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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Oct 07. 2022

내가 알던 착한 아내가 사라졌다.

08. 임신 12주 차, 아내가 변하고 있다.

“당신 요즘 좀 변한 것 같아.”


나의 말에 아내가 쫑긋 귀를 세운다. 나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뭔가 짜증이 많이 늘었어요.”


잠깐의 침묵 뒤 아내가 말한다. 맞아요. 나 요즘 좀 그래. 역치가 낮아졌어.


“모든 일에 대해서 참을 수 있는 역치가 낮아졌어요. 날 불편하게 하는 어떤 자극이 오면 나도 모르게 순간 욱하고 그 역치를 넘어버려요.”


이렇지 않았었는데. 아내의 말 끝이 흐려진다.


아내가 변하고 있다.


아내가 변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순한 와이프가 아니다. 아내 나이 스무 살에 만나 서른둘이 된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하며 목소리 높여 싸웠던 일이 있었던가? 심지어 결혼 준비를 하면서도 불만이나 서운함을 토로할지언정 짜증을 내는 일은 없었던 아내였다. 그러던 그녀가 하루에도 몇 번씩,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어렵던 짜증 섞인 표정을 짓는다. 눈에 띄게 날카로워진 아내는 땅에 묻힌 시한폭탄 같았다. 언제 어디서, 얼마나 크게 터질지 모르는 그런 폭탄.


임신 7주 차로 접어들면서 아내는 부쩍 더 힘들어했다. 안 그래도 늘었던 잠이 더 늘었고 입덧은 더 심해져 음식 제약이 더 커졌으며, 심지어 먹히는 음식도 평소의 절반을 넘기지 못했다. 잠을 잘 때면 꼭 내 손을 붙잡고 자던 아내는 등이 닿으면 토할 것만 같다며 내 반대쪽으로 멀찌감치 돌아 누웠다. 새벽에도 갑자기 토할 것 같은 느낌에 몇 번씩 깨어 화장실로 향했고 배탈이라도 난 듯 습관처럼 설사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곁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아내의 입덧은 쉽지 않았다. 


아내의 짜증은 아마도 신체적인 변화에서 기인하는 것일 거라, 그렇게 생각했다. 급격한 호르몬의 변화와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하는 신체적인 변화. 식사도 수면도 휴식도, 무엇 하나 편하게 되지 않는 날들로 하루하루 지쳐가고 있을 것이라고. 


나의 불만도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로는 이해하려고 하지만, 솔직히 마음까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공감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아내가 경험하고 있는 그 아프고 힘든 과정은 지친 아내의 표정과 몸짓에서 드러날 뿐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었고, 나는 그저 조금이나마 상상을 할 수 있을 뿐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의 불만도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아내의 짜증 섞인 표정과 말투가 일상 속에서 나를 찌를 때마다, 나는 당황하고 뒤로 물러서며 내가 뭘 잘못했는가를 돌이켜보아야 했다. 평소보다 더 조심하고 있고 배려하고 있는데도 죄인이 된 것 같은 그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힘든 아내를 붙잡고 화를 낼 수는 없다. 저 짜증과 화의 원천이 나의 잘못이 아니듯이, 아내의 것도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아내의 힘든 시간을 함께 감수하려 하듯이, 아내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평소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렇기에 나는 그저 납작 엎드리기로 마음먹었다. 불만이 쌓여가도 내색하지 말자고. 비록 마음이 편치 않아도 나만의 것으로 꿀꺽 뱃속 깊이 삼켜버리기로.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 가시처럼 남아 나를 괴롭히는 생각. 아내는 언제쯤 예전처럼 인자한 표정을 되찾을까. 혹시, 이대로 완전히 변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결혼할 때 한 번,
임신할 때 한 번,
그리고 아이를 낳은 후 한 번


회사 전체 회식이 있었을 때 팀장들이 모인 테이블에서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렸다. 이미 고등학생 학부모가 된 A팀 팀장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힘들죠? 이제 예전 같지 않을걸요.”


좋은 시절은 다 끝났네요. B팀 팀장이 거들었다. 이제 두 살 된 아이의 아빠다. 


“제 경험상 여자는 세 번 변해요. 결혼할 때 한 번, 임신할 때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를 낳은 후 한 번.”


이제까지 팀장님이 알고 지내던 와이프를 떠올리면 안 돼요. 지금부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랑 산다는 생각으로 적응해야지, 안 그러면 많이 힘들어져요. A 팀장은 베테랑 유부남의 포스를 가득 담아 말하며 내 잔에 도수 높은 안동 소주를 채워주었다.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겁니다.”


말수가 참 적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만면에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며 낄낄 웃는 A팀장님. 나만 당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아이를 가진 유부남 팀장들이 합심해서 쏟아내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들. 뭘 상상하건, 그 이상을 보게 될 겁니다. 아무리 상상해도 현실은 그보다 아주 조금 더할 겁니다. 


그래도, 축하해요.


한참을 신나서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축하해요. 


“축하해요. 아이를 갖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정말 너무너무 힘든데, 그래도 좋은 일이에요.”


힘든데 좋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 하지만 그 축하 인사는 지금껏 놀리며 쏟아내던 장난기 어린 말과는 다른 무게감을 가지며 내게 다가왔다. 축하해요. 


지치고 피곤한 표정으로 출근하는 팀장님들의 얼굴 속 그 어딘가, 잔잔하게 깔려있는 기운의 원동력을 본 것 같았다. 아, 저 사람들은 이미 이 힘든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이겨내고 있구나. 그 안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고, 또 그 자체로 생활을 계속해나갈 힘을 얻고 있구나. 이 시기를 계속 이어나가면서, 더 큰 행복으로 삶을 꾸려나가는구나. 팀장님들의 축하한다는 말들이, 내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 순간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


아내가 변하고 있다. 여전히 내게는 적응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필요함을 느낀다. 여전히 변화 후의 우리 관계가, 우리가 꾸려갈 가정의 모습이, 새롭게 정립될 우리의 일상이 두려움을 남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 이 너머에는 분명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할 고난의 시간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그 잔잔한 미소 속에 감춰진 묵직한 균형추도 함께 내 안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고난의 시간을 앞둔 후배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 전할 수 있는, 양 발을 땅에 디디고 서서 웬만한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해줄 바로 그 무게추. 


부디 그 무게추로 인해, 아내도 나도,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으면.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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