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부 중국을 떠나는 자들
1. 첸 산터우항(汕頭港)에서 배를 타다
1912년 쑨원(孫文)의 삼민주의에 의한 무창봉기의 불길이 청조(淸朝)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이어졌다.
쑨원은 난징(南京)에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얼마 안 되어 청조에게서 대권을 부여받은 위안스카이(袁世凱)에 밀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위안스카이 공화정 독재정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이 위안스카이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제2차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런데 위안스카이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그 틈에 군벌들이 할 거하면서 내전으로 치달았다.
1916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을 기념하는 봉기가 우창에서 일어났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사건을 쌍십절(雙十節)이라고 하며 기념한다.
그 보다 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중국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내전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은 세계 2차 대전 때 사망한 숫자 다음으로 인류역사에서 두 번째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던 전쟁으로 2천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중국은 끝도 없는 기아의 나락으로 떨어져 있었다.
미국의 여성작가 펄벅이 그녀의 노벨문학상 작품 '대지(The great land)'에서 당시 중국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기아에 시달리는 잔혹한 상황을 묘사했다.
내가 어렸을 때 읽었었던 그 작품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은 농지와 농사를 습격하여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황폐화시켜버리는 공포스러운 메뚜기 떼였다.
작품 전체에서 얼마 안 되는 부분 스토리지만 당시 어린 나이의 나에게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정치적 사건보다는 메뚜기 떼의 공포가 두고두고 잊히지 않았다.
그런 혼란한 시절인 1918년쯤에 태어난 첸(陳)이 살고 있는 광둥 성 동쪽 코너 차오저우(潮州) 지역도 예외 없이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첸의 대가족 식구들은 손바닥만 한 농지 한 조각에만 매달려 있는 형편이라 호구지책(糊口之策)조차도 어림없는 지경이었다. 차오저우는 광둥 성 동쪽 후지엔 성과의 경계지역에 몇 개 현으로 이루어진 작은 지방이다. 그들 만의 고유 방언과 문화를 보유하고 있는 차오저우 인들은 옛부터 가난을 머리에 이고 살고 있었지만 바다를 건너 신천지를 찾아 나서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쪽배에 지나지 않는 배를 타고도 멀리 시암의 수코타이, 아유타야, 호이안(지금의 베트남) 등과 무역을 하기도 했다.
첸은 어머니, 두 명의 손위의 형, 여동생 둘, 그리고 작은 아버지댁 식구들, 고모들까지도 같이 살고 있는 대가족의 일원이다.
첸은 비슷한 처지의 친구 양(揚)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상의하며 고민하다가 일찍이 고향을 떠나간 사람들처럼 어디론지 가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로 결정을 한다.
차오저우의 한강 강줄기가 바다와 만나는 곳에 산터우(汕頭)항이 있는데 동남아시아 여러 곳으로 출항하는 증기선이 이미 19세기 말엽부터 이곳에서 취항하고 있었다.
제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1차 난징조약에 따라 개항을 했던 5개의 항구(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에 추가하여 10개 항의 개항을 요구했던 톈진조약에서 이곳 산터우 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에 산터우 항은 중국의 이민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항구가 되었다. 산터우에서 가는 항로의 목적지는 홍콩, 망구(曼谷, 방콕), 말레이(馬來語), 인도네시아, 젠포차가(柬포寨, 캄푸치아) 등지다.
첸과 양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결정을 해야 했다. 첸의 친척 중 태국으로 간 사람이 있다고 들었고 양도 마찬가지로 친척 중 누구가 태국으로 갔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 비벼야 할 언덕이라도 있어야 되겠기로 친척을 만날 수 있는 망구로 떠나기로 했다.
첸의 친척은 태국 북동쪽 코랏이란 곳에 있다고 하는 정보를 가까스로 얻었고 양의 친척은 차층사오라는 곳에 있다고 했다. 식구들과 충분히 의논하여 여비를 모으고 장도에 올랐는데 그들 둘은 말하자면 선발대이며 개척자인 셈이다. 그들이 지니고 간 여비는 식구들의 고혈이다. 태국으로 간 중국인들은 집단을 이루고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 중심지가 방콕의 차오프라야 북쪽 강가의 한 곳 오늘날 차이나타운이라고 하는 곳이다. 태국으로 온 중국인들은 1940년 이전에도 상당수가 있었지만 40년대에서 50년대에 이민자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당시 동남아로 이주한 중국인의 숫자가 150만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중의 70%가 산터우항에서 출발했다고 하니 산터우는 중국의 이민자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산터우에서 배를 탄 이주자들의 반 이상이 태국으로 향했다고 한다.
첸과 양도 그중에 속한 이주자들이다. 차이나 타운의 입지는 차오프라야 강둑을 끼고 있으니 중국과의 뱃길로 무역을 하는 데는 안성맞춤의 지역이라 장사를 해서 먹고사는 중국인들이 대거로 몰려들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첸은 방콕에서 300킬로나 떨어진 코랏(오늘날 나콘 랏차시마)으로 친척을 찾아 나섰고 양은 80킬로 떨어진 차층사오로 갔다.
첸이 찾은 친척은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아 신세를 지기가 어려워 차오저우에서 온 어떤 고향사람 집에 공간을 하나 얻어 기숙했다.
중국에서 들은 일자리가 차고 넘친다는 소문은 근거도 없는 이야기이거나 옛날 일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태국은 형편이 좋았던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철도공사등 많은 건설공사들이 있어 부지런한 중국인의 일손이 많이 필요했었으나 첸이 도착한 40년대 초에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매우 어려운 지경에 있었던 때였다. 무엇을 해야 먹고살 수 있을지 앞이 캄캄했다. 여비를 마련해 준 가족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조바심이 나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허구한 날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더욱이 고향에서 떠나 오기 전에 이웃동네 장 씨 댁 규수와 혼담을 진행하여 결혼을 약조까지 하고 온 형편이다. 태국에서 자리를 잡으면 그 규수와 그녀의 가족들도 오도록 주선한다는 약속도 해 놓았었다. 그리고 태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계획도 세웠다.
코랏에서는 더 이상 일거리를 찾을 수 없자 대도시 방콕으로 나가 일자리를 찾아 보리라 하며 고민하는 중에 타이인들이 밥과 국을 끓이는데 모두가 나무 등걸 이를 태우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나무를 태우면서 나오는 매운 연기로 눈물 콧물을 훔치는 것을 보는 순간 어떤 생각이 번득하며 떠 올랐다. 첸이 생각해 낸 것은 숯을 구워 내는 일이다.
코랏 주변에서 쓰러져 버려진 것 같은 고목도 보아 왔고 산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든지 재료로 쓸만한 등걸 이를 주울 수 있을 것이어서 첸은 즉시 이 일을 시작했다.
숯을 구워내는 기술은 고향에서 보아온 일이라 문제 될 것 없는 일이지만 엄청난 노동이 요구되는 일이다. 구워낸 숯은 금방 팔려 나갔다. 하다 보니 요령도 생기고 원재료 목재도 용이하게 구할 수 있어 그런대로 호구지책은 해결할 수 있었다.
그가 묵고 있는 집주인 고향사람 부부는 무쇠 솥단지로 콩을 삶아 두부를 만들어 팔고 있었는데 첸이 보기에 무언가 잘못 만들고 있었다.
고향에서의 첸의 식구는 두부가 매우 중요한 먹거리여서 놀고 있는 손바닥 만한 뙈기만 보면 무조건 콩을 심어 수확하고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두부만큼 부족한 식량을 채워줄 수 있는 식품은 없었다. 첸이 주인집 사람에게 자기네의 두부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첸이 일러주는 대로 두부를 만드니 품질도 좋아지고 생산도 훨씬 더 할 수 있어 주인집은 요즈음 말로 대박이 났다. 첸이 자기 집에서 하던 방법으로 만든 두부가 시장에서 잘 팔리는 것을 보고는 앞길이 훤히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저거야! 두부!' 늘 검댕이를 뒤집어쓰고 살고 있는 숯쟁이 첸은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방콕으로 나가자. 가서 두부를 만들자. 식구들을 부르면 일손은 문제없다. ‘여기 코랏은 너무 작아. 방콕으로 가야 돼.'
숯을 팔아 모은 돈과 고향에서 가져온 쓰고 남은 얼마간의 돈으로 방콕의 차이나타운에 거처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가지고 있는 예산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차이나 타운은 땅값 비싸기로는 태국에서 비견할 만한 곳은 없다.
구부러져 흐르는 강을 돌고 돌아 동쪽 하류로 내려가는 곳에 얀나 와라는 곳이 있는데 아직 개발이 덜된 지역이라 논 때기 밭 때기가 즐비한 시골 동네이다. 그러나 바지선이나 쪽배를 댈 수 있는 작은 부두가 마련되어 있어 앞으로 발전하리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차이나타운으로는 뱃길이 용이하여 재료를 사 오는 일과 두부를 쉽게 운송하여 팔 수 있는 일 모두가 어렵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땅값이 매우 싸다.
그리고 대식구가 살려면 터도 넓어야 하겠지만 두부를 만드는 공장이 있어야 하니 될수록 터를 넓게 잡아야 할 것이었다. 코랏에서 처럼 작은 솥단지로는 대식구가 먹고살 돈은 못 벌 것이다. 고향에 연통을 넣어 모든 식구를 오도록 했다. 당연히 약혼자 메이(梅)의 장(張)씨 댁 식구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이주의 절차가 복잡 다난하게 마무리된 후 모든 식구가 두부 만들기에 매달렸다.
보통 먹는 압축 해 성형하는 모두부, 강황가루로 노랗게 색을 입혀 동그랗게 빚은 것 등을 만들었는데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 고객은 물론 차이나 타운에 몰려 사는 중국인이다.
첸의 예측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얀나와 지역에도 인구가 많이 늘어나 시장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였다. 메이는 아들을 낳고 연이어 딸, 그리고 또 딸, 아들, 그렇게 일 년 또는 이년이 안 되는 터울로 아이를 낳았다. 첸이 공장에서 일하는 차오저우에서 온 처녀 하나를 건드려 임신을 시켰다. 시앗을 본 것이다. 공장일뿐만 아니라 사업일체를 메이가 도맡아 하는 바람에 첸은 별로 하는 일이 없게 되었고 오로지 아이 낳는 일에 만 전념 했는지 메이는 아들 여섯과 딸 다섯 모두 열한 명의 자식을 낳았고 둘째 부인은 딸 아들 합하여 일곱을 낳았다.
첸이 시앗을 보았을 때 더욱이 공장에서 일하는 처녀를 건드려 임신까지 시킨 것을 메이가 알았을 때 메이는 별다른 내색을 크게 하지 않았다. 사업전체를 떠맡고 있던 메이는 늘 일손이 모자라 쩔쩔매고 있던 터라 둘째를 일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하고 주위에서 추측만 할 뿐이다. 첸의 누이동생 하나는 코랏으로 시집을 가서 거기서 두부공장을 했고 둘째는 차층사오의 친구 양 씨 댁에 시집을 가서 거기서 두부공장을 했다.
첸의 두 형은 태국으로 와서 결혼도 안 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일찍이 타계를 해서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첸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모두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해야 했다.
아니면 집 일할 사람이 없이 모두 공장으로 들어가니 대신 집일을 하거나 했다.
첸은 나이 60에 암으로 생각되는 병으로 타계를 했다.
무려 열여덟의 자녀를 남겨 놓았으니 대단한 생산력을 과시했을뿐더러 열여덟의 자녀가 자라면서 모두 사고 한번 안 내고 고스란히 성년이 되는 최고의 아버지로서, 두 명의 부인이 서로 질시 반목 없이 잘 지내게 한 좋은 남편으로서, 진 씨 가문을 태국에 일으켜 세운 종시조로서, 그리고 개척자로서 일생을 마쳤다.
그가 타계한 후 모셔온 어머니는 100세를 사시고 돌아가셨고 둘째 부인도 타계했다.
이제 그 많은 식구, 아마도 손주와 증손까지 합하면 7,80명에 이를 진 씨 댁 가문의 꼭대기 중심은 메이이다. 대부분의 태국 화인들은 중국인의 정체성을 잊거나 부인하며 사는데 그것은 진 씨 가문도 마찬가지이지만 진씨네는 죽어서 돌아갈 묘지는 중국식으로 마련하여 놓았다.
진가장(陳家莊) 이란 묘지공원이다. 죽어서는 중국집으로 돌아가려는 심리가 남아있는 것이리라. 진씨네 이야기와 또 다른 가문들의 이야기는 계속할 것이지만 잠시 접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한다.
여기서 태국 화인(華人)의 역사적인 위치를 짚고 화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웃나라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등의 국가들의 화인들과 어떻게 다른 입장인지를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