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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광용 Jun 03. 2023

[향신료 이야기 3] 개척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부상

대항해 경쟁에 뛰어든 네덜란드

향신료를 찾기 위하여 바닷길을 열어 탐험을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에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그 두 나라 중에서도 특히 포르투갈이 과감하고 악착스럽게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 가며 항해의 길을 열어 갔다. 이슬람 상인들에게서 풍문처럼 들은 부정확한 정보에 기인하여 향료의 섬들을 찾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뱃길을 항해하여 가서 수많은 목숨을 잃었다. 드디어 그들은 인도에서 후추를, 실론에서 시나몬을, 말라카에서 정향과 육두구를 찾았고 독점 무역의 발판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고 자기 나라 군주에게 부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배웠듯이 시작한 자는 언제나 두 번째로 온 자에게 시작하여 얻은 모든 것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현재 시대의 기업에서도 늘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포르투갈의 대항해로부터 한 세기도 더 지난 후 두 번째로 온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가진 것을 모두 빼앗겼다. 두 번째로 온 자는 네덜란드였다. 영국도 같이 왔는데 결국은 네덜란드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향신료의 꿈의 바다인 향신료 바다, 스파이스 제도라고 불리는 곳, 몰루카 제도라고, 또는 말루쿠 제도라고 불리는 곳 그곳을 차지했다.

1726년 암스테르담의 동인도 회사 조선소. 위키미디어 코먼스

 1505년에 포르투갈이 건설하고 시나몬 숲을 독점했던 실론의 요새를 1640년에 빼앗겼고, 1498년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서부해안 캘리컷에 상륙하여 후추 교역을 트고, 캘리컷 북쪽의 말라바르에서 160년 동안 교역을 독점하고 군림했던 그들의 기지를 1663년에 빼앗겼다.

 정향과 육두구를 독점하다시피 하며 먼 몰루카 제도와 반다 제도를 관리했던 아시아의 허브 기지 말라카를 1641년,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에게 항복을 하고 빼앗겼다. 동시에 포르투갈의 가톨릭 기독교도 네덜란드의 개신교에 패배했다. 하물며 몰루카 제도의 포르투갈 요새 기지인 테르나테와 암본(Ambon)도 네덜란드에 넘겨주고 일부 상인들만 남아 네덜란드에 기대어 소규모 장사만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향신료의 선구자 포르투갈은 인도양과 태평양에서 모든 영향력을 잃고 만 것이다. 그런데 포르투갈로부터 빼앗은 네덜란드 사업의 주체는 네덜란드 국가가 아니다. 네덜란드의 상인들과 귀족들이 주주가 되어 설립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이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주식회사 동인도회사는 목표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이들의 무자비하게 벌인 ‘무슨 짓’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네덜란드 군인들은 좀 더 무자비하고 끈질긴 인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은 네덜란드나 영국처럼 자본가들의 합자회사 형태가 아닌 왕의 직속 상인 기관이었다. 그토록 머나먼 곳까지 접근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왕권은 철저한 장사꾼 집단인 회사조직과 이권을 두고 경쟁하여 승리하기에는 불가능한 느슨한 조직일 수밖에 없었다. 부유한 네덜란드의 자금력에 의한 풍부한 인력과 선박의 수에 있어서 비교도 안 될 소수조직이었다. 기본적으로 투자하는 자본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니 경쟁은 불가했던 것이다. 포르투갈의 대항해의 영웅 알부케르케가 확보한 말라카를 잃었다는 것은, 향신료 사업이 그것으로 끝이 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본부 격인 포르투갈 왕권이 무너진 것이 근본적인 이유도 되었을 것이다. 지휘부가 없는 지부, 해외총독부가 어찌 홀로 서서 버틸 수 있겠는가? 1578년 세바스티앙 1세가 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원정 전투에 나갔다가 전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뒤 여기저기에 식민국을 거느리고 있는 포르투갈은 그 사건으로 인하여 치명적으로 권위를 잃었다.

 게다가 더욱 치명적인 것은 사망한 왕이 후사를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별 수 없이 혈통이 연결되어 있는 강대국 스페인에게 ‘이베리아 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병합이 되었다. 이를 기화로 무역 후발국, 즉 향신료 무역 후발국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기회를 잡아 해외 근거지를 공격하여 하나둘씩 빼앗아 갔다. 포르투갈은 쇠퇴일로의 길을 걸었다. 이 글 향신료 이야기의 서두에 스리랑카의 남단 골(Galle)에 있는 더치포트(Dutch Fort)라는 유적을 언급하면서 향신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네덜란드가 포르투갈로부터 빼앗은 요새이다.

아비스 왕조 포르투갈 왕국의 왕 세바스티앙 1세(1554~1578). 별명은 '대망왕'.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러면 여기에서 유럽 대서양 연안의 작은 소국 네덜란드가 어떤 연유로 대항해라는 절체절명의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모험에 뛰어들어 향신료 사업에 매진하고 선구자인 포르투갈이 1세기 이상을 독점적으로 점유하고 향신료 교역해 왔던 여러 나라의 상관(商館)과 요새(要塞)를 무력으로 탈취할 수 있었던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네덜란드 역사적 배경을 들여다보자.

 네덜란드가 대항해에 뛰어들게 된 배경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능력을 키워 왔기 때문이다. 우선 그들은 오랫동안 유럽 내에서 향신료 도매나 소매의 장사를 해 왔기 때문에 향신료 시장의 상당한 부문을 점유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선단이 아시아에서 실어온 향신료를 네덜란드 상인들이 리스본에 와서 싣고 유럽 각지로 운송하여 판매한다. 네덜란드인들은 향신료뿐만 아니라 뱃길로 운송하는 모든 물품의 교역을 담당해 왔다. 말하자면 요즈음 개념인 물류사업자이다. 그리하여 유럽의 부는 암스테르담으로 들어와 쌓였다. 당시의 네덜란드 상인들이 가지고 있는 배의 숫자가 다른 모든 유럽국가의 배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고 한다. 16, 17세기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은 유럽 해운의 허브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러시아 화물의 상당한 비율의 양이 로테르담 항을 통하여 선적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유로포트의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네덜란드는 지리적으로 북서 대서양에 인접하여 있어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지역과 북해를 통하여 러시아와 대서양의 프랑스 독일 그리고 남쪽 스페인 포르투갈과 연계한다. 아프리카와 지중해로의 해운도 그들이 담당했다. 해운뿐만 아니라 네덜란드는 내륙으로도 수도 없이 뻗어 있는 운하를 통한 운송이 가능하다. 선박의 수가 많다는 말은 조선업이 발달하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덜란드 선박 건설비는 영국의 제작비에 비하여 반값에도 못 미쳤다고 한다. 대량생산 체제의 기본인 표준화 작업으로 선박을 제작하였기 때문이고 원가 절감을 기할 수 있어 경제적인 선박 설계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수세기 동안 수행하여 왔던 해운업의 발달은 항해술의 발전도 가져왔고 먼바다로 항해하는 일에 주저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동인도 회사의 과감한 투자와 그 구성원인 선원과 군대의 겁 없는 용기와 도전이 그들을 향신료 교역의 선두 주자가 되게 했고 더 나아가 독점적 위치를 차지하게 했다. 당시에나 오늘날에나 네덜란드 국토는 우리나라의 반에도 못 미치는 작은 면적의 땅이고 국토의 상당 부분이 해면보다 낮은 지역이어서 늘 바닷물의 유입을 저지하는데 진력을 다 해야만 했다. 인구도 백만이 좀 넘는 정도의 인구 소국이었다. 그런 핸디캡을 딛고도 그렇게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를 그들 역사를 탐구하여 어떤 가르침이거나 계기가 있었던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유럽의 역사를 말할 때는 우선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을 말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음으로 로마 신화 같은 기원 전의 로마 이야기와 길고도 긴 로마 황제 열전이 유럽 역사를 선도한다. 그리고 오늘날 문명의 주역이 되고 있는 민족, 게르만족의 이동과 정착 이야기, 그리고 곧 그들과 로마의 다툼, 그들 간의 세력다툼, 기독교의 유입과 교황과 왕권으로 대립, 셀 수도 없는 많은 전쟁 이야기로 역사를 채운다. 또 아시아와 연계된 역사가 중요한 장이다. 이슬람과의 충돌, 십자군을 포함한 종교전쟁이 그것이다. 종교전쟁은 비단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뿐만 아니고 중세에 들어와서는 기독교가 분열되어 신교와 구교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유럽의 거의 모든 사회가 예외 없이 위에서 나열한 것들의 하나 또는 전부의 사건들에 휘말려 그들의 역사를 만든다. 역사를 공부하는 후세 사람들은 그들의 그런 사건들이 하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키어 혼란스럽다.

 네덜란드, 그들의 역사도 역시 예외 없이 로마의 지배를 거친다. 지금의 베네룩스 3국으로 불리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그 지역을 저지대 나라(Low Countries ;低地帶)라고 칭했는데 실제로 지리적으로 낮은 지대의 땅이다. 일찍이 왕권이 확립되어 있던 스페인과 프랑스를 제외하고 기타의 유럽 지역은 지역별로 세력 있는 자들이 무리를 지어 지배했었던 것처럼 이 지역도 마찬가지로 여러 세력들이 할거했다. 그런 사회는 세력 간의 끊임없는 싸움, 연맹, 분리를 지속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 강력한 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 그런 합종연횡(合從連橫) 현상은 계속된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그의 갈리아 정복기에서 보여주듯이 이곳도 기원전 50년대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 로마의 영토였다. 그 후 게르만의 한 일파인 프랑크족이 7, 8세기에 이 저지대 지역을 점령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 그 유명한 샤를마뉴 대제 시대였다. 샤를마뉴의 사후 그가 지배했던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다시 분열했다.

 저지대 사람들도 17주의 영주를 중심으로 나뉘었다. 프랑크족이 약화되어 분열하자 북쪽 바이킹족이 내려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저지대 사람들도 이들에게 대항하고자 방어성을 쌓고 저항하면서 단결했다. 힘을 모으는 과정에서 정부와 같은 모습을 자연스레 갖추었다.

 그때 프랑스 중심부에 있던 부르고뉴 공국이 세력을 떨치며 주변 소국과 영주들을 병합했다. 저지대 영주들도 부르고뉴에 병합되었다. 안정된 국가의 사회에서 그들 특유의 중계무역을 하는 저지대 사람들은 그런대로 번영을 구가했다. 이 저지대 플랑드르 지방의 도시 헨트(현재 벨기에 켄트)에서 서기 1500년에 왕자 한 명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페인의 미남왕이라고 별명이 붙은 펠리페 1세이고 어머니는 스페인의 후아나 공주이다. 펠리페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스밀리안 1세의 아들이며 부르고뉴 공국 공작이었고 후아나 공주는 그 유명한 스페인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의 딸이다. 아버지는 물론 아라곤의 왕 페르디난드다. 카스티야 이사벨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왕은 결혼을 하여 두나라를 합병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600년 동안이나 통치를 했던 이슬람 세력을 완벽하게 쫓아내어 레콩키스타를 완성했다. 이사벨 여왕은 스페인 역사의 최고의 명군으로 추앙받는다. 콜럼버스를 서인도 제도로 보내 대항해시대를 열고 스페인에 부를 가져온 바로 그 여왕이다.

카스티야의 군주 이사벨 1세의 초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후아나 왕비가 카스티아 공주일 때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자 펠리페와 결혼한 것은 유럽 최고의 정치적 안배이다. 두 사람의 사랑과 미움의 스토리는 차치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는 스페인 왕가에서 자라지 않고 네덜란드 플랑드르에서 스페인의 네덜란드 총독인 그의 고모 마가레타의 손에서 자랐다. 마가레타의 이야기도 한 편의 드라마틱한 역사 이야기지만 여기서는 차치한다. 미남 남편 펠리페 1세를 너무 좋아해서 심하게 들이대는 후아나를 부담스러워하다가 급기야 소박을 놓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로 돌아간 펠리페 1세는 거기에서 외도를 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후아나는 너무 실망해서 광증(狂症)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펠리페 1세는 후아나의 어머니 이사벨 카스티아 여왕이 죽자 그녀가 상속받는 왕위와 재산을 탐내어 스페인에 부랴부랴 들어와서 와서 살다가 28세에 그만 일찍 죽어버렸다. 그는 그라나다의 왕실교회에 안장되어 있다. 네덜란드에 있던 왕자는 졸지에 16세의 나이에 스페인왕이 되어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스페인 말도 잘 못하는 외국인 같은 처지였지만, 그가 카를로스 1세이다. 그리고 얼마 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스밀리안 1세도 타계했는데 물려받을 왕자인 펠리페 1세가 이미 사망한 바람에 그의 손자인 카를로스 1세가 황제의 왕관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그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카스티야의 카를로스 1세 왕이고, 부르고뉴공국의 군주이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이고, 이탈리아의 왕,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자,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의 왕, 필리핀 제도 식민지의 군주가 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다른 타이틀도 많다. 독일 국왕, 나폴리 국왕, 레온 국왕, 사르데냐 국왕, 룩셈부르크 공작, 이스트리아스 공작, 브라반트 공작  등등도 겸했다. 그리하여 그가 통치하는 나라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초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역사 속의 모든 정복자는 남의 땅을 탐하여 무력으로 빼앗아 소유하는 것이 일반적 진실인데 카를 5세는 남의 것을 탐한 적도 없고 왕위를 달라고 수를 쓰거나 애걸복걸한 적도 없는 어린아이였을 뿐인데, 우선순위 제일의 상속자가 졸지에 사망해 버렸거나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거나 하여 저절로 그에게 상속이 되어버리는 운명을 맞이했다. 한국의 동양철학관이라면 확률 거의 제로의 기막힌 사주팔자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 사람이다. 그런데 이 카를 5세, 카를로스 1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식민지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유럽의 최고의 강국으로 되는 역사의 흐름에서 초기 단초를 만든 장본인이다. 단초를 만들었다는 말은 그 두 왕권이 네덜란드 독립을 위해 애를 써 주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들을 지나치게 박해하고 괴롭혀 그들이 독립의지를 키워 독립전쟁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이다.

 네덜란드 출신인 카를 5세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부유하고 관용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으리라.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일 없다고 하는 속담처럼 카를 5세가 통치하는 광대한 땅의 어느 구석에서든 반란이 끝없이 일어났다. 그의 입장에서는 반란이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쪽에서는 독립을 위한 항거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관장지인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저지대,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벨트의 중간에 소재하고 있는 프랑스는 골칫덩이였다. 그들과의 크고 작은 전쟁이 멈출 줄도 모르고 계속되었고 이탈리아에서도 또한 반란이 끝없이 일어났다. 지중해를 두고 오스만튀르크와의 제해권 다툼도 커다란 위협이었다. 무엇보다도 전쟁비용 조달을 해결해야 했다. 당연히 그가 관장하는 모든 지역 중 가장 부유한 저지대 사람들에게 막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 바로 종교의 문제다. 로마의 교황보다도 더 가톨릭을 신봉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카를 5세, 그리고 그의 계승자인 펠리페 2세는 칼뱅주의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 사람들을 심하게 박해했다. 네덜란드와의 알력은 기나긴 전쟁, 80년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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