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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숙아보카도 Jul 20. 2024

카프카가 사막 속에서 만난 빛, 문학의 공간

<문학의 공간>에세이

카프카에게 글쓰기는 구원이었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서 끔찍한 불안과 고독감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문학이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차원,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희망은 카프카에게 그의 불행을 보상해주고 새로운 행복을 가져다주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더 깊은 죽음 속으로 인도하는 세이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학의 공간 속에서 카프카가 발견한 희망이란 비탄의 의식이었다. 그 의식은 절망적인 현실을 더 절대적으로 절망하는 쪽으로 문이 열려 있었다.


절대적으로 절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연히 주어져버린,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밀려오는 공포와 불안이 항상 그를 쫓아다녔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글쓰기라는 허구의 차원으로 도피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사람의 온기를 갈망하지만 그럴수록 그들과 섞일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 고향에서 조차 추방당한 듯한 고립감 등등 현실세계는 여러 방면에서 카프카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카프카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비탄을 정당화시키려 했다. 무질서한 혼돈 가운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비탄을 바로 아는 것이었다. 그는 글 속에서 더욱더 자신의 운명을 바로 보기 시작했다. 추방을 극한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추방 자체를 극복하려 했던 유태 종교가들처럼 그 불행의 한가운데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올 때까지 말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부정 속 은폐되어 있던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문자 속에 비추어냈다. 이 작업은 글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본질적인 고독, 글을 쓰는 내가 아니라 언어, 작품 자체가 이끌어가는 이 지점이 바로 글쓰기의 시작점이다. 진리는 침묵에서 존재를 드러낸다. 글쓴이가 의도하는 명료한 말속에서는 침묵하지만 스치듯 지나가는 그림자 속에서 말이다.


 그 그림자가 우리로 하여금 커다란 속삭임을 감지하게 한다. 블랑쇼는 그 반짝이는 한순간이 글이 작품이 되는 순간이라 말한다. 언어가 이미지로 열리어지는 순간이다.


작품은 작가를 통해 도래한다.

그러나 작가의 능력과 의도를 통해서가 아니다.


작가를 어떤 특별한 주제에 얽매이게 하는 무언가,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무언가,

예술작품은 작가 안에 있는 내적 필연성을 통해 도래한다.


언어의 공간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길 때 글은 나 자신을 보여준다.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카프카는 어디서도 소속감, 일체감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문학이라는 공간은 그런 그에게 유일무이한 가족이 되어주었다. 그는 글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나갔고 자신을 점점 이해하기 시작했다.


 문학은 카프카에게 해탈의 능력을 가져다주었다. 예술이라는 도구를 만난 그에게 있어 추방은 이제 더 이상 절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문학이라는 공간에서 활용할 수 있는, 그저 주어진 여건이었다.


문학을 통해 ‘나는 현실세계에서 추방된 자구나’라는 선고는 ‘난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해탈과 결단으로 변화되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죽음, 비탄에 대한 성찰은 자기 자신의 관찰 수준에서 고차원적인 관찰의 수준으로 성장했다. 더 이상 그를 추방했던 현실은 카프카의 주관적인 척도로 왜곡되지 않았으며 외부의 압박에 의해 검열되지 않을수 있었다.


카프카의 정당한 양심의 위대성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더욱 희망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불운을 일반적인 불행의 척도로 만들지 않았다는 데 있다.
문학의 공간.94


  글쓰기에 몰입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더 쇠약해져 갔고 세상과의 단절이 더 분명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독감에 괴로워 문학의 공간으로 뛰어든 카프카를 이 새로운 차원은 그를 더 깊은 고독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는 예술로 인해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했다. 예술을 통해 그의 비탄은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의 희망은 자신과 동떨어져 있는 천국에 있지 않았다.


나를 용해시켜버리고 타인과의 상호작용까지 상실해버리는 바로 그 끔찍한 상태 속에서 카프카는 글을 써야만 하는 의무, 그 중력의 핵심을 발견했다. 파괴의 자리에서 창작의 가능성을 대치시켜 싹트게 한 것이다.


 그는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는 천국의 길을 택하는 대신 사막 한가운데에서 실수-방황의 길을 택했다.


그는 문학이라는 사막의 공간에서 실컷 방황하고 실수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만큼은 죽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학이라는 글 속에서 끝없이 사유한다. 그 속에서 나를, 내 가족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문학가들은 사라져 버린 것들, 고립되어 시니피앙에 담기지 못해 떠도는 사물들(정동, 사건)을 글 속에 담아내기 위해 글을 쓴다. 무질서에 법을 부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계속 영위하기 위해 그들은 고독해야 했다. 법의 영역(결혼, 가족, 직업 등등 세계와의 상호작용)에서 소외되어야 했다. 카프카는 소중한 아들을 제물로 바쳤던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미래(현실에서의)를 예술에 바쳤다. 이 둘의 차이점은 아브라함과 달리 카프카가 제물로 바친 것은 이미 한 번 실존에 의해 잃어버린 것이라는 점이다.


무력했기에 아프게 잃어버릴 수밖에 없던 것을

이제 그는 자신의 의지로 놓는다.

그것은 겸허한 인정의 과정이며,

선택과 결단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가 혼자서 살 수도 없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도 없다는 사실을 더욱더 잘 느끼게 된다.
문학의 공간.74


카프카는 말한다.

 “생각하고, 관찰하고, 증명하고, 기억하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함께 함에 있어, 나는 무능하다. 이 무능력은 매일 더욱 커진다.나는 돌이 된다. 내가 작업 속에서 나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희망이 없다”(1914.7.28.)
문학의 공간.80


이것의 문학이 카프카에게 구원인 이유였다. 그는 글 속에서 자신의 비탄을 인식하고 인정한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것만으로 카프카는 스스로의 영혼을 지킬 수 있었다. 부조리의 철학가 알베르 카뮈 또한 카프카의 문학을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는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모든 우상이 침묵한다고 주장한다.


밤을 거치지 않고 아침은 오지 않는다. 카프카는 글이라는 사막 속에서 끔찍한 밤을 거친 대가로 오지 않을 것 같던 아침, ‘형이상학적 기쁨’을 맞이한다.


고독의 극한 속에서 ‘나의 소명은 문학이며, 아버지로 인한 추방의 상처, 고통은 이를 위해 존재했구나’라는 운명의 인정을 감행했을 때 느낀 감정이 바로 카뮈가 얘기하는 형이상학적 기쁨이 아니었을까?


 괴테가 말하듯, 매혹이라는 외로운 전능의 힘과 단둘이 마주하는 그 대면으로부터 오는 기쁨, 그것은 해방의 기쁨이다. 이 거대하고 기적적인 기쁨의 원인, 적어도 그 일부는 여기에 있다.
문학의 공간.63


여기서 말하는 해방은 자기 밖의 것에

스스로 칩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해방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나는 여기까지 오는 길을 발견해야만 하지 않았던가?
문학의 공간.90


상실에서 절대적 상실로,

절망에서 절대적 절망으로 이주하는 것,

그것이 카프카가 문학의 공간에서 찾아낸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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