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ET Level 3까지의 여정
운이 좋게도 나이가 어릴 때부터 주위에 와인에 조예가 깊은 친구들이 있었다. 가장 맛있는 술은 대학생 때 마셔본 맥주와 소주, 그리고 쏘맥밖에 없는 줄 알았던 시절, 동시에 와인은 포도로 만든 술이며 어른들이 마시는 술이다 정도의 인식만 가지고 있었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 덕분에 내가 쉽게 구하거나 마실 수 없는 와인을 완벽한 컨디션으로 경험할 기회가 꽤 있었다.
특히 고마운 사람이 있다. 지금은 미국 명문대에서 디자인쪽 석박사를 끝내고 미국 와인을 맘껏 마시며 살고 있는 선배인데, 회사입사 동기인 가장 가까운 언니의 대학 동문이라 알게 됐다. 그는 이미 그때(우리가 20대 중반이었을 무렵)에도 와인에 조예가 매우 깊었다. 그가 몇 번 열었던 개인적인 와인 모임에 초대받아서 마셔본 와인들은 뭘 모르는 나에게도 언제나 최고의 컨디션이었고, 그랬기에 나는 와인이라는 술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호기심을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2017년, 회사 이직을 하기 전 4개월이나 자유의 몸이던 때 나와 회사 동기 언니는 함께 한달짜리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우리는 와인을 좋아하고 와인모임도 몇 번 해봤으니(!) 겸사겸사 프랑스의 보르도와 상파뉴를 들르고 와야겠다는 용감한 생각을 했다. 프랑스의 주요 포도 품종과 유명한 와인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 그러니까 샤또 무통 로칠드나 샤또 마고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던 때에, 앞에서 말한 와인에 조예가 깊은 선배에게 들었던 1시간짜리 원포인트 레슨만을 믿고 떠난 보르도와 상빠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 말은- 그 때 나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좋은 기회를 다소 멍청하게 허비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샤또 투어를 선택하는 기준부터 와인을 즐기는 방법까지...)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와인에 대해 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호기심이 생기면 일단 ‘시험’을 보고 공부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온 나였기에 나는 와인에 대한 라이센스를 찾아보았고, 그렇게 WSET라는 와인 자격증 시험을 알게 됐다. 처음엔 WSET 레벨 2에 도전했다. 일반적으로 와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공부하고 취득하는 레벨인데, 와인 품종과 스타일, 양조에 대한 전반적인 기초지식을 알려주는 수준이다. 매주 화요일 저녁, 회사를 마치고 학원에 와서 와인을 배우고 시음을 하는 시간은 정말로 내게는 천국과 같았다. 와인에 대해 알게 된다는 성취감에 더해 와인에 취해 알딸딸하니 붕뜨는 기분까지, 공부가 안 될 이유가 없었다. 레벨 2 시험은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일반적으로는 대부분은 이 단계에서 라이센스 취득을 멈춘다. 레벨 2의 지식으로도 일반적으로는 와인을 취향껏 즐기기에는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레벨 3은 수입사, 유통사와 같이 와인 업계에서 일하거나 F&B 업장 대표님, 소믈리에 분들이 주로 취득한다. 공부해야 할 범위가 레벨 2와는 비교도 안되게 넓고 깊으며, 시험은 서술형과 논술형이 대부분이고 이론 테스트 외에 시음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재시험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공부해야할 범위, 기간, 그리고 학원비까지 - 나 또한 레벨 3을 따려는 생각을 크게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2020년에 나는 충격적인 와인 한 병을 만나게 된다. 이 날은 미국 샤도네이 와인인 Peter Michael의 버티컬 테이스팅을 하는 날이었다. 2010년대, 2000년대의 병을 따서 마시고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건 Peter Michael Mon Plaisir 1995 빈티지였다. 이 날이 내가 올드 빈티지 화이트 와인을 마셔본 첫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떤 향과 맛이 날 것이라고 예상조차 못했던 내게, 이 와인은 충격적인 경험을 선물했다. 노즈도 제대로 즐기지 않고 털어넣은 첫 입에, 나는 세상에 넥타르가 있다면 이런 맛이겠구나 생각했다. 마치 금을 녹여서 만들어 놓은 와인 같았달까. 버터리하게 넘어가면서도 느끼하지 않았으며 산미가 아직 살아있어 신선했고, 묵직하면서도 산뜻하고 은은하게 반짝이는, 와인 그 이상의 음료 같았다. 그날 버티컬 테이스팅했던 다른 빈티지들은 아예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금 그 맛을 그대로 떠올릴수는 없지만, 그 순간에 내가 느꼈던 정신적인 충격(positive)은 여전히 기억한다. 맛있다, 라고 표현하기에 아깝고 안타까웠던 그날의 한잔. 그 아름다웠던 맛에 반했으나 제대로 묘사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나는 다시 WSET 레벨 3 공부를 시작했다. 이런 와인을 마시려면, 이런 경험을 더 하려면 와인을 더 깊이 공부해야겠어..! 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아는 척을 하고 싶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WSET 레벨 3의 경우 수입사 관계자들이나 업장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따는 수준의 라이센스라, 관련 직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취미로 공부한다고 하면 다들 신기하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레벨 3를 공부하고 있다고 하는 것 만으로도 다양하고 좋은 와인 메이트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귀한 와인들을 마실 기회를 감사하게도 많이 얻었다. 첫 시험은 백지로 내고 나와야했던 이야기는 차치하고, 두번째 시험에서 드디어 이론과 테이스팅을 모두 통과하여 WSET 레벨 3을 취득했다. 그렇게 나의 와인 세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듯 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일단 취득했으면 끝아니야? 라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 많은 지식을 암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끝난 후 다시 들여다보고 복습하지 않으니 그저 내용을 까먹기 일쑤였다. 현실적인 제약으로 (직장인 월급 수준과 다음날 출근 이슈) 와인을 엄청나게 자주 마시는 것도 아니니 실전에서 와인을 배우고 이론과 시너지를 낼 기회도 적었다. 이 후 수많은 와인 테이스팅 모임에 참여하며 난 그저 모임 초반에 저 WSET 레벨 3까지 공부했어요, 라는 말밖에 할수가 없었다. (왜냐면 기억이 하나도 안나니까!) 그 곳에 있던 와인에 미친 친구들, 혹은 지인들은 나처럼 WSET 라이센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와인에 대한 지식과 테이스팅 경험에 대한 얘기를 훨씬 풍부하게 줄줄 쏟아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 그렇게 힘들게 따낸 WSET 레벨 3 라이센스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반성을 스스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와인샵에서 집은 상세르 지역의 와인이 소비뇽 블랑 품종인지 샤도네이인지까지 헷갈렸던 순간, 난 다시 결심했다. 내가 가진 라이센스를 부끄럽게 낭비하지 말자고. 많은 물량 기반으로 경험과 지식을 쌓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수많은 와인을 마시며 와인과 사랑에 빠지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 - 이론에 입각하여 나만의 와인을 사랑하는 방법을 만들어보자, 라는 그런 생각.
다시 꺼낸 WSET 책을 읽으며, 나는 와인과 인생을 연결해서 글을 써 볼 예정이다. 그러다 보면 마시고 싶은 와인도 생기고, 어쩌면 내가 와인을 신나게 공부하게 만들었던 운명의 와인을 또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또 다른 결심과 행동이 뒤따르겠지. 그 때 처음 공부하던 때처럼, 마음이 맘껏 부푼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