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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나 Sep 14. 2023

괜찮게 나이들 수는 없을까?

샘 어셔의 그림책 ‘기적’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할아버지와 손자다. 두 사람은 햇빛 쨍쨍한 날에도, 비 내리는 날에도, 폭풍우 치는 날에도, 눈 오는 날에도, 길 잃은 날에도, 고양이와 함께 한 날에도 우연이 만들어준 전혀 뜻밖의 사건을 마주하며 기적을 만들어 낸다. 그림책에 등장하는 멋쟁이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의 둘도 없는 친구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괜찮은가 하면 손자와 있을 때, 흔히 어른에게서 볼 수 있는 ‘~하라’는 지시적인 말투나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잔소리가 없다. 손자와의 시간은 손자를 돌보거나 놀아주는 시간이 아니다. 그냥 손자와 함께 하는 일상이다. 아이를 돌보며 자기를 희생하고 있다는 생색이 거둬지니 같은 공간에서 공존하는 두 인격체가 선명하게 보인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도 솔직하고 서로 눈치 볼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도 할아버지는 손자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살뜰하게 살피고,  준비하고, 지원하고, 안내하고, 촉진한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일상의 작은 틈을 비집고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를 함께 해결하면서 두 사람만의  이야기를 써 나간다. 그림책의 서사가 자유로운 이유는 이야기가 현실 너머 환상의 세계에까지 확장되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 환상 세계로 스르륵 넘어가는 장면에서는 ‘와! 이게 뭐지?’하며 놀랍다.  그때부터 펼쳐지는 유쾌한 모험으로 마음이 말랑말랑해기까지 한다. 이야기의 끝은 항상 뽀송뽀송하고 따뜻한 집에 돌아와 하루가 얼마나 즐거웠나를 회고하는 해피 엔딩이다. 차와 쿠키를 앞에 두고 마주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이 정겹다.  마주 보는 서로의 눈빛에서 "우리 오늘도 해냈어!"라고 말하는 듯 진한 전우애마저 느껴진다. 할아버지는 함께 하는 삶, 존재감만으로도 손자에게 세상의 중요한 가치를 교육하고 있다.


두 사람이 만드는 '비 내리는 날의 기적'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어느 날 아침 비가 내리는 것을 본 손자는 얼른 밖에 나가 놀고 싶어 안달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비 오는 날엔 집안에서 지내는 게 가장 좋을 거라고 말하지만, 손자는 빗속에서만 할 수 있는 신나는 모험을 상상하며, 밖에 나가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려봐도 좀처럼 비는 잦아들지 않는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할아버지는 누구에겐가 계속 편지를 쓰고,  손자는 그림책을 보면서 종알종알 비 오는 날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를 툭툭 내뱉는다. 할아버지는 편지를 쓰며 무심한 듯 보이나 손자의 말을 다 듣고 있다.


"할아버지, 수상 도시에 가 보고 싶어요."


드디어 비가 그치고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간다. 오래 기다렸던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외출 준비도 신난다. 그런데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풍경 속의 작은 종이배는 어느덧 할아버지와 손자를 태운 커다란 보트로 변하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환상 속으로 쑤욱 들어간다. 두 사람은 손자의 상상 목록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한바탕 축제를 즐긴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의 편지를 우편함에 넣는 것을 신호로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환상에서 현실을 넘나드는 연결 고리가 되는 오브제가 자연스럽고도 절묘하다.


"할아버지는 나를 선장으로 임명했어요."


집에 돌아온 할아버지와 손자는 마주 보며 따끈한 코코아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의 욕구와 의견이 늘 똑같지 않아도 괜찮다. 두 사람의 '하고 싶은 때'가 각자 달라도 괜찮다. 때를 기다리는 것에서 더 큰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욕구 만족을 지연했다가 성취하는 보상도 짜릿하다. 일상의 모든 순간에 의미가 있다.  할아버지의 직설적이지 않은 은근한 교육방식이 놀라울 따름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들은 꾹 참고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단다."


나는 손자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태도를 보면서 멋지게 나이 든 어른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할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고정관념을 시원하게 깨트려주었다. 그에게서 성별과 나이를 초월한 인간적인 매력마저 느꼈다. 누군가의 윗사람일 필요도 없고,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하지 못할 일도 없다. 그저 주어진 하루 동안 자기 리듬대로 살아가는 나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손자 또한 자기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서로 종속될 필요가 없고, 자기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면서도 흔쾌히 협력할 수 있는 분위기는 유난스럽지 않아서 편안하다.


무엇보다도 할아버지는 손자를 사랑하고 있으며, 손자 또한 할아버지를 사랑한다. 보호와 양육, 존경과 순종의 미덕에 앞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있다.  내 곁에 있는 너를 구속하거나 소유할 필요가 없고 그저 네가 편안하게 존재하게 하는 사랑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나이 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와 상관없이(ageless) 언제고 나만의 개성이나 매력을 발산할 수 있으면 된다.  개성을 반영한 선택으로 집합된 취향과 스타일이 중요하다. 나이를 의식하면 할수록 나이 들었다는 증거고, 사회가 규정한 '나이 듦'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갇히는 것이 아닐까?


지나 온 날들의 모든 경험으로 나의 정체성은 형성되어 왔다. 나의 선택은 한때 어리석었고 한때 탁월했다. 수많은 만남과 이별, 실수와 성취, 후회와 깨달음이 모이고 모여 현재 나라는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누군가 내게 타임머신을 타고 인생의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나는 과거로 회귀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의 내 모습을 바꾸고 싶지 않다. 잠을 자고 눈을 뜨면 언제나 당연하지 않은 오늘이 있었다. 내가 누렸던 수많은 '오늘'을 저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내 인생의 가장 좋은 때다.


살아갈수록 새로운 도전과 모험으로 변화하며 성장하게 될 나의 모습이 기대된다.  괜찮은 어른의 기준을 '나다움'에서 찾을 때 안도의 마음이 든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회적 자아'로 나를 포장할 필요가 없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노년을 상상할 때, 지금처럼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를 자극하는 활동과,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될 변화에도 망가지지 않을 정신이 살아 있기를 기도한다. 무엇보다도 나이 들수록 누군가 권하더라도 존경받는 자리에 함부로 앉지 않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자리를 알아서 찾을 수 있도록 모두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어린아이의 '사랑스러움'을 더 적극적으로 연마하고 싶다.


길게 봤을 때 내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하지만 짧게 봤을 때 내겐 무엇이든 할 시간이 있다. - 베르나르 피보, <그래도 오늘은 계속된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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