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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Feb 19. 2023

출산가방을 싸는 아내

34. 출산을 위한 본격적인 지출이 시작되었다. 

임신 29주가 되었다. 준비성이 철저한 아내는 늘어가는 주수에 맞게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아이 방을 만들기 위한 나의 서재 철거도 잘 마무리되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대단히 힘들지는 않았다. 약간의 아쉬움이 남을 뿐, 그마저도 새로운 기대 앞에서는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사소한 일이었다. 


이제는 텅 빈 서재를 새로운 물건들로 채워나가야 한다. 아이를 위한 침대, 기저귀갈이대, 유모차, 물티슈와 기저귀를 수납할 수납함, 기저귀 전용 쓰레기통 같은 것들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가 관심 가진 적 없던 그런 물건들이 이 방을 채워나갈 것이다. 그 사실이 묘하게 낯설다. 내 삶이 정말 달라지고 있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아서. 


당근마켓은 예비 부모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당근을 최대한 활용해보려고 해요.”


아내가 말했다. 


“신생아 용품은 쓰는 기간이 짧은데도 아기 프리미엄이 붙어 가격대가 꽤 높아요. 그러니 상태 좋은 중고를 잘 찾아서 활용하는 게 좋아요. 저렴하고 상태 좋은 물건들이 중고시장에 많으니까, 잘 건져서 쓰다가 다시 중고로 되팔면 많이 절약하고 아낄 수 있어요.”


아내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다. 아껴서 나쁠 것 없지. 꼭 새걸로만 사야 하고 꼭 비싼 걸로 해야 좋은 부모가 되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잘 아껴서 현명하게 물건을 구비하자고 우리 부부는 마음을 맞췄다. 


곧 당근에 여러 키워드가 등록되었다. 아기침대, 유모차, 젖병소독기 등등. 우리가 제일 처음 건져 올린 물건은 아기 침대였다. 새 걸로 사면 50만 원은 족히 들었을 구성품들을 10만 원도 되지 않는 금액으로 모두 구했다. 


물품 운송은 내 담당이다. 퇴근길 동선이 이리저리 꼬여간다. 본부에서 아내의 명령이 내려온다. 오늘은 판교의 00 아파트 X동 앞에서 저녁 8시 20분에 접선한다. 받아야 할 물건은 침대. 부피가 크고 주차공간이 협소하니 빠른 거래가 생명이다. 미리 자동차 뒷좌석을 폴딩 하여 짐을 실을 공간을 확보하고 출발할 것을 권한다. 안전거래 후 본부로 귀환하라. 귀하의 행운을 빈다. 


똑똑한 소비에 유튜브의 도움이 컸다.


유튜브로 아기 용품을 열심히 찾던 아내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아기용품 전문 매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매장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는 다양한 육아용품의 비교 리뷰가 올라왔다. 아내는 제품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매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내가 눈여겨보는 브랜드가 대거 입점해 있는 그 매장은 아내의 소중한 연차 사용도 감수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매장에 꼭 가봐야겠다고. 그리고 이 매장에 관심을 가진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고. 아내는 연차를 쓰겠다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다녀오려고요. 상당히 큰 매장이라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연차를 쓰기로 했어요. 주말에는 사람이 많이 몰릴 것 같으니, 평일에 가서 여유 있게 보려고. 가격대를 보고 인터넷 최저가랑 중고가격이랑 같이 비교해 볼 거예요.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 결정하려고.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가니까 당신은 굳이 같이 가지 않아도 돼요.”


일 열심히 하고, 퇴근길에 나 데리러 오면 돼요 꼬물이 아빠. 아내가 말한다. 놀이동산에 가는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내는 신이  난 것 같았다. 


아내가 장모님, 처제와 함께 쇼핑을 간 날에는 하루 종일 카톡이 울리지 않았다. 하루에도 두어 번 정도는 꼭 아내에게서 메시지가 오곤 했는데. 장모님과 처제가 아내를 잘 보살펴줄 것이라는 생각에 불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직장 동료들과 저녁 회식자리에도 참석했다. 10시가 다 되어갈 즈음 처가에 들러 아내를 픽업했고, 그때서야 아내의 밀린 하루 일과를 들을 수 있었다. 


출산 가방에 필요한 물건들을 샀어요.


“출산 가방에 필요한 물건을 거의 다 샀어요. 앞으로 당근으로 구하려고 하는 품목을 빼고, 병원과 산후조리원에서 사은품이나 선물로 주는 품목도 몇 가지 빼고, 최대한 줄여서 샀어요.”


그런데도 세상에, 50만 원이 넘게 들었어요. 아내가 말했다. 나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아내는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놀이동산에 놀러 가는 것처럼 신났던 아내가 지갑을 열면서 조금 위축된 듯했다. 


“장모님이랑 처제는 어땠어요? 같이 많이 봤어요?”


나의 물음에 아내가 반색하며 말한다. 두 사람 다 되게 즐거워했어요. 물건들이 다 너무 작고 귀여워서 감탄사로 가득 찼어요. 어머. 어머. 어머머머머머. 


집에 도착해 씻고 나오자 거실에서 아내가 주섬주섬 커다란 비닐봉지를 풀어놓으며 나를 부른다. 


“이리 와 봐요. 자, 이거 봐바. 그러니까 이게….”


출산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은 기대감과 설렘이 더 큰 듯하다. 뱃속의 아이가 커갈수록, 아내의 배가 부풀어 오를수록 오히려 내가 더 초조함을 느끼는 것 같다. 저 큰 게 정말 나온다고? 이런 생각을 하며 아내에게 무섭지 않으냐 물어보지만, 아내는 그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 전에 다니던 회사에 그 이상한 여자 선배 기억나죠? 괜히 자격지심에, 내가 먼저 대리 진급한다고 엄청 괴롭혔던 그 선임. 그 사람이 애 둘을 낳았잖아요.”


그 한심한 사람도 한 걸 내가 못할 리 없어요. 아니, 내가 더 잘할 수 있어. 자신만만하게 웃는 아내는 아마도 군대에 갔으면 별 정도는 우습게 달지 않았을까. 당찬 아내의 말에 슬며시 아내의 품에 안기며 부푼 배에 손을 올려본다. 이따금 볼록볼록 움직이는 꼬물이. 포근한 아내의 품에, 곧 이 아이가 안기게 될 것이다. 세상 든든한 엄마다. 


나는 아빠가 될 준비가 되었을까?


출산 가방 준비가 끝났다. 이제 정말 출산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느낌이다. 시간은 나를 기다리지 않고 꾸준히 앞을 향해 나아간다. 그런데 나는 아빠가 될 준비가 되었을까? 뭔가 분명 변하고 있는데, 아직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시간이 알려주려나? 


처음 아내가 임신을 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나 아빠로서의 생활이 자리를 잡고 나면 그때는 알게 될까. 지금의 내가 겪는 이 변화의 소용돌이가, 과연 무엇을 위한 준비의 과정이었는지. 나는 어디까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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