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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광용 Jan 14. 2024

아시아 화교 이야기

11. 차이리가 사는 방법     

차이 리(李)는 내가 제시한 알루미늄  압출프랜트의 제안서에 따라 신용장을 개설할 준비를 끝 마쳤다. 조건이 하나 있다. 프로포살의 견적금액을 2배로  해 달란다. 내가  제시한 금액이 5백만 불인데 천만 불로 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는 부랴부랴 싱가포르로 날아가서 회사를 하나 세웠다. 소위 페이퍼 컴패니를 세운 것이다. 싱가포르 회사가 한국의 내 회사로 5백만 불로 신용장을 개설했고, 태국의 차이리  회사는 싱가포르  회사에 천만 불로 신용장을 개설했다. 싱가포르 회사는 5백만 불의 이익이 생기게 된다.

차이리가 태국 은행에 준  담보는 프로젝트 자체이다. 소위 선진 신용사회에서나 통용되는 프로젝트 론을 일으킨 것이다. 프로젝트가 가지고 있는 기계값과  건물값,  땅값의 선지급 대출이다. 건물값과 땅값은 백만 불 정도 된다고 가정하면 차이리는 4백만 불 정도의 유동자금이 생긴다. 그가 어떻게 싱가포르에서 그  돈을 가져왔는지는 나는 모른다.

아마도 그는 수백 개(?)의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사하벳 그룹의 총수 닥터프랏의 사위라는 신용이 작용했었을 것이니까  그런 거래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 거래가 있은 후  얼마 안 된 1997년, 태국으로부터 시작해 아시아를 강타한 금융위기가 닥쳤다.

전전긍긍 태국 정부는 모든 은행에 대하여 구조조정을 하였고 은행은 파산하면서 고객의 부채는 자연적으로 탕감이 되었다.  

물론  담보물건은  파산은행을 인수한 은행에 귀속되었겠지만. 당시 태국은행이  잡아 놓은 담보의 실질가치가 얼마나 되었을까? 사실상 거품으로 잔뜩 부풀어진 담보 들이었을 텐데.

차이리는 적어도 수백만 불을 거저 벌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후 그 공장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골프장에  갔다가  오는 길에 그 공장이 어떻게 변했나 하고 궁금하여 한번 가 보았다. "세상에!" 정말 놀랐다. 아무것도 없었다. 2만 평이나 되는 공장부지에  튼튼하게 지어 놓았던 공장건물과 사무실,  심지어는 차이리가  공을 들여 지은 중국식 절까지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벽돌 한 장도 없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만 그득하다. 내가 잘못 찾아 들어왔나 하고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아도 그 자리가 틀림없다. 추측 건데 은행이 잡아놓은 저당물에서 기계등은 헐값으로 팔아 치웠을 것이고 건물등의 구축물은 깨끗이  청소하듯 밀어 내 버렸을 것이다. 나는 끌끌 혀를 찼다. '은행이 호구(虎口)네.'

그리고  그는 은행돈만 떼어먹은 것이 아니라  내 돈 수만 불도  때어먹었다. 한국인 기술진 6명을 그의 공장에 파견하는 것으로  계약을 하여 송출을 했는데 서너 달 일을 시키고 한국으로 쫓아 버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야 할 급여를 떼어먹었다. 그래서 내가 대신 급여를 주었다. 그리고 그는 자격도 안 되는 태국 기술자들을 싼 값으로 고용하였었다. 당연히 공장 가동은 안되었다. 중국인들은 장사는 잘하지만 기술 쪽은 젬병(?)이다. 그의 눈에는 기술자와 숙련공을 구별 못한다. 공장에서 몇 년 일한 경험이 있는 태국인 일꾼들에게  물어보았을 것이다. "당신들은 한국인 기술자가 없어도 할 수 있나?" "그럼요,  다 보내 버리세요.  우리가 할게요"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공장 가동을 멈추었다. 애당초 뻔한 결과다.

그래서 그는 나의 여러 명의  태국 화인 친구 중에  유일하게  연락을 끊고 사는 친구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처, 미스주,  닥터프랏 회장의 큰딸 미스주는 나의 지인,  진 씨 가문의  쩨아이의 친한 친구이다. 그래서 그의 소식은 이렇게 저렇게 듣고 있다. 그가 어느 날 나와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나는 '굳이 지금에 와서?'라면서 대답을 주지 않았다.

2020년  현재 그의 나이는  80을 훌쩍 넘기고 있는데,  미스주와 자주 만나는 쩨아이 조차 그와 대면하는 것은 극구 거부한다. 쩨알이도  그로부터  돈을  떼었다고 한다.

금융위기는 닥터 프랏에게도 치명적이어서 그녀가 확보했던  방나트라드의 많은 부동산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가?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의 포이펫이라는 국경관문 타운에 카지노를 개설했다. 태국에서는  법률적으로 카지노가 허용 안되는데 국경에는 예외적으로 허용을 하였다. 그녀가 처음으로 허가를 받아 호화판 카지노를  세운 후  지금은 그 일대가 카지노 타운이 되어 있다. 태국의 국경도시 포이펫에서  캄보디아의 그 유명한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까지  직행 신작로를  개축하여 태국에서 캄보디아로의 육로 접근이 훨씬 용이 해졌다.

이 도로는 한국의 수출입은행의 EDCF 차관으로  건설되었다. 옛날 나의 직장 동료가  이 도로건설의 감리로 나가 일하고 있었는데 그를 포이펫에서 만나 그의 밴을 타고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의 씨엠립으로 간 적이 있었다.  건설 중인  도로의 많은 구간이 초벌 훍 성토만을 해 놓은 형편이라 거칠기 짝이 없는 구릉투성이  도로를 엉덩이를 찧어가며 갔었던 기억이 있다. 씨엠립에서 앙코르와트 관광도 하고 북한에서 운영한다고 하는 식당에서 한복인지 북조선복인지의 파란 옷고름과 깃의  흰 저고리와 파란 치마를 뻗쳐 입고 상냥하게 손님을  접대하는 조선 민주주의 공화국 아가씨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냉면인지,  온면인지를 먹었었다.

결국 카지노와 같은 도박사업도 화인들이 하게 되는 것은 불변의 진리가 된 것인가?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차이리를  내내 용서하지 못하는 나의 처신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가 하는 씁쓸한 생각도 하고 있다.

그가 장모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프로젝트를 벌렸을 때는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았던지 한국에 오면 남대문 시장을 돌며 싸구려 옷가지등을 사서 가장 큰 캐리어 몇 개를 채워 갔었다.

그 후에 돈이 생기자 신세계나 롯데 백화점에서 비싸디 비싼 옷들을 캐리어에 채워 갔다.

슈퍼에 들려서 해태나 롯데의 갖가지 과자류도 한껏 사서 가져갔다.

그렇게 인간은 처해진 형편에 따라 쉴사이 없이 바뀌어 간다. 닥터프랏은 나이가  90이 넘어 돌아가셨고 미스주가 카지노를 물려받았다. 철강은  닥터 프랏의 유일한  아들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고 다른 딸도 뭔가를 물려받았는데 자세한  형편은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의  후손  화인들은 그렇게 계속 승승장구하며 태국의 상류사회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의 성숙한 상류 사회의 구성원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하적인 표현으로 '졸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것이다. 상류라 하면 돈만 가지고 판단할  기준인가? 

걸맞은 문화적인 상식과 철학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감성도 키워져야 한다.

하기야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그런 졸부라고 여겨지는 부자 또한 넘쳐 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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