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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나 Jan 24. 2024

안녕은 유목민의 정신으로

이별에 대처하는 장자적 태도


“만약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면?”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만날 때 드는 생각이다. 아마 지난해 겪었던 아버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탓인 듯싶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아침은 여느 때처럼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곧 또 만날 거라고 다음을 기약하는 의식으로 치러졌다. 내가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으며 “또 올게요.” 인사하자, 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고마워”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그 순간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아버지가 피곤하실까 봐 서둘러 자리를 피해드리며 이제 좀 주무시라고 했던 그때. 만약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날,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호흡이 멈출 때까지 곁을 지켰을 텐데..... 그때는 몰랐다. 그날의 안녕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면서 자주 만나곤 했던 이웃을 언제부터인가 잘 볼 수 없어서 그의 안부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아직 6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70대 부부가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왜 요즘 13층 아저씨가 보이지 않지?” 의문이 들었을 때는 이미 그가 돌아가시고 난 후 두 계절이 훌쩍 지나 있을 때였다.  삶과 죽음이 얼마나 우리 곁에 가까이 붙어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면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동창회 밴드에 올라오는 새로운 알림 내용을 압축해 보면 연례 모임 안내. 생일 축하, 연로하신 부모님의 부고나 자녀의 결혼 소식이다. 얼마 전 알림을 열어보니 뜻밖에도 부고의 주인공은 남자 동창의 아내였다. 같은 과 커플이었던 친구 부부가 남들처럼 그럭저럭 잘 살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친구의 아내는 20년 넘게 루게릭병으로 전혀 거동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들을 낳고 얼마 되지 않은 젊디 젊은 새댁에게 찾아온 반갑지 않은 병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부서뜨렸을지 상상해 보면 긴 투병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생각과 감정은 여전한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든 병을 앓다 세상을 떠난 그녀가 건넨 안녕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번 생과 영원한 안녕을 고하게 하는 죽음이란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이별이다. 한때 다정한 사이였으나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많은 인연을 떠올려 본다. 자연스럽게 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진 사람과의 이별은 다시 만날 기약이 없기에 죽음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만날 수 없지만 한때 소중했던 사람이 떠오를 때면 어느 하늘 아래 잘살고 있을 거라 믿으며 그리움을 달래곤 한다. 오늘 이 사람을 만나고 있지만 내일 또 그를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그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애틋하고 소중해진다.      


나는 강신주의 <장자수업> 중 맹손재 이야기에서 유목민의 안녕을 배운다. 맹손재는 모친상을 당했을 때 곡하고 눈물 흘리며 슬퍼하고 애도하지 않음으로써 노나라에서 장례를 잘 치른 자로 명성을 떨친 인물로 소개된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맹손재에게 어머니는 먼저 떠난 유목민이었고, 그 또한 언젠가 어머니처럼 떠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맹손재의 죽음에 대한 개념이고 이별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유목민적인 것의 핵심은 부단히 이동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언제든 이동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유목민은 마음에 드는 새로운 땅을 찾아 기꺼이 떠날 수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잠시 정착한 곳에서 유목민들은 과거 정착지에 대한 향수에 빠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목민들이 자신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사랑하는 동안에만 머문다는 게 정답일 겁니다. 강신주, <강신주의 장자수업 2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221. EBS Books.     


어쩌면 내가 겪은 모든 이별이 슬펐던 이유는 나도 언젠가 떠나고 죽는다는 사실을 관념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착민이라고 생각했기에 저곳으로 떠나는 사람을 놓아주지 못하고, 이별이 더 슬펐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유목민은 그때그때 머무르는 곳을 긍정하며 좋았던 기억만을 남긴다. 과거의 향수에 젖어 새로운 곳을 부정하지 않는다. 함께 있는 동안 충분히 서로를 아끼고 환대한다. 만남은 기쁘고 이별은 슬픈 것이 아니다. 만남은 만남으로, 이별은 이별로 긍정한다. 이러한 논리에서 이별은 만남의 부재가 아니므로 함께 했던 좋았던 시간만으로 감사할 수 있고,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건이 된다.       


사랑하는 타자도 그렇고 나 자신도 유목민일 뿐입니다. 그 어떤 변화의 국면에 영구히 머물러 정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소중하다고 느끼기 쉬운 것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맹손재! 다른 유목지로 떠나며 먼발치에서 겨우내 있던 유목지를 얼핏 돌아보는 유목민의 마음입니다. 안녕! 잠시 머물기를 허락했던 땅이여! 안녕! 엄마! 갈 길을 재촉하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다시 번집니다. 초원의 바람이 그의 자유를 맞아줍니다. 강신주, 강신주의 장자 수업 2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231. EBS Books.   

   

앞으로의 안녕은 유목민의 정신으로 가볍게 맞이해 보자. 안녕! 00! 이젠 이별해야 할 때 소중했던 누군가를 웃으며 보내주고, 웃으며 담담하게 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안녕을 하자. 언젠가 한 번은 찾아오고야 말 나의 죽음에게도 가벼운 안녕을 건네자. 그보다 먼저 쏜살같이 지나가버려 아쉽게 느껴지는 나의 젊은 날에게 안녕을 고해 본다. 안녕! 나의 젊음, 나의 청춘! 


나, 꽃으로 태어났어요. 
따스한 햇살을 받고, 
따뜻한 기운을 나누며 살아가요. 
난 가녀리고 연약하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이겨냅니다.      
엠마 줄리아니 글/그림, <나, 꽃으로 태어났어>,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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