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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Sep 29. 2022

통계의 추억

매뉴얼이 가져온 기억


형제보다 가까운 선배가 있다. 정확히는 선배이자 동급생이다. 형은 두해 위다. 방위소집해제 후 복학하여 학부 3, 4학년을 같이 다니고 나란히 대학원에 진학하여 연구실에서 밤새며 일하고 밤새워 마신 날이 헤아릴 수 없다.


작고하신 큰 형님은 여러모로 장손의 풍모가 있었다. 십 대 시절 명민한 머리로 이름이 알려졌으나 언제나 방학이면 리어카를 끌고 밭에 나가 일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유학을 앞두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번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전공과 상관없는 번역일을 하고 쑥스러워 번역자 이름에 약간의 트릭을 부렸다. 우리 형제 항렬은 영자 돌림이다. 불꽃이 두 개나 올라가 있는 영화로운 이름이었으나 이를 쓰지 않았다.



큰 형님은 영화로운 이름을 버리고 길 영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긴 생애와는 연이 닿지 않았다.



책을 사랑하는 선배는 소싯적부터 읽었던 복사했던 모았던 모든 책을 쌓아두고 살았다. 책장을 정리하던 날, 밤새며 숫자를 만지고 통계를 돌린 시절이 그리웠는지 선뜻 버리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삼십 년도 더 지난 옛 일이 사진 두 장에 걸쳐 지나간다.


62년 임인년 생인 큰형은 사십되던 2002년 임오년에 세상을 버렸다. 올해는 육십갑자 돌고 다시 그가 태어난 임인년이다.


사족 1. 나도 저 매뉴얼을 읽으며 수와 수 너머에 담긴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이제는 그 시간들이 허허롭다.

사족 2. 어제 저녁, 나는 작고한 큰 형님과 학번이 같은 다른 선배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세상의 고난과 어려움에 맞서 늘 웃는 얼굴로 서 있다. 그를 만나고 오는 밤은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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