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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Feb 26. 2023

만삭 사진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35.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지옥같이 바빴던 12월을 지나 1월. 임신 30주 차 주말이 되었을 때였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러하듯 나 또한 연말을 지나며 걸어 다니는 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주말을 맞아 복수라도 하듯 깊은 잠에 열렬히 빠져있던 나를 흔들어 깨우며 아내가 말한다. 


“오늘 만삭 사진 찍으러 가는 것 기억하고 있죠? 얼른 준비해요.”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만삭사진이라니. 임신 초기에 병원에서 안내해 줄 때만 해도 너무도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어느새 코앞에 닥쳐왔다. 아내의 부푼 배에 눈길이 간다. 어느 태평양 한가운데 홀로 우뚝 선 화산섬 같은 아내의 배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오랜만의 단잠에서 깨야만 했던 나의 가늘어진 눈을 알아본 것인지 불쑥, 꼬물이가 엄마 배를 밀어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빠, 정신 차려. 너 이제 아빠야 하고 말하듯이. 조금만 더 지나면 발 모양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꼬물이의 태동이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꼬물이는 커지고 힘이 세지고 있다. 정말 피부로 느껴질 만큼.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내의 배에 미세하게 임신선 자국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튼살오일과 크림을 발라줬음에도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한 꼬물이는 아내의 배 이곳저곳에 붉은 튼살 흔적을 만들어갔다. 아내는 더 이상 바로 눕지 못했고, 꼬물이의 강한 태동 때문에 몇 번이고 새벽에 잠에서 깨야했다. 주수보다 좀 큰 편이라는 꼬물이는 준비가 늦된 우리 부부와는 다르게 세상에 나올 준비를 빠르게 마쳐가고 있었다. 


아버님이 날 부르는 말이 될 줄이야.


한산한 주말 도로를 달려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청담동의 어느 일반 주택을 개조해 만든 스튜디오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직원들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아버님, 신발 벗고 들어오실게요.”


아버님?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고 나서야 나는 그 말이 나에게 건넨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구나. 내가 아빠구나. 아내의 뱃속에 있는 저 발차기를 잘하는 아이가 바로 내 딸이지. 저 아이가 아내의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올 준비가 다 되어가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여기 온 거지. 그렇지. 그런데 세상에, 아버님이라니.


지금과 비슷한 느낌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12년 전 결혼을 하던 때였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스튜디오나 헤어메이크업 업체, 드레스 업체, 출장뷔페 업체와 연락을 주고받던 때. 그들은 아내를 신부님이라 불렀고, 나를 신랑님이라 불렀다. 그 호칭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어색해했던 것 그대로, 이번에는 아버님이란 호칭에 낯설어하는 나였다. 그 단어가 나의 것이 되었다니, 누군가 거대한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친 느낌이었다. 


원하지 않았던 선물, 무료앨범


어떻게 촬영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면서 장소를 옮기고 옷을 바꿔가며 촬영했다. 아내는 오랜만에 신는 힐이 높은 구두를 힘겨워했고, 나의 시선은 포토그래퍼의 현란한 지시와 관계없이 자꾸만 보조스태프의 뒷주머니에 꽂힌 기다란 아기 장난감에 꽂혔다. 바깥에서는 50일 된 아기와 100일 된 아기의 기념 촬영을 위해 스태프들이 열심히 장난감을 흔들어대고 있었고, 아내는 촬영 틈틈이 구두를 벗으며 부어가는 발을 달랬다. 


산후조리원과 연계된 스튜디오였다. 산후조리원 고객에게 무료로 앨범을 만들어준다기에 찍었던 사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이런 인위적인 기념물에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무슨 무슨 특별한 날에 대한 의무감이 거의 없는 편이랄까.


하지만 산후조리원에서 해주는 서비스라고 하니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겠구나 했던 것이었는데. 우리는 곧 다시 한번 세상의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 세상에 결코 공짜란 없다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것을. 


누구나 다 하는 건데 당연히 해야죠.


준비부터 마지막 사진 확인까지 대략 3시간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중간에 스튜디오 측에서 내게 아내 몰래 영상편지도 찍게 했다. 그 영상편지는 촬영이 끝난 후, 직원의 상품 설명을 듣기 직전에 서프라이즈로 틀어주었다. 영상편지가 끝나자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평소에 내가 그렇게 감정표현을 안 했던가? 아, 그런데 아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눈물이 고인 눈은 감동과 애정을 말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떤 위태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직원은 우리 부부에게 꽤 긴 시간을 들여 추가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앨범 상품을 소개했다. 그리고 사진 촬영이 끝난 후 앨범에 들어갈 사진을 고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우리는 곧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오늘 촬영한 사진이 들어간 앨범을 무료로 받으려면(처음 산후조리원이 약속했던 그 앨범 말이다.) 아이가 50일이 되었을 때 반드시 스튜디오에 와서 사진을 찍어야 하며, 만약 그때 오지 않으면 앨범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때 가서 원본사진을 받으려면 촬영 횟수당 30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만삭사진과 신생아 사진을 합하면 최소 60만 원이다. 하지만 오늘 업그레이드해서 유료 앨범을 계약하면 이런저런 서비스와 추가 촬영을 더해서 파격적으로 할인된 가격에 훌륭한 퀄리티의 결과물을 선물로 받게 된다고 두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이어가던 직원은 결정타를 날리듯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다 하는 거니까 당연히 해야죠. 평생 남는 것인데 이 정도 금액이면 정말 싼 거예요.”


이 멘트를 들은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끝났구나. 아마도 우리가 다시 이 업체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아이가 스튜디오에서 조명을 받으며 사진을 찍을 일 따위는 결코 벌어지지 않겠지. 저 직원은 절대 모르겠지. 아내의 절대 변하지 않을 삶의 모토를. 방금 당신이 한 말이 아내의 삶에 유일하게 껴들어갈 수 없는 금칙어라는 것을. 


아내는 평범한 것을 거부한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을 왜 나까지 해야 하느냐고 되물을 사람이다. 차라리 아무도 안 하는 일인데, 당신이 해보면 어떻겠느냐 묻는 게 낫다. 그게 더 아내를 꼬시기 쉬운 방법이다. 


우리는 만삭사진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스튜디오를 나서기 전에 결정해야 할인된 가격으로 서비스를 넣어줄 수 있다며 재촉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우리는 재빨리 스튜디오를 떠났다. 더 이상 조금도 귀중한 주말 시간을 그곳에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제안은 고맙지만 우리는 아직 앨범 제작에 수백만 원의 돈을 지불할 계획을 세운적이 없기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일단 집으로 돌아가 고민해 본 후 답변을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직원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오늘 찍은 사진을 고르려면 유료 앨범을 구매해야만 하고, 그렇지 않다면 스튜디오에서 임의로 사진을 골라 앨범에 넣어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는 3시간 동안 찍은 사진의 원본을 구경도 하지 못한 채 스튜디오를 떠나야 했다. 원본을 보려면 30만 원을 내야 한다. 혹은 200만 원에 달하는 유료 앨범을 구매해야 한다. 나는 이런 구조가 무척 불합리하다 느꼈다. 


“그 돈이면 차라리 카메라와 포토프린터를 사서 계속 찍어주는 게 낫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한참을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던 아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래요. 50일에 아이를 데리고 스튜디오까지 나와서 찍을 만큼 이 앨범이 중요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내버려 둬도 꿀피부에 너무도 예쁠 아기를 이런저런 포즈를 만들어가고 고무처럼 반들거리는 보정을 해서 꾸며야 할 이유도 잘 모르겠고. 그보다는, 일상 속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요.”


그리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이를 이런저런 포즈로 괴롭히고 싶은 마음도 없다며, 차라리 핸드폰으로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꾸준히 찍어주겠다고 하는 아내. 


나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생각과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10년 전의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도 못나고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에는 나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은 평생 연애도 못해보고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면 입을 헤 벌리고 웃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와, 나도 이렇게 반짝반짝 귀엽고 예쁠 때가 있었구나. 이렇게 젊음과 에너지가 넘치던 때가 있었구나. 나는 이 시절에, 이렇게 빛나고 있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구나.


마찬가지로 10년 후의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담은 영상과 사진 속에서 진짜 값진 나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힘들고 지쳐 눈에 다크서클이 지고 후줄근한 늘어진 티를 입은 채 아이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분주하게 옮겨 다니는 내 모습 속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을 소중하게 만지작거릴 것이다. 아이의 침과 분유에 범벅이 된 떡진 머리마저도 나의 소중한 삶의 한 조각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진짜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남기고 싶다고. 이렇게 하루하루 있는 그대로 치열하게 보내는 우리의 삶이 행복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아내는, 3시간 동안의 고된 시간을 모두 견뎠음에도, 그 결과물을 과감히 버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런 아내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생각이 나와 같아서 정말 다행이야. 아내의 볼을 쓰다듬으며 내가 말했다.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우리는 무료 앨범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 스튜디오와 연계된 어떠한 서비스도 받지 않기로. 대신 우리는 우리 식대로 중요하다 여기는 것을 챙기기로 했다. 정답은 없으니까. 후회하게 되더라도, 그 또한 우리 몫이니까. 


그나저나, 왜 화가 난 거예요?


“그나저나, 왜 화가 난 거예요?”


집에 도착할 때쯤,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가 고개를 돌려 무슨 말이냐고 표정으로 묻는다.”


“아까 스튜디오에서. 영상편지를 보고 나서, 당신이 화가 난 것 같아 보였어요. 아닌가?”


아내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리고 이어진 아내의 대답.


“맞아요. 화났어요.”


“왜? 내가 혹시 뭐 잘못 말했어요?”


“아니. 영상편지는 좋았어요. 다만.”


다만, 스튜디오가 너무 괘씸해서. 아내가 말했다.


“괘씸했어요. 임신해서 호르몬이 날뛰는 임산부한테, 촬영하느라 지치고 힘들어서 진이 딱 빠졌을 바로 그 타이밍에, 감정적으로 무너지기 쉬운 포인트를 공략하기 좋은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을 '이용'했어요. 영상편지라는 방식으로. 그 영상편지도 우리가 받으려면 앨범을 사야겠죠?”


감히, 내 남편을, 자기네 상술에 이용한 게, 너무 괘씸하고 분해서. 그래서 화가 났어요. 아내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내가 앨범을 사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에는 조금 다른 이유도 섞여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만삭 사진 이벤트가 끝이 났다. 임신 30주. 꼬물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간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씩, 느리지만 꾸준히, 엄마 아빠가 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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