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쿠나 Aug 09. 2023

아버지, 나의 아버지!

사랑 :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내가 말할 때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의 눈을 바라보며,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오직 나만 존재하는 듯 집중해서 들어주던 사람이 누구였나 생각해 본다. 아무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은 큰 사랑을 전제로 하는 행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라면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아니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 조바심이 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잊어버리려야 잊을 수가 없다. 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커질수록 더 세밀하고 촘촘한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딸이었다. 직장 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뜨문뜨문 부모님 집을 찾아뵐 때 다과를 준비하는 어머니를 도울라치면, 어머닌 손사래를 치며 얼른 소파에 가서 아버지와 대화하라며  등을 떠미셨다. “네 아버지 하고 이야기 좀 나눠. 네 아버지는 너랑 이야기가 제일 잘 통하잖아.”  이야기가 잘 통한다? 이 말은 내가 누구보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물론 아버지가 들려주는 과거사는 일어났던 일에 약간 미화되고 과장된 부분이 있을 테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아버지이기 전에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좋았다. “아버지, 사랑해요.”라는 말을 쑥스러워 입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나만의 사랑 표현 방식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이미 수십 번도 더 들어서 다 알고 있는 내용이더라도 나는 마치 처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아!' 하고 맞장구를 쳤다. 아버지는 잔기침이 나서 호흡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연신 물로 목을 축여가며 몇 시간씩 당신의 삶에 있었던 기념비적 이야기를 하고 또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내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며 호응하길 참 잘했구나 싶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딸로 인해 아버지의 정신은 또렷하게 빛날 수 있었고, 마지막까지 존엄을 잃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 바람도 어느 정도는 이루셨을 테니까 말이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두 가지로 압축된다. 전 생애를 통틀어 이만하면 잘 살았다는 ‘안도감’과, 평생 당신 곁을 살뜰히 살펴준 고맙고도 미안한 아내에 대한 ‘사랑’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와 만난다.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엄마와의 사랑이 시작되던 날의 사건이다.      


준 LOVE 혜자 FOREVER


부모님의 결혼식


준과 혜자는 같은 대학 CC다. 우연인지 예정된 운명이었는지 어쩌면 평생 만날 일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이 정확히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만난다. 준이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했더라면 의대를, 혜자가 원래의 꿈을 이루었다면 약대를 다니고 있을 텐데 말이다. 자유롭고 호방한 패셔니스타 준에게는 따르는 여학생이 많다. 야무지고 똑똑한 혜자 주변에도 혜자를 속으로 흠모하고 있는 남학생이 많다. 준은 대학 채플에서 피아노를 치는 혜자에게 반해 사랑의 편지를 여자 기숙사로 보낸다. 당시 서로에 대한 호칭은 감히 ‘~씨’도 아닌 ‘~선생님’. 1950년대 대학 문화에서는 남녀 간에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당연히 학내에서 이성 교제는 금지! 특히 준과 혜자의 학과에서는 CC로 발각되면 퇴학 조치 되는 엄중한 교칙마저 있다. 준과 혜자가 조심스럽고도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받던 가운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큰 사건이 일어난다.    

그날은 혜자가 피아노 반주자로 있는 대학 합창단에서 국군훈련소 위문공연을 하러 가는 날이다. 준은 당시 개인 소장용으로는 드물던 카메라를 하늘색 양복 어깨에 메고 짠! 하며 나타나 무리와 합류한다. 훈련소로 가는 버스 안은 대학생들로 가득하다. 준은 빈자리가 없어 군용트럭을 개조한 버스 뒷문에 기대어 서 있다. 목적지를 향해 잘 달려가던 중 기막힌 사건이 발생한다. 갑자기 뒷문이 벌컥 열리면서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준이 그만 차 밖으로 튕겨 나간 것이다. 버스는 멈추고,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준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준을 찾는다. 그때 저 멀리서 준이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은 지금 걸어오고 있는 준이 유령이 아닌가 싶어 더욱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준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와 혜자의 마음까지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날, 준과 혜자의 사랑은 1일이 된다.     



가장 좋은 소통 방법은 상대의 말을 들어주며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칼 로저스-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 나의 아버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