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쓴 상상 일기를 대본으로 바꾸는 작업이 쉬울 리 없다. 내가 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우리 반 공식 작가의 손을 거쳐 탄생하는 것이 좋을 터!
드디어 수연님이, 주말을 이용하여 고치고 또 고쳐서 2,3편을 완성해서 출력한 다음 가지고 왔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대체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거냐)
한 문장씩 교정을 보면서, 어린이 다운 표현들과 의외의 유머러스한 장면들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나중에 정말 수연님이 자라서, 성인 작가가 된다면 얼마나 재미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어 낼까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조연출을 맡은 다혜 님이 첨삭을 거친 원고를 양면으로 인쇄해서 가지고 온 다음 창체(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하여 아이들에게 배부했다.
대본리딩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반적으로 어떤 영화가 될지 프레임을 짜는 일이면서, 어떤 목소리와 표정, 감정으로 연기를 전달해야 하는지 상의하고, 그에 적합한 배우를 즉석 오디션으로 뽑는 일까지 해야 하니 말이다.
되도록이면 소외되는 친구 없이 자신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꼭 한 번씩 해보자고 다짐하고 시작했는데, 막상 목소리가 경찰에 어울리지 않거나, 너무 개미만 해서 시위대의 목소리로 적합하지 않아 애를 먹게 되었다.
또, 오열하는 연기, 눈물연기, 부부연기 등에 사춘기를 맞이한 13살 녀석들에게 부담이 되는 건 당연하다.
이 내용이 4.19 혁명 기념일에 맞춰서, 헌사하는 느낌의 영화로 제작하자는 것이 우리의 취지였는데,
대체 이게 무슨 코믹엽기 장르도 아니고 아이들이 무슨 대사를 해도 까르르 웃고, 무슨 연기를 해도 까르르 웃고, 여보~가지 말아요, 우는 대사에서는 박장대소를 하며 데굴데굴 구르고 난리가 났다.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여보는 좀 힘들 것 같데요 다혜가 부끄러워서 차마 그건 못하겠다는데요?"
"그래? 그럴 수 있죠. 그럼, 자기는 어때요?"
그 말에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돼서는 그럼 오빠라고 해라, 허니는 어떠냐, 여봉은 어떨까 난리부르스가 났다.
결국 승은님이 의견을 냈다.
"선생님, 작가의 의도를 살리면서 연기자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여기 있는 엄마 역할을 여동생으로 바꾸면 무리 없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어! 그러네. 꼭 엄마일 필요는 없다. 시위대에 있던 가족이 희생되고, 그 슬픔을 표현하는 장면이니 어린 동생 역할이 더 잘 어울릴 수 있겠다고 생각해 즉석에서 상의해서 대본을 수정했다. 원작자인 수연님의 표정은 석연치 않았지만, 아이들의 동의에 마지못해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반에는 남들과 조금 다른 도움이 필요한 친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 친구의 특징상, 어디든 끼고 싶어 하고, 본인이 거기에 적합한지, 잘할 수 있는지를 고려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이건 정말 아닌데 싶은 역할에
"저요, 그거 제가 할게요, 제가 잘해요"
하면서 불쑥불쑥 나서서는 양보 없이 소리 지르고, 울고 불고 하면서 그거 내가 할 거야 하면서 따지고 드는데 혼이 쏙 빠진다. 결국 우리가 절충한 방식은 영화는 찍고 싶고, 친구랑 계속 싸울 순 없고, 그러니 그나마 어울리는 역할을 배정해주자로 협의가 되었다.
1편에서는 주인공의 엄마 역할을 줬고, 2편에서는 경찰 역할을 맡겼다. 스스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하면서도 계속해서 주인공 역할을 하고 싶다는 야무진 꿈은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이래서 감독은 참 어렵겠다 싶다. 깜이 안되는데도 시킬 수밖에 없는 배우가 있을 테고, 꼭 쓰고 싶지만 쓸 수 없는 경우도 있을 테고, 막상 믿었는데 형편없는 경우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하!!!! 감독의 비애)
그렇게 3편, 고등학생 백필구 이야기로 막 넘어갔다. 백필구 이야기를 쓴 동하님은 우리 반에서 가장 말이 없고, 과묵하고, 내성적인 남학생 중에 한 명이다. 그 친구는 그림 그리거나, 디자인, 글쓰기에는 남다른 소질이 보이는데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는 것을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친구다.
이번에 절대 원칙으로 처음 영화 내용으로 선택된 글을 쓴 원 저작자에게 그 편의 주인공을 맡기자는 것이 합의된지라, 어쩔 수 없이 백필구 역할을 동하님이 맡게 되었다.
(속으로 매우 불안했다. 하,,,,,동하님이 과연 이 역할을 소화해 낼 수 있을까. 혹시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아이들이 안 들린다고 아우성을 치다가 상처를 받거나 하진 않을까. 그럼, 바꿀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액션!
하는 순간 갑자기 목소리가 우렁차지면서 고등학생 형 역할에 딱 맞는 말투와 속도로 대사를 내뱉는 것이 아닌가.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아이들 입모양이 오~~~~~(대단한데, 쫌 하는데)로 바뀌었다. 만만치 않게 조용하고 차분한 은호 님이 백필구의 동생 백칠구 역할을 맡아서 둘이 옥신각신하는 장면을 얼마나 찰떡같이 연기해 내는지 몰입이 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가장 고민되었던 장면이 무리 없이 넘어가고, 우리 반에서 자타공인 최고 신장을 자랑하는 준 어른 역할 전문배우 영재님이 노인이 된 백필구 역할을 맡기로 결정되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손녀딸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는데 나름 최선을 다하는데도, 터저나 오는 웃음과 오글거리는 손가락 발가락을 멈출 수가 없어 교실은 또다시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울다가 웃다가 대본이 온통 빨간 색연필 표시가 누덕누덕 되어 있을 때, 드디어 리딩이 끝났다.
이제 우리에겐 2편, 3편 촬영만이 남았다. 물론 편집이라는 큰 산이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여기까지 매끄럽게 올 수 있었다는 점. 평소 이런 활동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은 시니컬한 친구들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 제작 프로젝트는 성공이라고 본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삽입곡을 리코더로 불어서 넣기 위해서 불철주야 연습 중이다. 추모곡을 연습하자니 어려운 부분도 있고, 파트가 나뉘는 부분에서 헷갈려서 발로 박자를 맞춰가면서 불고 또 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의 그 노력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