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백수 남편의 일기 (8)
아내는 출장이 잦은 편이다.
“다음 달에는 출장이 4번 있어요. 1박 2일짜리 출장이 셋, 2박 3일짜리가 하나예요."
매달 업무 보고를 하듯 다이어리에 정리된 출장 일정을 보여주곤 한다. 영업부서도 아니건만, 회사는 갖가지 이유를 대며 아내를 외지로 보내곤 한다.
"이번 달보다는 그래도 좀 줄었어요.”라고 말하며 웃어 보인다. 우리, 아직 신혼 인대.
날짜 아래 소심하게 박힌 “출장”이라는 두 글자. 흘려 쓴 두 글자 속에 아내의 소심한 분노가 녹아있다.
“과장님이 이직을 하는 바람에 다다음 달부터는 더 늘어날지도 몰라요. 인사팀에서 인원 충원을 왜 이렇게 안 해주는지 모르겠어.”
볼멘 목소리로 아내가 말한다. 일단은 있는 인력으로 어떻게든 추려 나가야지. 나가는 인원에 대한 T/O는 차기 신입 공채로 충당하는 게 인력구조를 더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어요, 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차마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다. 전직 인사팀이 이런 소리를 했다가는 내 소중한 후식 과일이 사라진다. 이럴 때는 “그 회사 인사팀 일 참 안 하네. 인력기획 누가 하는지 한 번 만나보고 싶네.” 정도로 이야기하는 게 좋다. "많이 힘들죠? 내가 그 회사 인사팀장이었으면 한 5명쯤 더 넣어줄 텐데 말이야."라는 말은 덤이다. 오늘 후식은 장모님이 보내주신 딸기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라, 최근 아내의 출장은 그 빈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가 되었다. 그에 따라 은근한 분노가 차오른다. 내게 10분 이상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아내뿐인데. 거지발싸개 같은 회사 같으니라고.
원어민급으로 영어를 할 줄 아는 아내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회사의 주목을 받았다. 나름 대기업에 해외대 출신도 많이 뽑는다고 하는데, 희한하게도 뽑히는 해외대 출신 사원들이 영어회화에 취약하다고 한다. 심지어는 캐나다 국적을 가진 사람도 있는데, 누군가 영어로 말을 걸면 버벅거리다 한국어로 답을 한다고.
“캐나다가 다문화를 상당히 존중해주는 문화라고 들었는데, 아마 진짜인가 봐요. 우리도 캐나다 이민이나 알아볼까?”
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내가 가뭄의 논바닥 같은 목소리로 말하면, 사뭇 진지하게 낭만적인 해외생활을 그려본다. 세련된 도시와 정갈한 자연이 조화로운 낯선 도시에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아내를 떠올리니 사뭇 그 모습이 섹시하다. 그리고 이어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 아름다운 외국의 도시에서 어벙하게 우물대는 나. 그곳에서도 나는 백수다. 지금보다 더 구제불능의 이국적인 까만 머리를 가진 백수.
어렸을 적 아내의 집은
굉장히 어려웠다고 한다.
어렸을 적, 아내의 집은 굉장히 어려웠다고 한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생활수준에 올라섰지만, 20년 전에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이사만 서른 번 가까이했어요. 나이보다 이사를 한 횟수가 더 많은 사람은 아마 드물 거야. 심지어는 옆 집에 쌀을 꾸러 다니기도 했어요.”
석사과정을 마치고 나서야 장인어른은 군대에 들어가셨다. 당장 결혼을 하던가, 아니면 헤어지라는 외할아버지의 성화에 그때는 이미 장모님과 결혼을 한 상태였고, 첫 휴가에 생긴 아이가 내 아내라고 한다. 이후 박사과정을 마치고 취업을 할 무렵에는 이미 아내에게 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온 가족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빠는 연구원, 조교, 과외로 어떻게든 생활비를 보탰고 엄마도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했어요. 하지만 그때는 여자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어려웠던 때라서, 먹성 좋은 세 아이를 먹여 살리기에는 아마 턱없이 부족했을 거예요. 엄마 아빠는 어떻게든 일을 하나라도 더 하려고 하셨고, 그러다 보니 동생들 뒤치다꺼리와 집안일은 자연스럽게 내 차지가 되었어요.”
어렸을 적 일을 회상하면 아내는 그리움과 서러움이 주는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곤 했다. 6살이나 어린 막냇동생은 자기가 기저귀를 갈아가며 업어 키웠다고, 그래서 요즘 자기 좀 컸다고 으스대는 꼴을 보면 아주 그냥 우습기 짝이 없다고.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것 같아요. 영어도 사실은 살아남기 위해서 공부했어요.”
장인어른이 미국으로 1년간 파견을 가시게 되었을 때, 아내의 나이는 12살이었다.
“미국에서도 아빠는 늘 바빴어요. 엄마도 어떻게든 돈을 벌 일을 찾느라 정신없었죠. 그 당시 뉴욕의 변두리 지역 학교에는 다문화 뭐 이런 게 없었어요. 학교에 동양인은 나랑 둘째뿐이었고, 선생님은 대놓고 아시아인이 어쩌고 하면서 차별하던 그런 때였어요.”
한차례 숨을 고르고 아내가 말한다.
“나는 살아남아야 했어요. 학교에서 뭔가가 없어지면 동생이랑 내가 교장실로 불려 가는데, 우리를 변호해줄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든 내 동생을 지켜야만 했어요.”
아내가 1년 만에 원어민에 가까운 회화 능력을 갖게 된 계기이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중학생 때부터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영어 발음이 좋아서 교과서 테이프나 학습지 테이프 녹음하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영어로 된 동화를 번역하는 일도 했어요. 어려서 페이는 적었지만, 영어 감각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됐어요. 그리고 가끔 집이 힘들 때 생활비를 보태기도 했고요.”
일명 “딸 론(Loan)”이라고 불렀다며 아내는 자랑스러워했다. 아내의 어려웠던 유년시절 이야기는 안정적인 교육자 집안에서 나고 자란 내게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온갖 불만 불평 끝에도 아내는
"그래도 할만해요."라고 말하곤 한다.
어려서부터 고난을 넘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아내는 남들이 다 힘들다 하는 불경기에도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 기쁨의 여운이 다하기도 전에 잦은 해외 출장으로 지쳐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온갖 불만 불평 끝에도 아내는 “그래도 할만해요.”라고 말하곤 한다. 유년 시절의 힘겹던 생활을 떠올려보면 지금은 귀족같이 사는 것 같다면서.
회사를 다니던 때에는 아내가 출장을 간다는 것에 큰 감흥이 없었다. 그저 퀸 사이즈의 침대가 평소보다 차갑고 휑하게 느껴지는 정도였다. 나 또한 늘 지쳐있었고, 어차피 집에 머무는 시간도 그다지 길지 않았다. 배게에 머리를 대면 TV 전원이 꺼지듯 나의 의식도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계속 혼자이고, 아내가 아니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다.
[띠리리리리릭]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던 찰나, 핸드폰이 울린다. 아내의 웃는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파란색 통화버튼을 꾸욱 누르자, 낯선 방을 배경으로 아내의 얼굴이 보인다. 아내의 눈 밑으로 짙은 그림자가 진다.
“중국 잘 도착했어요. 뭐 하고 있었어요?”
“응, 이제 자려고 누웠어요. 당신은?”
“나도 막 숙소 도착했어요. 내일부터 일정 시작이에요.”
그렇겠지. 일요일 오후에 출장을 보내 놨는데. 양심이 있으면 오늘 일을 시키진 않겠지.
“피곤하진 않아요?”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괜찮아요.”
오늘은 어땠어요?라는 질문에 아내는 공항에서부터 숙소까지의 여정을 늘어놓는다. 반지원정대도 울고 갈 험난한 여정. 그래서 절대반지는 잘 부쉈는지.
“여기 너무 휑해요. 방은 큰데, 여자는 나 하나라서 이 큰 방이 다 내 차지예요. 그래도 덕분에 오늘은 실컷 통화할 수 있어요.”
아내가 침대에 엎드리며 말한다. 그리고 참새처럼 재잘대는 아내의 목소리. 하지만 오늘따라 그 기세가 오래가지 못한다. 아내의 목소리가 서서히 작아지더니, 이내 눈이 감겨온다.
“씻고 자요. 화장도 지워야지.”
응, 하고 대답하지만, 아내는 움직일 줄 모른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스피커를 넘어온다. 불도 끄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자야 피로가 조금이라도 더 풀릴텐데. 내일 제시간에 일어날 수는 있을까. 안쓰러움과 걱정이 한데 엮여 머릿속을 어지럽히지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발을 동동 굴러봐야 아내는 바다 건너에 있다.
핸드폰을 협탁에 기대어 두고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댕긴다. 산속의 밤은 짙다. 주차장 한쪽에 붙어있는 재떨이 근처에는 불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밤이 짙은 만큼
별은 더욱 뚜렷해진다.
“별이 밝다.”
이제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숨을 쉬는 것만큼 익숙해졌다. 밤이 짙은 만큼, 별은 더욱 뚜렷해진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별자리가 선을 이어 놓은 것 마냥 선명하다. 당신이 있는 그곳도 여기처럼 별이 보일까.
침대에 다시 누워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여전히 새근거리는 아내. 그리고 이따금 들리는 낮은 코 고는 소리. 스탠드 불을 끄고, 아내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는다.
선명한 밤하늘의 별이 감은 눈 위로 떠오르고, 이내 불을 끄듯 서서히 사라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