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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Oct 22. 2019

퇴사 선배 이야기

어느 백수 남편의 일기 (11)


[드르르르륵]

 

독서실의 네모 반듯한 책상 위로 드릴 뚫는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의 원인이 내 핸드폰임을 알아채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이 시간에 핸드폰이 울리는 것이 얼마만인지.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화면을 채운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정호 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

 

한여름 더위를 힘껏 차 내리는 시원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영은 선배. 1년 먼저 입사하고, 정확히 1년 먼저 퇴사한 그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국의 명문 공대 석사 출신이다. 그런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영업직으로 입사지원을 했고, 신입시절부터 남다른 성과를 올려 입사 3년 차에 이른바 ‘핵심인재’로 분류되었다.

그녀가 사직서를 제출하던 날의 인사팀 분위기를 잊을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상무님께 보고하기 전 작두를 타듯 날 선 분위기로 한껏 날카로워진 팀장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회사 그만뒀다며! 너무하네. 전화 한 번 안 하고. 어떻게 지내는 거예요?”

 

잘 지냅니다, 라는 궁색한 대답에 그녀는 거침없이 다시 한번 칼끝을 가슴 깊숙이 찌르고 들어온다. 

 

“보자! 바쁘다고 핑계 댈 생각 말고. 내가 정호 씨보다 백수 선배인 거 알죠?”

 

백수 선배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네가 댈 핑계들이 다 핑계인 거 알고, 사람 만나기 민망하다는 거 다 알아. 그래도 난 널 봐야겠으니 어설프게 변명하지 말고 나와, 라는 말이 그 한 단어에 모두 들어있다. 

 

한 번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든 당장 해내고 보는 선배였다. 그 성격은 퇴사 후에도 굳은 바위처럼 여전하다. 날짜, 시간, 장소까지 모두 정하고 나서야 선배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로 약속 내용을 다시 보내는 수고까지. 영업 성공의 비밀이 엿보인다.

 

영은 선배와 가까워진 것은 교육 업무를 시작했을 때였다. 전 직원이 직급에 따라 1년에 3에서 6학점까지 온라인 교육을 들어야 하는 교육 이수제도는 실무자들에게 적지 않은 짐이었다. 퇴근 후, 혹은 주말 시간을 쪼개어 할애하지 않으면 절대 이수할 수 없는 분량의 교육과정들. 불만이 클 법도 한데, “승급 승격에 반영합니다”라는 인사팀의 선언 앞에 각종 불평불만은 썰물을 만난 조개처럼 뻘 속 깊은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교육비 내역을 본 팀장이 눈초리를 흘긴다.
언제는 사내 교육 활성화가 목표라더니.


모두가 마지못해 의무학점을 채우는 것이 목표였을 때, 그리고 그마저도 벅차 하던 그때, 그녀의 교육과정 이수 기록은 폐허 속에 홀로 우뚝 선 승전탑과 같았다. 

 

“해외영업팀 올해 교육비 지출 실적이 왜 이래?”

 

교육비 내역을 본 팀장이 눈초리를 흘긴다. 언제는 사내 교육 활성화가 목표라더니. 

 

“이영은 대리가 다른 사람보다 교육을 좀 많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들었길래 팀원이 제일 적은 팀 지출이 다른 팀보다 더 높아?”

 

“12학점을 들었더라고요.”

 

“뭐?”

 

팀장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매 달 빠짐없이 새로운 교육을 신청해 들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괜찮다. 교육 활성화가 올해 인사팀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으니 예산이 조금 초과되더라도 성과로 내세우기에 적절하다. 어쩌면 내년 교육비 예산을 늘리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수강내역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생긴다. 팀장이 그것까지 챙겨보지는 않겠지,라고 기대했는데. 현실은 언제나 최악을 향해 흐른다.

 

“이게 뭐야. 영업팀 직원이 근로기준법 교육을 왜 들어? 그것도 3개 씩이나!”

 

젠장. 조용히 넘어가기는 틀렸다. 매달 몇 백명의 신청 교육과정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어 일괄 승인하던 것이 이렇게 발목을 잡는다.

 

“정호 씨 다음 주에 해외영업팀 회식 다녀와.”

 

조용히 모니터를 노려보던 팀장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듣는 유선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외영업팀장한테는 내가 말해둘 테니까, 가서 2차까지는 우리 팀 법인카드로 계산하고, 이대리 분위기 좀 보고 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팀장의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계열사 전체를 통틀어 노조가 없는 회사는 한 손에 꼽는다. 그중 하나가 우리 회사라는 것에 대해 팀장은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노사협의체에 임원 의전보다 더 공을 들이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대로만 간다면 팀장의 임원 자리도 불가능한 것은 아닐 텐데. 보물 같은 S급 인재가 만에 하나 노조라도 만들겠다고 머리에 띠를 두르는 순간 상황은 복잡해진다. 아니, 상황이야 어떻게든 처리하겠지만, 팀장의 상무 타이틀은 ‘아름다운 이별’을 흥얼거리며 루비콘 강을 건너가는 것이다.

 

“이대리랑 1년밖에 차이가 안 나니까 친해지기 어렵지 않을 거야. 나이차도 얼마 나지 않고. 이 기회에 친해져 두면 나쁠 것 없으니 가서 잘 이야기하고 와. 다녀와서 바로 보고하는 것 잊지 말고.”

 

팀장의 임원 타이틀을 위해, 나는 다음 주에 폭주기관차 많기로 유명한 해외영업팀 회식에 가야 한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영업팀의 회식은 조울증 환자의 증상과 묘하게 닮은 점이 있다. 처음에는 미친 듯이 유쾌하고, 콩코드 여객기보다 빠르게 술잔이 돌아간다. 그리고 고기가 떨어져 갈 때쯤, “너는 이게 문제이고…”와 같은 상급자의 지적이 펼쳐지면 부하 직원들은 고개를 집어넣은 거북이처럼 한껏 쪼그라든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마무리는 언제나 “이게 다 잘 되라고 하는 이야기야. 우리 오늘 지난 것들 다 털어내고, 내일부터 힘내서 다시 달리자고. 파이팅!”과 같은 마무리 멘트가 이어진다. 그곳에서 외지인인 나는 최하급자에 맞춰 쌍둥이처럼 자세와 표정을 복제한다. 그가 웃으면 나도 웃고, 그가 고개를 숙이면 나도 함께 고개를 숙인다. 

 

“선배님,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네요. 선배님 칭찬이 워낙 자자해서 한 번쯤 이야기 나눠보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거북이가 되기 전, 한껏 술기운이 올라갈 때 잔을 들고 자리를 옮기며 말한다.

 

“아, 정호 씨. 그러게요. 지나다니면서 인사만 했지, 술은 처음이네. 일 할만 해요? 인사팀 힘들지?”

 

잘해도 본전, 못하면 욕먹는 부서지요,라고 상냥하게 운을 떼는 선배. 발갛게 상기된 볼을 잔뜩 펴가며 웃는 얼굴에 구김이 없다. 

 

“지난주에 해외영업팀 미수금 때문에 재무팀 불려 가셨던 것 같은데, 그건 잘 해결되셨나요? 재무팀 권 과장님 엄청 깐깐하시죠?”

 

“아, 진짜, 그때 생각하면 정말…!”

 

다양한 팀의 회식자리에 불려 가면서 배운 한 가지 팁이 있다. 어느 팀이건 재무팀 욕부터 시작하면 친해지기 쉽다. 아마 재무팀은 인사팀 욕으로 시작할게 뻔하지만, 이렇게 서로 돕고 돕는 거지.

 

“그나저나, 대리님 교육 정말 열심히 들으시던데…”

재무팀의 까탈스러운 과장, 귀를 닫고 사는 팀장, 그리고 불친절한 경리를 거쳐 드디어 본론에 들어왔다.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술기운을 누르고, 최대한 어눌하게 이야기한다. 상대가 눈치채면 곤란하다.

 

“근로기준법 강의도 들으셨던데, 어땠어요? 저도 그거 팀장님이 들으라고 그러시는데, 커리큘럼이 너무 빡빡해서 듣기 겁나더라고요. 들을만한가요?”

 

선배의 입가에 미소가 한층 짙어진다. 등줄기가 서늘하다.

 

“아니, 어려워요. 시험 통과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어.”

 

잔뜩 긴장하고 접근한 것에 비해 선배의 근로기준법 교육 이수 전말은 단순했다. 영업 업무를 하면서 여성으로서 영업 커리어에 한계를 느꼈다는 것이었고, 자신이 회사에 남아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니 인사팀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도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정호 씨, 고객서비스팀 정 과장님 알죠? 얼마 전에 육아휴직 복직한 분.”

 

안다. 휴직 전의 팀에서 재배치를 거부하는 바람에 고객서비스팀에 배치했던 그 과장님. 다행히 정 과장님 본인도 큰 이견이 없어 잘 넘어갔던, 골치 아픈 문제가 될 수도 있었기에 상당히 긴장했던 사건이었다.

 

“솔직히 여자는 불안해요. 아무리 법이 잘 되어있다고 해도 현실은 커리어가 단절된 여자 직원을 도태시켜요. 나도 머지않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싶은데, 과연 이 회사가 그때에도 나를 이렇게 아껴줄까를 생각하면, 글쎄. 잘 모르겠어. 당장 자신감부터 떨어지는 거야. 휴직을 하게 되면 당장 영업라인부터 다른 사람에게 인수인계할 텐데. 사회의 하루는 길어요. 하루에도 드라마 한 편을 찍을 만큼의 이야기가 나오거든. 하물며 1년, 아니, 반년이라는 시간은 나 같은 일개 영업사원을 잊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잖아. 뭔가 전문성이 있어야 그나마 복직하거나 이직하기가 쉬운데, 인사 업무가 적당해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대리님은 전문지식이 있잖아요, 라는 질문에 그녀가 피식 웃으며 술을 털어 넣는다.

 

“내가 왜 박사를 안 하고 한국에 들어왔겠어. 나랑 안 맞아요.”

 

그 후 봄이 되었을 때부터, 영은 선배는 한 달이 멀다 하고 인사팀으로의 직무전환을 꾸준히 요청했다. 하지만 회사는 그녀를 영업팀에 남겨두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영업 능력은 회사가 인정한 S클래스다. 굳이 부서 전배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사직서를 냈다. 

 

“로스쿨에 합격했어요. 변호사를 할 생각이에요.”

 

뒤늦은 인사팀 전배 제안도, 더 이상 그녀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전공, 경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법전원에서도 그녀는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로스쿨에 들어오고 느낀 게 있어. 여기도 결국 다 비슷해요. 의대를 다니다가 안 맞아서 온 사람도, 회사를 다니다가 온 사람도, 한의사를 하다가 온 사람도 있어요. 다들 나처럼 헤매다가 온 거야. 그런데 내 입학 동기 중에 벌써 4분의 1이 그만뒀어요. 적성에 맞지 않는 거지.”

 

소주잔을 시원하게 내려놓으며 선배가 말한다. 1년이 지난 그대로의 모습이 정겹다.


“정호 씨는 어때?”

 

여전히 거침없는 선배의 질문에 대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는 쓰다 못해 신맛이 난다. 

 

“괜찮아. 급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안달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뭘. 마음 편하게 먹고, 지금은 여유 있게 생각해요. 정호 씨도 고생 많이 했을 텐데.”

 

노무사 공부를 하고 있다는 말에 선배가 답한다. 

 

그녀는 내 말속에서 어떤 표정을 읽은 것일까. 나와 선배의 삶에는 어떤 차이가 있기에, 나는 똑같은 백수이자 수험생인 그녀가 이토록 위대해 보이는 것일까. 아무리 백수기간이라도, 1년이라는 시간 속에는 무시 못할 존경심이 샘솟게 만드는 마법이 들어있는 모양이다.

 



선배와 헤어지고, 집으로 가기 위해 부른 대리기사가 보인다. 기사는 능숙하게 내 차를 깊어가는 밤의 도로 위로 띄운다. 내가 운전하던 것보다 2배는 빠른 것 같다. 뭐지, 내 차인데.

 

“많이 드셨나 봐요.”

 

기사가 손을 뻗어 비닐봉지를 건넨다.

 

“손님들 중에 가끔 과음하신 분들이 있어서 챙겨가지고 다녀요. 혹시 모르니 들고 있으세요.”

 

비닐봉지를 받아 들며 룸미러에 비친 기사의 얼굴을 본다. 30대 후반의 말끔한 외모를 가진, 레이서 못지않은 속도의 대리기사.

 

“회식하셨나 봐요?”

 

“아뇨, 전 회사 선배를 만나서 한 잔 했어요.”

 

“전 회사 사람도 만나고, 회사 생활을 잘하셨나 보네요.”

 

인상 좋은 기사의 목소리가 엔진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인상만큼 차도 조심히 몰아주면 참 좋을 텐데.

“제가 잘했다기보다는, 워낙 사교성이 좋은 선배라… 능력도 좋고요. 지금은 회사 그만두고 로스쿨을 다닌다는데, 머지않아 변호사가 되어있겠죠.”

 

취했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별소리를 다 한다.

 

“아이고, 로스쿨이라니. 왜 그러셨을까. 요즘 로스쿨 분위기 안 좋아요. 로스쿨 변호사 자격시험 통과 비율이 점점 낮아져요. 불합격한 응시자는 쌓이는데 통과인원은 그대로니 경쟁이 점점 심해지는 거죠. 게다가 사시 출신보다 한 단계 낮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 주어지는 기회부터 다르답니다. 같은 법무법인에 들어가도 로스쿨 출신은 잡무나 시키고 굵직한 일은 사시 출신한테 떨어지는 거죠. 점점 변호사가 늘어나다 보니 일거리를 찾지 못한 변호사도 점점 늘어나고 있고요. 변호사가 옛날의 변호사가 아니에요.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폐해죠. 나라가 하는 일이 다 그래요. 손님은 회사 그만둘 생각 하지 마시고 열심히 다니세요. 저도 예전에는 알아주는 대기업에서 과장까지 했는데, 철없이 다른 거 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속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저, 기사님 잠시만…”

 

차가 속도를 줄여 갓길로 멈춰 선다. 차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목구멍을 따라 분수처럼 속에 있던 것들이 뿜어져 나온다. 숨이 턱 막히는 그 순간, 선배의 서글서글한 웃는 얼굴이 떠오르고, 두 눈동자 속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희미한 그림자가 진다. 

 

결국 다 비슷해요.
괜찮아.
급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다시 출발한 차의 뒷자리에서,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창 밖을 내다본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검은 풍경 너머로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도 결국 다 비슷해요. 괜찮아. 급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선배의 그 말은 누구에게 건네는 것이었을까. 나의 부러움은 과연 무엇을 향하던 것이었을까. 

 

한참을 달려 익숙한 시골길이 눈에 들어온다. 집이 가까워오고 있다. 문득, 창밖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내가, 왜, 그만뒀더라.”


스쳐가는 풍경처럼 의식도 서서히 잠겨, 암흑만이 남아 시야를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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