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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Mar 22. 2022

빛나는 얼굴, 너울로 가린 얼굴

a radiant face, a veil over one’s face

2022년 2월 27일 주일예배 하늘뜻 펴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저와 함께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9-35(새번역)     

29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30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니,

32 그때에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

33 모세는, 그들에게 하던 말을 다 마치자,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34 그러나 모세는, 주님 앞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나올 때까지는 쓰지 않았다. 나와서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에는,

35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저는 이 본문을 읽고 얼굴의 살결이 빛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그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면 왜 수건이나 너울로 얼굴을 가려야 했을까 여러 차례 생각하였습니다만 그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서서히 조급증이 생길 무렵 읽던 책에서 치곡(致曲)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치(致)는 한발한발 나아가 이른다는 뜻이고 곡(曲)은 곡진하다는 즉 정성이 지극하다는 의미입니다. 합치면 마음과 뜻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한발 한발 나아간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서 본문에서 하늘뜻의 실마리 찾지 못하던 제가 왜 이 단어에 주목하게 되었는지 잠시 역린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영화 역린 유튜브 영상 처음부터 끝까지 틀기 분량:1분 34초)

https://www.youtube.com/watch?v=6pe64hLjkGY     


정재영이 맡은 상책은 왕의 서책을 관리하는 내관으로 학식이 뛰어나 정조를 곁에서 모시는 역할을 합니다. 신하들과의 공부 모임인 경연에서 정조(현빈)는 신하들에게 옛 학문이 주는 깨우침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아무도 답을 하지 못하자 책을 관리하는 상책에게 다시 묻습니다. 그의 답변을 다시 한번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치곡은 중용 제23장에 나옵니다. 원문은 기차치곡(其次致曲), 성즉형(誠則形), 형즉저(形則著), 저즉명(著則明), 명즉동(明則動), 동즉변(動則變), 변즉화(變則化)입니다.

誠은 정성스러움을 다한다는 뜻이고 성을 다하면, 形 즉 형태가 만들어지고, 그다음 著는 형태가 뚜렷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곧 明 밝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저는 이 밝음에서 오늘 본문 성서와의 연결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밝음으로 인해 動 즉 감동시키고 變, 변화시켜 化 즉 완전히 새로운 그 무엇이 되는 과정이 바로 치곡이라고 하겠습니다. 치곡의 과정을 살펴보면 성부터 형, 저를 거쳐 명에 이르는 것은 자기 자신이 거치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내가 작고 사소한 일에 정성을 다하고 형태를 갖추고 드러나고 마침내 밝게 빛납니다. 그리고 감동시키고 변하여 새로운 무엇이 되는데 이때의 변화는 주체와 객체가 동시에 겪는 화학적 변화 즉 완전히 새로운 무엇이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제 다음 성서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교독하시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3-18, 4장 1-2 (공동번역)

13 우리는 모세처럼 자기 얼굴에서 광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14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너울에 가려져서 우둔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옛 계약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너울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비로소 벗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15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너울로 가려져 있습니다.

16 이 너울은 모세의 경우처럼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벗겨집니다.

17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1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이 직분을 맡은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2 우리는 드러내지 못할 창피스러운 일들을 다 버렸으며 간교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비뚤어지게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밝혀 드러내었으니 우리는 하느님 앞에나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습니다. 


얼굴의 광채와 관련한 고린도후서의 맥락은 출애굽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모세는 얼굴의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자기 백성에 보이지 않게 하려고 너울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너울로 가려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중용의 치곡에 따르면 지극히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여 자기 자신이 변하고 환해져 다른 이를 감화시켜 생육시키는 경지까지 간 사람이라면 어떻게 자기 얼굴의 빛이 사라지는 것을 다른이에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너울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언제나 마음이 흔들거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하지 않을까 합니다. 비록 모세가 하늘의 말씀을 전할 때 자기 얼굴이 빛났더라도 그 빛이 사라질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더는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영화 하나를 더 떠올렸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密陽) 영어 제목으로 Secret Sunshine입니다. 전도연 배우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영화에 대해 좀 부연 설명을 하자면 지금 함께 볼 장면은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한 범인이 있는 교도소를 찾아가 용서한다는 말을 전하는 부분입니다.


(영화 밀양 유튜브 영상 틀기 50초부터 4분 6초까지)

https://www.youtube.com/watch?v=Izk25phPiBo 


이 장면을 보면 죄수로 나온 유괴살인범이 대화를 할때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영화를 볼 당시 제게 인상에 남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하늘뜻을 준비하면서 제 생각이 전개되는 과정에 밀양의 이 장면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환한 얼굴로 구원받았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죄를 저질러도 저렇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힘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


고린도후서에서는 얼굴의 너울을 벗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라고 합니다. 그리고 창피한 일을 버리고 간교한 행동도 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비뚤어지게 전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중용의 치곡을 성서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진리가 드러나고 우리는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우리를 떳떳이 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밀양의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저 사람은 자신의 입으로 하느님이 자신을 구원했다고 말을 하고는 있으나 그것은 혼자만의 착각 또는 과도한 자기 확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창동 감독은 무엇을 의도했을까요? 죄수인 그는 과연 앞에 앉아 있는 자식을 잃은 여인이나 관객인 우리들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는 용서가 진정한 용서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이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일을 제가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희들에게 내리는 성령의 은총으로 작은 이들에게, 다양한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 특별함과 특이함을 지닌 이들에게, 그들 모두를 차별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대하는 치곡의 자세를 가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그런 치곡의 자세가 지속할 수 있기를 기원할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시를 한편 읽겠습니다.

팔순 넘은 엄마의 말을 엮어 “살아보니 그런대로 괜찮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펴냈는데 그 가운데 한편을 뽑았습니다. 치곡의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밭이랑 (김상순 구술 홍정욱 옮김)


뭐 하러 밭이랑을 그리 다독거리는교?

다독거려야 예뿌지!

밭이랑이 예뿌서 뭐하요?

와? 여기서 곡식이 자란다고 생각해봐라.

애쓴 데라야 자주 눈이 가고, 눈이 가야 손도 가제 보는 마음도 다듬받아지고,

별시럽기는, 돈도 안 되는 걸 가지고.

키울 때 돈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키울 때는 키우는 재미로 키우지.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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