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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집 이야기 Nov 29. 2016

감정을 세탁하는 방법

-내 안의 비밀 버튼-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기분을 감정이라고 한다.

감정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누구보다

내 감정을 잘 느끼고 있다고 생각다.

진짜 내 감정을 느끼고 다루는 나는 어떠했을까?


내게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먼저 나서는 건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지금 이 상황을 판단하고, 예전에 기억들을 불러왔으며,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상상을 했다. 여기서는 울면 안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지금 상황에서는 배부른 소리였다. 머리로 우선 이해하고 그후에는 어떻게 느끼고 다루어야

할지를 몰랐다.


특히 분노, 불안, 회피, 두려움 같은 부정적 어감의 감정이 올라올 때 내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생각으로 차단하고 도망가는 것이었다.

부정적 감정들은 가슴 답답함과 두통, 위장장애 같은 신체적 질환을 동반하며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우울한 건 내 일이 잘되지 않고 있다는 신호였고, 그럼 나는 하루를 버린 잉여인간 같았다. 타인에게서 올라오는 분노를 표출한다는 건 갈등을 꺼리는 내게 너무나 불편한 감정이었고, 회피를 인식한다는 것은 내가 겁쟁이라는 표시 같았다. 부정적 감정은 모두 긍정적 감정으로 바꿔야 한다는 자기계발서 같은 생각이었다.  


이렇게 처리되지 못한 부정적 감정들은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와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고 오래오래 묵혀 화병이나 우울증 같은 묵직한 덩어리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너무나 견고한 패턴으로 내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내가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꿈이 있다.

세탁기 앞에 앉아 세탁기에 넣을 손빨래를 간단히 한다. 내가 좋아하는 하얀 셔츠와, 수영복, 엄마의 등산복 상의가 보인다. 세탁기를 돌리려는데 늦은 시간이라 소음이 신경 쓰인다. 그런데 세탁기 버튼 중에 비밀이라고 쓰인 버튼이 있다. 비밀 버튼은 소음이 줄어드는 버튼인 거 같다.
처음 발견한 버튼에 신기해하며 안심하고 세탁기를 사용한다.


깨끗한 세탁을 위해 나는 간단히 손빨래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세탁기를 이용하려고 한다. 그런데 늦은 시간이라 세탁기를 돌리는 소음이 너무나 신경 쓰인다. 물론 상식적으로 늦은 시간에 세탁기를 돌리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꿈은 이렇게 상식적인 예의를 차리며 내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세탁이라는 행위는 정화의 기능이 있다. 우리네 엄마들이 깨끗하게 빨린 빨래를 보며 속 시원함을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 수도 있다. 꿈속에서 나는 옷가지를 직접 빨고 있다.


흰 셔츠와, 수영복, 엄마의 등산복 상의다. 옷을 나를 표현하는 도구이며 때론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나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표시이기도 하다. 아마 누군가에게 나를 보인다면 무난한 흰 셔츠를 입었을 것이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흰 셔츠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템이다. 특히 면접을 볼 때나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자주 찾는다.

흰 셔츠는 사회의 일원이자 대외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추구하는 모습 일 것이다.


수영은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운동이다. 처음 수영을 배울 때는 무척 투덜거렸지만 사실 그 속에는 운동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몇 달간 배운 수영은 그 후 몇 년간 혼자 꾸준히 한 운동이 되었으며 나는 수영 예찬론자가 되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중에 내가 성취와 만족감을 느낀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수영복은 내 몸이 느낀 성취감과 만족감을 표현하는 옷이다. 그리고 엄마의 일상복 같은 등산복 상의다. 딸과 엄마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사회에서의 나, 개인적으로의 나, 집에서의 나라는 옷을 세탁하며 나는 주변의 소음을 신경 쓴다.

굳이 이 늦은 시간에 세탁기를 돌리면서 말이다. 낮에는 세탁기를 돌릴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늦은 시간이라도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 나눠서 돌릴 여유는 없다. 이렇게라도 해야 깨끗한 옷을 다시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늦은 밤 세탁기를 돌리는 것은 내가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어떠한 사건이나 사람 앞에서 바로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기는 보다는 그 상황이 조금 지나서야 화를 인식하고 그 화를 며칠을 곱씹다가 밤에 잠들기 전 머리 속 분노로 상상하고, 조용히 눈물 흘리며 감정을 일부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탁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나는 혹시나 누군가 내 소음을 들을까 신경 쓴다.

내 감정을 표출하는 게 누군가에게 감정적인 짐을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해서 나온 배려이며, 지리한 패턴이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식은 비밀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조용히 비밀스럽게 세탁기를 돌릴 수 있는 기능이 내 안의 있는 세탁기가 가지고 있는 기능이다.


며칠 나는 왜인지 모를 답답함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그리고 이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 이렇게 비밀스럽게 감정을 처리하는 게 나에게 최적화된 방식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답답함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작업실에 가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었다. 최근 친해진 동료와의 개인적인 부딪침으로 인해 버겁기도 했다. 집에는 오랫동안 묵혀있는 일들이 불쑥불쑥 끼어들어 왔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내가 가장 즐겨하는 방식인 무관심으로 포장했다.


이건 나에게도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에게도 결코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두려움, 불안, 분노, 우울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올라올 때 그 자리에서 모두 느끼고 표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잠시 그 감정들을 충분히 느끼려 한다. 가슴의 두근거림, 불안한 호흡, 목을 걸리적거리게 하는 불편함, 화끈 달라 오르는 얼굴, 지끈거리는 머리와 같은 신체적 증상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차분히 마음을 들여다본다. 지금 올라오는 불안은 당장 벌어진 일이 아니며, 이 우울감은 정체된 내 창조성에 대한 알림이며, 가슴을 짓누르는 분노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말이다. 이렇게 내 감정을 하나하나 헤집는다는 게 결코 편치 만큼 않고 매번 이렇게 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그냥 매일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가슴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 때면, 이유 없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스럽다면 그 상황 속에 담긴 내 감정을 먼저 들여다보자.


부정적인 감정이 결코 나쁜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이 내게 주는 신호이다. 분노나 우울감으로 알려주는 내 상태이며 이것을 통해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감정의 신호인 것이다.


여전히 내게 감정을 느끼는 건 숙제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모두가 잠든 밤에 남몰래 비밀 버튼을 쓰며 세탁기를 돌리기보다는 여유 있는 밝은 낮에 큰소리 드러내며 신나게 세탁기 돌리고 발 뻗고 누워 자는 나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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