이 생각 안 나는 어떤 소설과 영화에서 식인종들에게 둘러싸여 목숨을 위협받는 장면을 겁에 질려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 아마도 그곳이 세람 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더 동쪽의 뉴기니 섬이거나. 세람 섬 서쪽 끝 즈음에 남쪽 방향으로 멀지 않은 곳에 암본(Paula Ambon)이란 강낭콩만 한 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암보이나라고도 한다.

반다 제도의 지도. 세람 섬 아래에 점처럼 찍혀 있는 곳이 반다 제도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암본은 네덜란드가 말루쿠를 지배하는 총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네덜란드라기보다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말루쿠 지사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암본의 남쪽으로 망망대해가 펼쳐 있는데 그 바다가 반다 해다. 전설의 육두구가 나는 반다 제도는 그 망망대해의 어느 곳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꼼꼼히 살펴보아도 안 보인다. 그러면 구글 지도의 축척을 키워 본다. 그때 반다(Banda)라고 쓰인 글자와 함께 좁쌀만 한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나타난다. 그곳이 반다 제도이다. 하도 작은 섬들이라 보통 지도의 축척에는 나타나지도 않기 때문에 그런 수고를 해야 했다. 점으로도 표기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섬들이다. 자바 섬에서 동쪽으로 2000km, 세람 섬에서 남쪽으로 147km의 거리에 있으며 주변은 동서남북으로 오로지 망망대해이다.

 총 9개의 섬이 포착이 될 것인데 그중에 육두구가 나는 섬은 네이라(Naira) 섬, 아이(Ai) 섬이고 서쪽에 외롭게 홀로 떨어져 있는 코딱지만 한 섬, 런 섬(Palua Run, 룬이라고도 발음)이 있다. 이 3제곱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 향신료 역사의 기린아, 세계사적으로도 특별한 곳이다.

 네덜란드와 영국이 본격적으로 향신료를 찾아 대항해를 시작하기 훨씬 전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경쟁적으로 선단을 띄워 향신료 지역을 찾았는데 먼저 발견한 자가 임자라는 원칙을 따랐다. 서쪽으로 떠난 스페인의 콜럼버스는 서인도 제도를 점유한 것으로 보고 그곳이 스페인의 땅이고 동쪽으로 떠난 포르투갈은 인도와 말라카를 점유하였으니 그곳은 포르투갈령으로 서로가 인정했다. 그런데 지구가 둥그니 어디선가 만날 텐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태평양에 대하여는 아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의견을 낼 처지가 안 됐다.

 어쨌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을 제외한 지역을 차지하는데 두 나라 사이에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있을 수 있으니 교황에게 주선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래서 두 나라가 스페인의 토르데시야스에서 만나 협약을 했는데, 이를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조약이라 한다. 1494년의 일이다.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와 600여 년을 통치를 했던 이슬람을 몰아내는 기독교도의 운동인 레콩키스타로가 완결된 때가 1492년이었다. 그라나다에서 마지막까지 버티었던 이슬람의 마지막 왕국이 알함브라 궁을 남겨놓고 울면서 시에라 산맥을  넘어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 뒤 스페인은 유럽의 패권국이 되었다.

보라색 실선이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맺어진 선이다. 녹색선은 나중에 태평양에 그어진 경계선. 위키미디어 코먼스




 스페인이 그들의 식민국인 네덜란드를 경쟁국으로 의식할 일도 없었고 섬나라 영국은 미개발국 가난한 나라이고 오로지 신경 쓰일 나라는 프랑스였으나 프랑스는 그런 일에 관심도 별로 없었고, 내부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었으니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스페인은 이미 콜럼버스를 앞세워 대항해를 시작한 바다의 왕자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이들 두 나라가 이 지구의 모든 땅을 나누어 먹겠다고 하는데 누가 말릴 것이냐 하는 자만(自慢)이 최고조로 있을 때의 조약이다. 조약의 내용은 대서양 어느 기준점 경도에서 그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이 소유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 기준점 경도는 남북으로 이어지는 아메리카 대륙을 남북으로 긋는 선인데 브라질의 뒤통수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선이 그어지는 것으로 해석이 되었다.

 그리하여 브라질은 그 기준점의 동쪽에 속한다고 해석하여 포르투갈령이 되었고 나머지 모든 남북 아메리카의 땅은 스페인 땅이 되었다. 그러나 지구가 둥그니까 동쪽으로 가는 길과 서쪽으로 가는 길이 둥근 지구를 돌아 어디선가에서 만날 터인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당시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이미 콜럼버스의 서인도를 지나서 대륙을 통과하면 바다가 있을 것이고, 그 바다를 지나면 인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그것을 모르고 자기가 도착한 곳이 인도라고 생각했고 죽을 때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죽었다. 새로 나올 바다, 즉 태평양이라고 나중에 마젤란이 명명한 그 바다가 얼마나 큰지 아예 짐작도 못 했다.

 1519년 9월 마젤란 선단은 다섯 척의 흑선과 270명의 선원이 스페인의 산 루카드 드 바라메다항을 출발하여 장도에 나섰다. 포르투갈 사람이 스페인 선단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가 포르투갈인인 마젤란의 경력과 그의 확고한 신념, 그리고 그의 항해실력을 믿고 전권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배가 다섯 척이니까 다섯 명의 스페인 선장이 있었다. 마젤란은 포르투갈의 알부케르케 인도 총독이 이끄는 말라카 공략 전투에 참여했었기 때문에 대서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동쪽으로 가는 항해를 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항해사다.

 그의 선단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다섯 명의 선장 중 한 명,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와 이탈리아 베네치아인 안토니오 피가페타이다. 엘카노는 마젤란이 항해 도중 사망한 후 그를 이어 항해목적지인 스파이스 제도(몰라카 제도)를 찾아 도착하여 정향과 육두구 등 향신료를 가득 싣고 인도양과 희망봉을 돌아 9개월 동안을 항해하여 귀환한 생존자의 리더이다. 피가페타는 마젤란의 항해일지를 꼼꼼하게 기록을 하여 후대에 마젤란의 세계일주 여정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동인도 제도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남북 아메리카대륙을 뚫고 지나가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바닷길은 남단을 돌아 통과하는 길과 북단을 거쳐 통과하는 두 개의 길 중에서 남단을 택했다. 북단이라 함은 북극해를 말한다.

 그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후 북단을 돌아가려고 시도했던 선단들이 있었는데 영국의 헨리 허드슨 선단도 그중 하나였다. 물론 모두가 실패하고 모두가 사망했다. 유빙의 북극해를 통과는 사실상 불가한 바닷길이었다. 캐나다 동쪽 해의 허드슨만이 그의 모험을 기념하여 명명한 바다 이름이다. 아르헨티나 남단의 복잡한 섬들 사이로 구불구불한 모양의 바닷길이 좁은 해협을 이루며 태평양으로 이어져 있는데 마젤란 선단이 그곳을 통과했다. 그 해협을 지금 마젤란 해협이라고 한다. 마젤란 선단이 죽을 고생을 하며 통과한 500km에 달하는 해협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마젤란 해협을 지나면서 다섯 척의 배가 세척만 남았으니 얼마나 어려운 항해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폭풍과 미로 속의 항해길이었다. 그보다 먼저 카나리아 제도에서 마젤란 해협에 들어서기 이전에 절대적으로 불행한 사건을 이미 겪었었다. 지겹고도 긴 항해에 염증이 난 스페인 선장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사형에 처하는 중범죄에 해당한다.

포르투갈 태생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1480~1521)의 초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마젤란의 항해로. 겹선은 말라카 공략을 위해 대서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동쪽으로 향했던 항해, 홑선은 서쪽으로 향해 필리핀에 이르렀던 항해를 보여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런 엄격한 처벌이 아니라면 대항해는 절대로 이루어 낼 수 없다. 마젤란은 두 명의 선장을 처형하고 한 명은 감금하고 또 한 명은 배에서 내리게 하는 처벌을 했는데 감금한 선장을 그 후에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앞에서 얘기했던 엘 카노 선장은 무슨 연유였는지 용서를 해주었는데 그가 앞에서 얘기한 바로 그 엘 카노이다. 해협을 통과하고 그들이 마주한 망망대해는 잔잔한 평화로운 바다였다. 그들은 환호하며 그 바다를 태평양(Pacific Ocean)이라고 했다. 패시픽이란 뜻은 평화롭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은 절대로 평화롭지 않은 혹독한 항해를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건너야 할 바다가 그렇게 먼 거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기 때문에 준비한 식량과 물이 터무니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먹지도 못 하고 마시지도 못하는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 99일을 버텼다. 마젤란은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나면 금방 동인도 제도, 즉 몰라카 해가 나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나마 북서쪽으로 기수를 잡고 항해했던 것은 천만다행의 운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생사가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수평선에 시시각각 나타나는 육지는 환각이었다. 매일매일을 먹지도 못하는 이들은 그런 환각에 시달렸다. 또한 굶기를 계속하는 이들에게 수반하여 오는 병, 원인도 알 수 없는 무서운 병, 괴혈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했다.

 1521년 3월 드디어 육지에 도착했다. 스페인 출항 후 1년 6개월이 지난 때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지금의 필리핀 세부 섬이다. 세부에 도착한 후 원주민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기는 하지만 체류 시간도 짧았고 그들의 건강상태가 그것을 수행하기에 충분했던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은 있다. 하기야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향료상인을 쫓아 항해를 같이 하고 상인과 군인이 정착하는 곳에서 원주민에게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전도했던 것은 틀림없다. 교역과 포교가 늘 같이 움직이는 톱니바퀴 같은 시스템이 유럽인의 신천지 탐험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경천동지 할 일이 벌어졌다. 마젤란이 현지인들의 싸움에 휘말려 죽음에 이르렀다. 그가 죽은 곳은 지금의 세부(Cebu) 시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 막탄(Mactan)에서였다.

 막탄의 영주 라푸라푸(Lapu lapu)는 이슬람교도였는데 기독교를 설파하는 외래인들을 좋아할 리가 없어 충돌이 일어났다. 전투의 와중에 부하들과 소통이 잘 못 되어 홀로 남겨지게 된 마젤란이 속절없이 원주민에게 살해되었다. 많은 부하들도 죽었다. 그 와중에 엘카노는 생존자들과 함께 간신히 도망치는데 성공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절체절명의 목적인 향신료를 포기할 수 없어 스파이스 제도인 몰루카 해의 향신료 제도를 찾아다녔다. 특히 정향의 산지인 테르나테와 티도레섬을 찾아 섬마다 뒤지고 다녔다. 마침내 수평선 위로 솟아오른 테르나테와 티도레의 화산 봉우리를 발견하였다. 테르나테에 접근하고 보니 포르투갈 요새가 있는 것을 보고 상륙을 포기하고 인근의 티도레 섬으로 들어갔다. 출항한 지 25개월에서 이틀이 모자라는 시간이었다. 이윽고 정향을 사들이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서쪽으로 기수를 돌려 인도양을 항해하고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대서양에 이르는 귀환길이었다. 스페인 항구에 도착한 때는 티도레를 떠난 지 9개월 만이었다. 270명, 다섯 척의 배 중 제일 작은 빅토리아 한 척에 18명만 살아 돌아왔다. 현재의 필리핀 세부에는 마젤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막탄 섬 라푸라푸시에는 마젤란을 죽인 라푸라푸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곳 도시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라푸라푸이다. 필리핀 국민은 그를 기개 넘친 필리핀의 영웅으로 기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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