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일의 기록
저녁 6시면 습관처럼 냉장고를 열어. 재료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쓸만한 것들을 꺼내며 만들만한 메뉴를 떠올려.
어제는 불고기였어.
불고기를 하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어.
어제는 불고기였어. 엊그제 사둔 고기도 있었고, 하루만 더 지나면 못쓰게 될 것 같은 버섯과 당근이 아까웠어. 신선한 양파가 있으니 불고기를 하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다 네가 떠올랐어. 거실에 있는 네가 아닌, 먼 기억 속의 네가 떠올랐어. 그때의 너와 불고기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네가 떠올랐어. 그때, 너에게 쓰던 매일의 편지가, 일기가, 혼잣말이 두둥실 떠올라 프라이팬 위를 맴돌았어.
둘째의 울음소리가 고기 익는 소리에 묻혀 간간히 뿌리는 소금처럼 들려왔어. 너는 둘째를 안아 달래고 있었고, 동생을 놓고 자신을 안아달라며 우는 첫째는 단호한 엄마의 태도에 방향을 바꿔 내게 달려왔어. 아빠 안아줘. 아빠.
사실은 말이야,
꽤 오랫동안 너를
잊고 지냈어
사실은 말이야, 꽤 오랫동안 너를 잊고 지냈어 너와 함께한 시간은 촉촉한 초록인데, 나의 일상은 온통 갈색으로 물들어 시들어가는 것만 같았어 너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파스텔톤 꿈만 같았어 내게서 사라진 혹은 잊힌 것들이 모인 창고 가장 깊은 곳에 머리를 잔뜩 숙인 채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았어 아이가 떼를 쓸 때마다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나의 가장 예쁘고 소중했던 것들이 멀어지고 있었어
그러다 네가 생각난 거야. 어느 겨울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너는 솜털이 보송보송 난 귀마개를 하고 테이블 너머 내 두 손을 잡은 채 웃고 있었어. 멀리 오래된 목욕탕의 벽돌 굴뚝 위로 하얀 연기가 솟아오르고
창가에 비친 전구의 노란 조명이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있었어 까만 가지 끝에 걸린 붉디붉은 감이 몇 개 전구처럼 매달려 있었어 구름이 연기와 함께 섞여 올랐어 너는 내게 물었어 내가 왜 좋아? 난 그냥 웃으며 말했어. 네가 좋아. 그냥, 너라서 좋아. 나도 모르겠는데, 그냥 네가 좋아
늘어진 티를 입은 네가 반쯤 초점이 나간 눈으로 다가와 식탁에 앉았어. 수유 티를 입은 너는 움직이는 공장이 된 것 같았어. 배부르게 먹은 둘째는 역방쿠에 누워 손발을 휘저으며 엄마 아빠를 보고 있었어. 밥을 먹지 않겠다고 칭얼대던 첫째는 식탁에 둘러앉은 엄마 아빠가 자신에게 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 식탁으로 다가와 자기도 앉겠다고 말했어.
첫째는 몇 숟가락을 뜨더니 고기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어. 새로운 장난감이 된 손에 끼는 유아용 젓가락이 신기했어. 너는 조용히 불고기를 떠서 입에 넣었어. 뜨겁게 끓인 순두부찌개에 숟가락을 깊이 넣고 계란을 건져 올렸어. 씻지 못해 퀭한 두 눈에, 안경에, 김이 서렸어. 맛있다. 네가 말했어. 맛있어. 우리는 그렇게 저녁을 먹었어.
새하얀 겨울의 하늘과
우리의
짙푸른 초록을 떠올렸어
네가 생각이 났어. 새하얀 겨울의 하늘과 우리의 짙푸른 초록을 떠올렸어.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에 자기 싫어 칭얼대는 첫째를 달래 방으로 들어갔어. 아빠 누워. 똑바로 누워. 배 위에 올라앉은 첫째가 까르르 웃으며 내 볼을 쥐었어. 아빠 사랑해. 입술에 입술을 포개는 딸에게 풀꽃향이 났어. 장난기가 오른 딸이 이마로 내 코와 입술을 사정없이 눌렀어. 나는 웃으며, 웃으며 딸을 품에 안았어. 사랑해. 아빠가. 사랑해. 아주 많이. 사랑해.
우리의 하루가 지났어. 불고기 익는 하루가 갔어. 그리고 나는 내일 첫째가 어린이집을 가면, 같이 산책을 할 겸 장을 보러 가자고 네게 말했어.
오늘도 수고했어요. 간신히 잠투정하는 둘째를 재우고 여전히 품에서 내려놓지 못해 안고 있는 네가 말했어. 수고했어. 수고했어요.
내일은 숙주나물과, 계란감잣국과, 네가 좋아하는 진미채를 사서 꺼내놓으려고 해. 그리고 나는 우연히 떠오른 너를 다시 잠시 잊고 지나가려 해. 내일도 나는 뜨거운 밥상을 차리려고 해. 펄펄 끓어 기포가 솟아오르는 국을 내어놓을 거야. 네가 숟가락 깊숙이 묻어 숨겨진 달걀을 찾도록 할 거야. 두 안경 가득 김이 서리도록 뜨거운- 그런 뜨거운 국을 끓여낼 거야.
그리고 다시 잠자리에 들며 말할 거야.
사랑해. 내가. 아빠가. 사랑해. 아주 많이.